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Aug 14. 2019

중독의 힘

가면고

중독의 힘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중독(中毒)들을 겪었습니다. 현재의 페이스북 중독을 비롯해서, 소설 중독, 연애 중독, 음악 중독, 종교 중독, 운동 중독, 끽연(喫煙) 중독, 도박 중독, 커피 중독, 단팥(탄수화물) 중독, 과시(誇示) 중독, 이사(移徙) 중독, 글쓰기 중독, 마누라 중독 등등, 그동안 저와 함께 했던 중독 증세들의 면면이 꽤나 화려(?)합니다. 가히 중독의 일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나마 돈 중독, 자식 중독, 출세 중독, 음주 중독 같은 것들이 없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인 듯싶습니다.     

중독자로 살아온 것이 후회스럽지는 않습니다. 한 번씩 중독 증세를 겪으면서 타격도 컸었지만 얻는 게 전혀 없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중독자의 운명이 남긴 생의 얼룩들이 평생 남아 있다는 게 부끄러울 뿐입니다. 중독증을 겪을 때는 막신일호(莫神一好)니 뭐니 떠들면서 중독을 마다하는 이들을 매도하며 살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그때 제게 섭섭한 말을 들었던 이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저의 그런 중독 인생은 일종의 측두엽 이상증세의 일환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과도하게 하나의 물건이나 행동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뇌신경과학 상의 질병이니 그런 차원에서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각설하겠습니다. 제가 젊어서 소설중독자로 살아갈 때 탐닉했던 한 소설을 소개하겠습니다. 최인훈 선생의 『가면고』라는 소설입니다. 4.19 세대들의 ‘아름다운 고민’이 한껏 녹아들어있는 소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4.19 세대’를 좋아합니다. 그분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민을 집단적인 테제로 삼아서 살아본 분들입니다(그 이후의 행로는 각각 달랐습니다만). 저희들 전후 세대들의 ‘젊은 스승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첫 번째 실험에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오늘까지 벌써 몇 차례가 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첫 번을 비롯하여 모든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내가 의식을 되찾고 얼굴에 씌워진 탈을 손으로 당겼을 때 그것들은 힘없이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죽음으로써 호령하는 나에게 마술사 부다가는, 차갑게 대답하는 것이다. 제가 무어라고 처음에 여쭈었습니까. 왕자의 가장 높은 것과 그 낯가죽 임자들의 가장 낮은 것이 한 치 어긋남도 없이 들어맞는 때에만 엉겨붙는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의 말을 믿는 나를 가끔 돌이켜 보았다. 그러나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무서운 굿을 몇 번이나 거듭하는 가운데, 못된 기쁨이 그 속에 있는 것을 알았으며, 그것이 나를 사로잡고 놓지 않을뿐더러, 마법사 부다가의 조형적 논리 속에는 지금의 나로선 끝까지 매달리고 싶은 쉬운 힘과 설득성이 있었다. 나의 방법은 무형적인 것이었다. 부다가의 방법은 뚜렷한 방법이 있었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자꾸 달아나면서도, 여전히 뚜렷한 목표임에는 틀림없었다. <중략>     

그 무렵 나는 서울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마치, 한때 육체의 열반에서 허무를 느꼈던 것처럼, 전쟁의 흥분도 허무를 메우지 못하는 것을 나는 마지막으로 알았다. 싸움이 끝났을 때, 나는, 천막으로 돌아와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짐승이 보였다. 휘번뜩이는 눈과, 부푼 콧구멍과, 더 한층 거짓이 짙게 새겨진 그 탈이 더욱 흉하게 그곳에 어리어 있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에 살아 있던 때의 마가녀공주의 얼굴이, 환히 떠올랐다. 쟁반에 담겨왔던 그녀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모진 마음이 허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바램이 이루어지는 기쁨에 목이 메어 있는 것이라고, 내 가슴의 격동을 자신에게 일러줬었다. 그 얼굴을 아주 제가 가지는 것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빚을 넉넉히 갚을 수 있다고 다짐하려 들었다. 그 얼굴을 쓴 순간의 기쁨과 두려움.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다시 그 얼굴을 당겼을 때, 힘없이 손을 따라 묻어나온 얼굴을 두 손바닥에 받았을 때, 내게는 모든 것이 마침내 끝났던 것이다.

머리를 곱게 빗고 금방 부스스 눈을 뜰 듯이 웃음 띤 그 얼굴은, 목숨을 모독당한 그 자리에서까지도 끊임없이 소리 없는 사랑을 호소하고 있는, 사람 얼굴의 모양을 하고 쟁반에 담겨진 사랑의 모형이었다. 나는 오늘 싸움에서 죽기를 바랬다. 그러나 나는 죽지 못하고 다시 한 번 흥분 뒤에 오는 덩그런 허전함을 겪었다. 이제는 스스로 죽는 길만이 남아 있었다. 죽기 전에 한 가지 할 일이 있었다. 그 일을 마치려고 나는 서울로 달리고 있었다.     

마술사 부다가의 집에 닿았을 때는 새벽이 가까웠다. 

나는 말에서 내려 문을 두드렸다.

한참만에, 문이 열리며, 등불을 한 손에 든 부다가의 모습이 문간에 나타났다. 나는 말없이 집 안으로 들어서서 뒤에 남아 빗장을 잠그는 부다가를 기다리지 않고 <얼굴의 방>으로 걸어갔다. 기다란 복도에는 아직 바깥의 흐릿한 새벽빛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전혀 앞이 안 보이게 캄캄하였다. 나는 마가녀의 얼굴이 놓였을 자리를 어림하여 눈을 돌렸다. 부다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문을 열면 그 손에 들린 횃불이 말없는 얼굴들을 대뜸 밝혀 줄 게다.     

나는 마루에 풀썩 무릎을 꿇며 두 손으로 낯을 가렸다. 처음으로, 이 많은 얼굴들에 대한 공포가 덮쳐들었다. 나는 죄어드는 가슴과 찢어질 듯한 머리의 아픔 때문에 신음했다. 방 안에 부다가가 들어서는 기척이 나고, 낯을 가린 내 손가락 사이로 붉은 기운이 흘러들었다.

나는 오래 그런 대로 앉아서 두려운 듯이 조금씩 손을 아래로 물러 내리다가, 홱 손을 떼 버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행여나 사라졌을까 한, 턱없는 내 바램에 아랑곳없이, 바로 앞에는 시렁의 맨 마지막 자리에서 마가녀공주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얼굴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모든 얼굴이 금시 눈을 뜨고 「여보시오!」하면서 말을 걸어올 것 같다. 나는 낯을 가리며 신음했다. 내 등 뒤에서 마술사 부다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왕자, 후회하십니까?」

나는 벌떡 일어나며 부르짖었다.

「후회한다……」

나는 숨을 모으기 위하여 잠깐 말을 끊었다.

「내 탈을 벗지 못해도 좋다. 영원히 깨닫지 못한 채 저주스런 탈을 쓰고 살아도 좋다. 만일 이 끔찍한 일을 하지만 않았다면, 이 죄만 없어진다면……」

나는 칼을 뽑아들고 마술사 부다가에게 달려들다가, 문득 그 자리에 서 버렸다.     

부다가는 손에 든 횃불을 왕녀 마가녀의 얼굴에 바싹 들이댄 것이다.

어찌된 일일까? 그 얼굴은 금시 얼음 녹듯 철철 녹아내려 그 뒤에 받친 틀과 더불어 질펀히 괸 촛물이 되고 말았다. 부다가는 그 다음 얼굴도, 또 그 다음도, 돌아가면서, 방 안에 있는 모든 얼굴을 모조리 녹이고 있었다.

처음에 나의 머릿속에서 불덩이가 어지럽고 뜨겁게 맴돌아가다가, 마술사 부다가가 일을 거의 끝낼 무렵에는, 그 덩어리에 한 표현을 주고 있었다. 

<가짜, 가짜였구나!>

그 생각은 입으로 그대로 흘러나왔다. 부다가는 천천히 이편을 바라보았다.

「그렇소 왕자. 이 얼굴들은 모두 가짜요. 아교와 초로 잘 만든 탈바가지들이오.」

나는 짐승 소리를 질렀다. 

「저기를 보시오.」 

마술사 부다가가 가리키는 쪽 문이 열리고, 왕녀 마가녀가 두 팔을 벌리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상상을 벗어난 일에 얼이 빠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왕녀의 따뜻한 몸을 자꾸 쓸어 보았다. 그녀의 목에 걸린 눈 익은 진주 목걸이를 몇 번이나 만져 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마술사 부다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 당신은……」 

내 말과 동시에 우리 두 사람의 눈앞에서, 허리가 꾸부정하던 부다가는, 처음에 옛 스승 사리감으로 모습이 바뀌고, 다시 변신하여 저 그림 속에서 본 브라마의 신으로 바뀌었다.

「왕자 다문고, 너의 한 마디가 너의 업(業)을 치웠다. 탈은 벗겨졌다.」

나는 발밑에 떨어진 것을 보았다. 흉하게 이그러진, 주름으로 얽히고, 떨어지면서 비틀려 오그라진 나 자신의 업의 탈을." [최인훈, 『가면고』]     


이 소설은 프로이트식 심리학적 담론을 주된 메시지로 함유하고 있습니다. 가령, 우울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프로이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에 단단히 자리 잡은 아주 강력한 초자아는 맹렬한 힘으로 자아를 질타한다. 마치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모든 가학적인 태도를 모두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가학적 태도에 비추어 볼 때, 이 파괴적인 요소가 초자아에 단단히 자리 잡고서는, 이제 그 초자아가 자아를 맹공하는 것이다. 이제 초자아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죽음의 본능이라는 순수한 문화이다. 실제로 초자아는, 자아를 죽음 쪽으로 강력히 밀어붙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만약 자아가 광기로 방향전환을 하여 이 횡포한 전제자(專制者)를 물리치지 않는다면, 초자아는 자아를 죽음 쪽으로 밀어붙일 것이다.”라고 해설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프로이트 전집 ⅩⅨ, 53)     

『가면고』는 초자아가 자아를 학대하는 장면을 의인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중독은 사실 ‘자아의 학대’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가면고』는 ‘학대받는 자아’를 경험하고 있던 모든 젊은 영혼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소설이었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왕자 다문고’의 ‘탈’을 통한 정체성 탐구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엄살 중독자’의 행색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를 다루는 ‘마술사 부다가’도 엉성하기 그지없는 ‘젊은 스승’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때 문학(소설) 중독자였던 저에게는 이들의 유치한 단막극이 아름답기만 했던 한 편의 계시(啓示)였습니다. 문학이라는 낙원, 그 아름답고 먼 곳으로 저를 불러내는 한 장의 볼 만한 초대권이었습니다.

<2013. 8. 14. 오늘 아침 일부 수정>

작가의 이전글 바다와 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