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Aug 16. 2019

곱다, 밉다

박자 무시 노래 하기

고래사냥     

옛날에는 노래 부르기를 즐겼습니다. 좋아하는 노래가 생기면 곧잘 따라 불렀습니다. 음정과 박자를 맞추어서 불러 보다가 나중에는 박자도 제 멋대로 늘여서 불러보기도 하고 음 높이에도 이리저리 변화를 주기도 했습니다(송창식의 ‘고래사냥’으로 재미를 좀 봤습니다).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빈잔>을 자기 식으로 리메이크한 것처럼 고음에서는 소리를 탁성으로 바꿔서 불러보기도 했습니다. 친구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노래 못하는 집사람은 늘 불만이 많았습니다. 왜 그렇게 노래를 성의 없이 부르냐는 거였습니다. 박자 무시, 청중 무시가 아니냐는 거였습니다. 노래방에만 갔다 오는 날이면 늘 “노래 좀 제대로 불러봐라.”고 타박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박자 맞추어 부르는 건 가수가 아니다.”를 반복했습니다만 아내는 제 말을 도저히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인생 말년에 임재범의 <빈잔>을 본 뒤부터는 약간 누그러지는 듯했습니다만 큰 테두리 안에서는 아직도 ‘음정과 박자’를 중시하고 미성(美聲)을 쓰는 것이 노래 잘 부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를 깎으러 미장원에 갔다가 어떤 ‘여성잡지’에서 장사익 선생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선생이 사십 넘어 국악을 배우러 선생님 댁을 드나들던 때였는데, 하루는 선생님이 노래를 불러보라고 해서 불렀답니다. 애써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노래를 중단시키더란 겁니다. “왜 굳이 박자를 지키려 애쓰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박자 잡지 말고 그냥 한 번 불러보라고 권하더란 겁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감정을 잡아서 노래를 했더니 그때 비로소 제 노래가 터져 나오더란 것입니다. 음정이든 박자든 남의 것으로는 제대로 된 제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는 걸 그제야 선생은 알았다는 거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제가 노래를 부르며 느끼던 것과 똑같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집사람에게 해주려다 말았습니다. 음정 박자 맞추어서 노래 한 번 해 보는 게 평생소원인 사람에게 그것들을 개무시하는 게 진짜 노래 부르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북한에서 판소리가 대접 받지 못했다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 대신 노자 말씀 한 편 읽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기로 했습니다.      


....천하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 알지만 (꾸며서 이목을 현혹시킨 것이라면) 이것은 미운 것일 뿐이다. 천하 모두가 착한 것만이 착한 줄 알지만 (의도해서 만든 것이라면) 이것은 착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하며, 높고 낮음은 서로 바뀌고, 소리와 울림은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노자 2장   

  

기실, 예쁘다, 아름답다, 하는 것들은 보는 이의 마음이 대상에 매혹되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못난 것을 두고 ‘밉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곱다’, ‘예쁘다’의 반대말로 ‘못났다’가 아니라 ‘밉다’를 많이 썼습니다. 저는 집안의 한 어른에게서 그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자신의 외모를 두고 늘 “내가 좀 밉게 생겨서...”라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못 생겨서...”라는 말은 단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름답게 여기는 것과 추하게 여기는 것이 결국은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과 다른 것이 아니고 그것들 역시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한데 붙어있는 것이라는 노자의 말씀을 듣고 나니 그 어른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제가 요즘 좀 잘 하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집사람도 제 노래를 곱게 봐 줄 날이 있겠죠?

작가의 이전글 공간과 인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