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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ug 13. 2019

바다와 산

강호와 의리

강호와 의리혹은 바다와 산     

리쾨르의 논리에 따르면, 한 인물의 정체성 위기는 ‘플롯’의 위기에서 비롯됩니다. 한 인물의 플롯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과정에서 부조화나 불연속성을 보일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정체성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야기의 외적 형태(configuration)의 위기입니다. 이른바 ‘종결의 위기’가 찾아올 때라는 것입니다. ‘종결의 위기’는 앞서 이루어진 모든 이야기들의 행방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한 인물의 정체성 상실과 밀접한 연관을 갖습니다. 저도 언젠가 이 자리에서 “내 이야기가 어떤 식의 종결(終結)을 가질 것인가를 심시숙고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마 독서 시장이 위축되고 이야기꾼들의 판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결국 ‘자기 이야기’에 관심을 쏟는 자들이 그만큼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자리였을 겁니다.     

우리가 ‘시작기의 읽을거리’라고 간주하는 동화(아동 독서물)도 사실은 그런 ‘종결의 위기’에 대비한 읽을거리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무지스러울 정도로 ‘종결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강변)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됩니다. 이야기 속에서 주로 묘사되는 것은 악인들의 말로입니다. 주인공의 인생행로에 장애물이 되는 그들 악인들이 어떻게 제거되고 어떤 식으로 몰락하는가가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그래서 볼만한 악인이 등장할수록 이야기는 더 재미있어 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동화의 주인공들은 그들 여러 ‘실제적인 주인공들’에 둘러싸인 허수아비적 존재에 불과합니다. 동화 속의 주인공들은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악인들(그들은 언제나 ’종결의 위기‘에 노출됩니다)’에 의지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야기 밖에서 늘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독자들의 자화상일 뿐입니다.     

멜라니 클라인은 이야기를 찾는 우리의 무의식은 모친의 가슴에 매달려 있었을 때의 노여움에 찬 유아적 정신병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한다고 말합니다. 클라인에게는 모든 인간이 병자입니다. 인간의 생애는 광기(狂氣)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이 광기는 타인의 광기를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소간 미쳐서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흔히 쓰는 말 속에 나타나는 어던 것들, 예를 들어 마녀, 독살스런 태도, 애타게 하거나 골 빠지게 하는 사람이라는 은유들, 혹은 어떤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의 일반적 인정, 이 모두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유아기의 처벌, 강박관념, 유린에 대한 유아적 환상을 강조하는 이론을 지지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이 샤퍼, 「정신분석학적 대화에서의 서술」, 『현대서술이론의 흐름』 참조]     

멜라니 클라인의 ‘미쳐 있는 어린이’ 가설은 여러 가지로 유용한 관점을 선사합니다. 특히 저희 같은 독서교육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好材)가 됩니다. “우리가 책 읽기를 강조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서서히 치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대놓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야기 중에서도 특히 ‘자기 이야기의 발굴’을 직접적으로 독려하는 이야기들은 인물의 정체성 불안(‘종결의 위기’)을 치유하는 좋은 처방이 됩니다. 일인칭 소설도 좋고, 편지도 좋고, 일기도 좋고, 무협지도 좋습니다. 자신의 ‘플롯’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내는 글들은 언제나 좋은 처방전입니다.     

그러나 좋은 처방전이 능사인 것은 아닙니다. 몸의 질병도 환자의 극복의지가 분명할 때 그 치료가 용이한 것처럼, 마음의 병도 주체의 극복의지가 분명하게 자리 잡아야 그 치유가 가능합니다. ‘종결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책 읽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플롯이 나를 도와 내 플롯을 완성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하인츠 코후트라는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아동들은 분열되지 않고 통합된 자아(cohesive self)를 실현하기 위해서 거의 본능적인 노력을 기울인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아동들이 겪는 ‘분열의 산물’(과대망상적이고 자기위안적인 환상, 방어적인 분열과 억압, 우울증과 같은 병리적 증세)들은 분열된 자아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치유하고 성장을 계속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동기에 특히 독서 욕구(이야기 득기에 대한 욕구)가 넘쳐나는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족 한 마디. 옛날 무협지를 읽던 때가 생각납니다. 거기서 마주친 단어와 관념이 ‘강호’와 ‘의리’였습니다. 그것들이 만약 당시의 어른(어른이 되기 시작한 청소년)들을 위한 ‘인기 동화’였다면 그것들 역시 우리의 ‘플롯’에 필요한 필수적 자양분을 공급하는 중요한 원천적(源泉的) 텍스트가 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험난한 과정을 겪으며 절세의 무공을 얻고, 악을 퇴치하고, 정의와 명분을 내세워 강호의 안녕과 질서를 지켜내고 행복한 해피엔드를 만들어내는 남녀 주인공들의 활약상이야말로, 현실에서든 환상 속에서든, 당시 우리 모두의 ‘플롯’에 필수적이었던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개발도상국가’의 국민으로 살던 우리가 거의 본능적으로 행하였던 ‘치유와 성장’의 노력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어쨌든, 백보를 양보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겪던 모종의 ‘분열’에 대항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 무협지와 무협영화들은 우리의 친절한 정신분석의, 치유의 조력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서해맹산(誓海盟山)’이 화제입니다. 바다와 산이 인간의 맹세를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죽기를 각오합니다.”라는 맹세로 여겨질 때만 바다와 산은 인간을 받아들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분명한 이야기만 그들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다와 산도 결국은 우리가 유구히 지켜온 ‘플롯’의 하나일 뿐이니까요. 

<2013. 8. 13.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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