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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ug 15. 2019

공간과 인간

네모와 동그라미

네모와 동그라미

도형(圖形)의 기묘함에 대한 집착이 인간의 자기실현 의지와 모종의 관련성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다라’라는 종교적 조형행위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원은 하늘, 사각형은 땅을 의미한다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스스로를 네모와 동그라미 안에서 사는 존재라고 규정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도형, 즉 인위적인 공간적 형상화 안에서 의미화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관습인 것 같습니다.  

논어의 첫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배우고 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으로부터 오니 기쁘지 아니한가)’를 이해할 때도 공간적 거리감을 상수(常數)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한 때가 아니었으므로 몇 날 며칠씩, 혹은 몇 달에 걸쳐 먼 길을 걸어온 그 성의(誠意)를 생각할 때 기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간적 거리감을 극복하고 모인 자들이 진정한 벗, 붕(朋)이었다는 겁니다.


공간의 도형화, 공간적 거리감 같은 것들이 일종의 ‘질서’와 ‘규율’로 군림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그만큼 현대적 삶은 그것들로부터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엄숙한 도형들이 많이 군림하는 사회는 다분히 미신적입니다. 행여 절대적 권세를 누리는 도형이 존재한다면 그 사회는 충분히 미개사회입니다. 올림픽에서 우승자들이 자국의 국기를 몸에 감고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이나 국기나 그에 상응하는 도형을 유니폼에 반영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인류의 오래된 관습인 도형에의 집착’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관점은 다른 의미론적 차원은 배제하고 ‘공간(도형)의 인간 구속성’이라는 측면에서만 살필 때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나는 『제3물결 The Third Wave』에서 판매나 교환을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사용이나 만족을 위해 제품, 서비스 또는 경험을 생산하는 이들을 가리켜 ‘프로슈머(prosumer)’라는 신조어로 지칭했다. 개인 또는 집단들이 스스로 생산(PROduce)하면서 동시에 소비(conSUME)하는 행위를 ‘프로슈밍(prosuming)’이라고 한다.
우리가 파이를 구워 그 파이를 먹는다면 우리는 프로슈머이다. 그러나 프로슈밍은 단순히 개인 차원의 행동이 아니다. 돈이나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바라지 않고 가족, 친구, 이웃과 나누고자 파이를 구웠을 수도 있다. 교통수단, 커뮤니케이션, IT의 발달로 세계가 점점 작아지는 오늘날 이웃이라는 개념은 세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는 심층 기반인 공간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변화된 결과이기도 하다. 프로슈밍에는 세상 반대쪽에 사는 타인과의 공유를 위해 대가를 받지 않고 창조하는 가치도 포함된다.
인생을 살면서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프로슈머가 된다. 사실 모든 경제에는 프로슈머가 존재한다. 극히 개인적인 필요나 욕구를 시장에서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없고, 또 너무 비쌀 수도 있다. 혹은 사람들이 프로슈밍 자체를 사실상 즐기고 있고, 때때로 프로슈밍이 절박하게 필요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화폐 경제에서 잠시 눈을 떼고 경제에 대한 이런저런 주장들에서 벗어나 보면 몇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프로슈머 경제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이고, 둘째 우리가 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들의 일부가 이미 프로슈머 경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셋째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크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토록 면밀히 관심을 기울이는 화폐 경제 안의 50조 달러는 프로슈머 경제 없이는 단 10분도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기업인과 경제학자에게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격언보다 가슴에 와 닿는 말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이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뱉어 낸다. 그러나 이 말만큼 혼란을 주는 말도 없다. 프로슈머의 생산력은 전체 화폐 경제가 의존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생산 활동과 프로슈밍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앨빈 토플러, 『부의 미래』 중에서]


저에게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오늘날 이웃이라는 개념은 세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라는 말이 큰 울림을 선사합니다. 역사적으로 공간과 인간 사이에 설정된 기본적인 관계가 큰 변화를 보이고 있는 현실에서, 그러한 심층 기반의 변화가 초래하는(유도하는) 인간 존재의 바람직한 존재 양태에 대한 보편적(실존적) 인식(앞으로 인류의 삶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가)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프로슈밍이라는 인간 행태와 관련해서 설득적으로 기술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프로슈밍의 경제적 의의를 강조하는 표층적인 의미와는 달리 텍스트 무의식 차원에서 제출되고 있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박애사상이 돋보이는 대목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공간적 존재입니다. 인간이 몸을 가지고 사는 이상은 그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왔습니다. 좁고 답답한 네모와 동그라미 안에서 갇혀 살기에는 우주가 너무 광대합니다. 조만간 “오늘날 이웃이라는 개념은 우주를 의미할 수도 있다”라고 말하는 미래학자가 등장하길 기대합니다.


사진은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의 외면 모습. 원과 장방형 등 전통적인 인위적 도형에 변화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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