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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ug 26. 2019

빛나는 것들, 은유

푸른 빛과 싸우다

빛나는 것들은유


명사나 형용사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 세상은 행복하다, 동사만 알아야 하는 지도자를 요구하는 세상은 불행하다.... 문득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드는 시절입니다. 


"이런 정신적 수준에서 여러분이 사용하는 언어는 의식 또는 자각의 언어(the language of consciousness or awareness)이다. 그것은 대체로 명사와 형용사의 언어이다. 여러분은 사물들에 대한 명칭을 가져야 하고, 사물들이 어떻게 보였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젖은’ 혹은 ‘초록의’ 혹은 ‘아름다운’과 같은 성질을 나타내는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이는 명상적 혹은 사색적인 마음의 자세로, 비록 그것들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자세에서 예술과 과학은 시작된다"(노드럽 프라이, 이상우 옮김, 『문학의 구조와 상상력』, 집문당, 1987, 16쪽)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 중의 하나가 ‘상상작용(imagination)’입니다. 그것 없는 인생은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입니다. 제 인생에 지금 앙꼬가 없습니다. 상상작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고작 한다는 일이 페이스북에 미주알고주알 시골 늙은이의 재미없는 일상을 등재하는 일입니다. 더 노력해서 성취할 일도 없습니다. 그저 심심합니다. 그래서 홧김에 머리를 깍고 온 적도 있었습니다. 완전 삭발을 하려다가, 나이도 있으시고 하니 ‘반삭’으로 하시라는 권선생(단골 미장원 스타일리스트입니다)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1cm 정도는 남기고 다 잘라(밀어)버렸습니다. 영락없는 노스님 모습이었습니다. 아내가 그 모습을 보고는 깔깔 웃더니 “왜 그러는데? 노망도 아니고. 하긴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귀여웠을 텐데...”라고 한 마디 합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밖으로 못 나갈 바에야 안으로나 한 번 쎄게(?) 들어가 볼려고.” 그 안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냅다 내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면 약간 찔리는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이 조급증 때문에 언젠가 한 번 크게 독박을 쓸 것 같습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곧 신경증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경증은 우리 상상체계에 모종의 버그(바이러스)가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버그가 끼면 필요 이상으로 가동되는 부분이 생기고, 필요한데도 참조하지 않고 그냥 건너뛰는 부분이 생깁니다. 대체로 시계의 초침과 같은 템포로(촉박하고 긴밀하게) 생각과 행동이 이루어집니다. 정당한 추리와 직관에 필요한 시간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습니다. 건강한 상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상상작용인데, 그것에도 정해진 급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1급, 2급, 3급이 있습니다. 가장 저급한 것이 자애적(自愛的) 상상력입니다.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도 "제가 눈치가 좀 없어서요."라고 자신을 두둔합니다. 

콤플렉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런 자애(自愛) 증상입니다. 알면서, 그것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하면서, 끝까지(죽을 때까지) 그것을 놓지 못하고 사랑합니다. 겉으론 멀쩡해도, 안으로는 피멍이 들어도 깊게 들어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인성으로서 ‘타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갖추어져 있질 않습니다. 겉으로는 법 없이도 살 만큼 점잖은 사람이지만 그들은 항상 목전의 사익(私益)만 봅니다. 결과로 보면 그들은 항상 그 사익을 위해 삽니다. 그걸 보고는 절대 참지 못합니다. 사익을 취한 결과에 대해서는 일절 반성이 없습니다. 역지사지는커녕, 모든 사후작용은 자기합리화를 위해 봉사합니다. 그렇게 심보가 고약한 상황을 ‘눈치가 없다’는 한 마디로 다 덮으려 합니다. 한 때 ‘정의론’이 유행할 때 그들은 한 목소리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라고 외쳤습니다. 


저도 젊을 때 그런 심보가 남들 못지않았습니다. 번지지 못하고 늘 제 생각만 했습니다. 조급하게 살았습니다. 밖에서는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제 일신이나 가내(家內) 사정일 때는 전혀 숙고할 시간을 두는 일이 없었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사정이 좀 완화되어(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죽을 때 후회하는 세 가지, “참을 걸, 베풀 걸, 즐길 걸” 중에서 마지막 ‘즐길 걸’ 부분의 후회가 가장 막심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드는 탓입니다. 


조급증을 달래는 수단으로 난해한 시 한 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시는 우리 내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상작용 중의 한 극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들이 유관한 이미지들의 도움을 받아 시적으로 표현됩니다. 시인의 상상작용만으로 한 편의 시를 만들어냅니다. 주장도 없고 설득도 없습니다. 시인은 조급증이 애초에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 조급증과 안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독자들은 자신의 조급증과 싸우면서 읽어야 할 시입니다. 시에 관심 없는 분들은 아예 건너뛰시는 게 조금이라도 덜 억울한 일이 되지 싶습니다.


푸른빛과 싸우다 (송재학)

― 등대가 있는 바다


등대가 보이는 커브를 돌아설 때 사람이나 길을 따라왔던 욕망들은 세계가 하나의 거울인 곳에 붙들렸다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 수사마저 햇빛에 섞이고 마는 그곳이 금방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다 밝음과 어둠이 같은 느낌인 바다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는 내 하루를 기억한다 나무들은 밤이면 괴로움과 비슷해진다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 아마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 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 내가 만졌던 고기의 푸른 등지느러미, 그리고 등대는 어린 날부터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까지 비추어왔다.


돛이 넓은 배를 찾으려고 등대에 올라가면 그 어둔 곳의 바다가 갑자기 검은 비단처럼 고즈넉해지고 누군가가 불빛을 보내고 그의 향로와 내 부끄러움을 빗대거나…… 죽은 사람이 바다 기슭에 묻힐 때 붉은 구덩이와 흰 모래를 거쳐 마침내 둥근 지붕 생기고 그 아래 파도와 이어지는 것들…… 혼자 낡은 차의 전조등 켜고 텅 빈 국도를 따라가면 고요를 이끌고 가는 어둠의 집의 굴뚝이 보인다, 낯선 이가 살았던 어둠, 왜 그는 등대를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가


바다를 휩쓸고 지나가는 햇빛은 폭풍처럼 기록된다, 그리고 등대 [『푸른빛과 싸우다』(문학과지성사, 1994)]


이 시를 한 번 읽고서는 시인이 무슨 뜻을 전하려는지 금방 알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이 얼핏얼핏 보이는데 그게 일상의 언어로, 자동적으로, 치환되지 않습니다(언어의 비자동화가 강조되는 시스템 언어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다른데서 찾으면 안 됩니다. 스스로를 무지하다고 탓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시인은 아무나 그저 한번 후딱 자기 시를 읽고 지나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급증을 되게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급증 내지 말고, 찬찬히 생각해야 합니다. 비단 이런 이미지 중심의 시를 읽을 때가 아니더라도, 주로 섣부른 전문적(?) 독자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만, 자기 문맥으로 시가 들어오지 않으면 막말로 ‘난해하다’는 등의 말을 내뱉으면서 쉽게 시를 버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래서 ‘무조건 쉽게 쓰는 게 도덕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불문율이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이 시를 쓰면서 보낸, 그 아름답거나 절망적인 시간들을 반드시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내 아름다움이 무엇이고 내 절망이 무엇이냐를 지속적으로 물어주어야 합니다. 시인은 그저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어렵지 않으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는 입에 넣기만 하면 자기가 알아서 녹는 달콤한 초콜릿이 아닙니다(그 안에 깨물어 먹어야 할 아몬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시를 읽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시를 읽을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시는 뜻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뜻으로 매겨지지 않는 그 어떤 것들로 가득합니다. 시인은 뜻보다는 오히려 그 다른 쪽들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언어라는 것이 겉으로 뜻에 목을 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만 시인들은 가차 없이 그 허구를 들추어냅니다. 시인은 항상 뜻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시어의 총체성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하는 것들, 이를테면 말뜻(Sense), 느낌(Feeling), 어조(Tone), 의도In-Sook Yangtention) 등을 두루 살펴야만 우리는 ‘시인의 시간’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이 시, 이 기록을 남기는 발화자(시인)의 ‘시를 쓰는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물론 이 시에 나타난 것을 중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적 발화의 ‘의도(Intention)’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정도의 큰 방향이 가능하겠습니다. 하나는, 마치 화가가 좋은 풍경을 풍경화로 남기고 싶어 하듯이, 시인도 ‘등대가 있는 바다’를 서정적으로 멋지게 한번 그려보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방향에서라면 이 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음미하면서 우리도 느긋하게 그와 함께 등대가 있는 바다를 한번 그려보면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그냥 끝내면 됩니다. 만약, 그러고 말기에는 무언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 ‘그림’ 위에다 다시 한 번 내 물감으로 덧칠을 해 보면 됩니다. ‘내 안의 풍경’을 꺼내서 그것에다 겹쳐 보면 됩니다. 아마 우리는 후자 쪽을 택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 시가 ‘풍경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내면의 성찰’을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짐작은 이미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들었던 사실입니다. 시인의 ‘싸움의 기술’을 잘 읽어내어야 한다는 각오가 처음부터 들게 합니다. 이미 그 언사에서부터 시인이 삶과 죽음을 하나의 ‘수평선’ 위에서 바라보는 ‘삶의 등대지기’를 자처하는 것 같은, 어떤 구도자와 같은, 느낌을 받았고, 싸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푸른 빛’이 발산해내는 그 신비한 아우라에도 약간 주눅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와 같은 시와는 벌써 제목부터 다릅니다. 그런 느낌을 출발점으로 해서 이 시가 어떤 식으로 ‘자기 성찰’의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성찰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시인의 의도를 ‘내면 성찰’ 쪽에서 살피려면 우선 그가 내세우는 ‘푸른빛’의 의미부터 알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사전적 의미의 ‘푸른빛’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함축적 의미는 늘 사전에 없는 것입니다. ‘싸움’의 대상이니까 ‘즐거움’보다는 ‘고통’의 색깔일 텐데 우리는 그 ‘고통’이 어떤 내용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시에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적 삶이 서로 대립적인 그 무엇으로 설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 그 자체가 고통인지, 아니면 현재의 삶을 아프게 반추(반성)하도록 강요하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현재가 고통인지 그 자세한 내막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인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낍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이리저리 독자를 미로 속으로 안내하는 것을 보면, 시인은 어쩌면, 그런 사실적인 것(원인)에 관심하지 말고 ‘고통’ 그 자체에만 집중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 없는 자는 내 시를 읽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시인이 이 시를 쓴 진짜 목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의 공유, 시 내용은 그 다음 문제고, 시인은 고통(기억)을 잊지 않는 삶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에는 이른바 ‘비유와 상징’이 개인적인 경험, 혹은 오래된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짜여있습니다. 특히 ‘나무’와 ‘등대’는 전적으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이미지들이어서, 그 상처의 근원을 모르는 독자들은 쉽게 의미의 그물을 짜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첫 줄부터 그렇습니다. ‘등대가 보이는 커브를 돌아설 때 사람이나 길을 따라왔던 욕망들은 세계가 하나의 거울인 곳에 붙들렸다’라는 말을 ‘등대가 있는 바다(세계의 거울)에 도착하자 나는 망연자실했다(세속적 욕망들의 행진이 일순 정지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읽고 싶은데, 그 뒤를 보면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금방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다’라고 그런 식으로 독자가 쉽게 읽어내지 못하도록 하는 어깃장 문맥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남의 일로 치부하고 쉽게 읽어내는 시 읽기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만,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라는 말을 위안 삼아 다음 줄로 넘어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시인 스스로 ‘모르겠다(의문이다)’라는 표현을 쓴다면 십중팔구는 그 부분이 트라우마의 원적지라는 말입니다(알면서도 모르는 것이 그들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는 분명합니다. 아마 시인은 그 장소에서 ‘상처 입은 주체’가 되는 자극(충격)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푸른빛’으로(색채 이미지로) 감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연에서는 이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한두 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하루을 기억하는’ 것은 우선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 나무들은, 특히 밤이면, ‘잠언’처럼 ‘나’에게 다가와서 ‘기억’을 환기시킵니다. 그것이 괴롭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고기의 푸른 등지느러미’, ‘등대’,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과 같은 또 다른 ‘내 하루를 기억’하는 것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들은 ‘해송과 배롱나무’와는 달리 한 번 더 가공된 기억들입니다. 유년기의 ‘상처’가 긴 세월 숙성기를 거쳐 그렇게 몇 개의 단어들로 삼투압된 것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든 의식화(의미화)하겠다는 의지를 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런 식의 사후작용(事後作用)이 어떤 의미화를 이루어내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어쩌면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경계선 밖의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시인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만, 자신이 그 과정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앞에서도 ‘푸른빛’이라고만 말하고는 더 이상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내용을 독자가 알아서 채워 넣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결국 자신의 고통으로 환치될 때 비로소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계속해서 모호한 발화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둘째 연까지 읽어도 여전히 ‘푸른빛’을 이해하는 데에는 미진함이 남습니다. ‘고통’과 관련된 말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의 어떤 기억과 싸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시인도 어쩌면. 그런 까닭에서 그저 ‘푸른빛’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마저 듭니다.


셋째 연으로 가 보겠습니다. 셋째 연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부분은, 등대에 오르는 것이 과거의 기억인지 현재의 경험인지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해서 바다를 바라보는 경험이 ‘검은 비단’과도 같은 심리상태를 선사하는 것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무겁고 부드러우며 균질적인 매끄러움이 있는 세계, 안정감이 있는 어떤 심리적 에너지가 현재 자기 안에서 운행되고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시인은, 그런 바다 앞에 섰을 때 돌연히 ‘부끄러움’이라는 정서가 환기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부분에서는 죽음을 관조하고(시인은 바닷가 무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금도 ‘기억’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 심정을 반추합니다. 마지막 부분, ‘왜 그는 등대를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가’라는 말이 이 시를 주제의 차원에서 대표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등대’는, 넷째 연에서 그것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어린 날’의 ‘기억’을 대표하는, 혹은 통어하는, 하나의 중심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굳이 그 관습적 상징의 의미를 들추자면, 지상에 수직으로 서서 먼 바다의 행로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하는, 화자 자신의 자기실현에 대한 강한 의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연은 그 날, ‘푸른빛’을 만나던 그 날의 심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햇빛’이 ‘폭풍처럼 기록된다’는 것은 그만큼 주체가 입은 상처의 흔적이 컸다는 뜻입니다. ‘햇빛’의 원관념이 ‘강렬’이 되는 ‘각성’이 되든 ‘경탄’이 되든 ‘경악’이 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 강렬하게 자신의 내면에 금이 간 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만 알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고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의미의 영역은 아주 협소합니다. 시인이 스스로 ‘상처 입은 주체’임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시인이 그것을 감추는 것을 통해 그것을 말하는 방식으로 시의 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내용과 관계없이 우리는 그러한 ‘시의 형식’을 통해 ‘주체의 분열’이라는 상황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굳이 심리학적 용어를 동원한다면, 이 시의 내적 형식은 자기 분열이 주는 이화(異化)의 고통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시인은 자기 분열이 주는 이화의 고통을 색채 이미지 ‘푸른빛’이라는 말로 상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푸른빛’과 싸운다는 것은 결국 시인 자신이 새로운 자기통합의 과정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의 주제를 찾아보겠습니다. 시에서 주제는 항상 마지막 주자입니다. 단체전의 주장이지요. 주장이라고 늘 어깨가 무거운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승부를 결정지으면 주장의 경기는 그저 ‘폼생폼사’일 수도 있습니다. 시에서 주제의 위상이 딱 그렇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서서 승부를 결정짓는 수준이라면 그 시는 일류 시가 아닙니다. 하이데거의 ‘일상성(日常性)과 본래성(本來性)’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좀 쉬운 해설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보다 실존적인 층위에서 포괄적인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포괄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가 넓은 만큼, 뜻 전달의 모호성이 강한 이 시의 ‘설명과 이해’에는 오히려 적절한 ‘서술어’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그것을 비본래적으로 사용하여 대지 위에 문화라는 울타리를 건설하고 뿌리 없는 불안정한 생존 조건을 극복하여 일상성이라는 안락한 거소(居所)를 이룩하였다. 그러한 일상성 속에서 사는 일상인으로서 그는 오랫동안 어머니인 대지를 망각하고 자신을 오히려 문화의 테두리 안에 길들임으로 해서 울타리의 존재마저도 잊고 있었다. 그의 생활방식은 그러므로 근본적인 의미에서 볼 때 본래성으로서의 자연인 대지와의 단절을 심화시키는 비본래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자연과의 단절은 비록 삶의 표면에 있어서는 안락하고 평화스러운 것이었으나, 때때로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불안은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근심이나 걱정과는 달리 일정한 대상을 갖고 있지 않은, 알 수 없는 무(無)로서, 근원적인 물음에 부딪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이 불안은 그러므로 비본래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오히려 배반했던 대지에 대해 가지는 그리움이요, 또는 망각하고 있던 본래성으로부터 흘러오는 거부할 수 없는 종소리와 같은 것으로서 일상언어(비본래적인 언어)를 갖고 사유하는 그에게 일상성에 대한 배반을 요구하는 불안이다.” (하이데거, 이진흥, 『한국현대시의 존재론적 해명』(홍익출판사, 1995)에서 재인용)


위의 인용문을 보면 「푸른빛과 싸우다」에서 왜 ‘푸른빛’의 실체가 모호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는지가 설명이 됩니다. 그것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도 저절로 이해가 됩니다. ‘나무들은 내 본래성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 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라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성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우리는 모두 ‘불탄 폐허’ 위에서 ‘안락한 일상성의 거소’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는 시인의 일상성이 ‘본래적 자아’ 혹은 ‘불안’을 만나 ‘배반’을 강요받았던 경험에 대한 진술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시인에게는 특히 ‘일상성에의 몰입’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는 타고난 ‘대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푸른빛과 싸우다」의 시인은 ‘대양(大洋)의 아들’을 자처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대양’과 ‘대지’가 그저 이음동의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모를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족 한 마디. 지금까지 저는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시와 한 판 ‘소리 없는 전쟁’을 치렀습니다. 시인의 실존이 처음부터 끝까지 규칙을 어기며 도발해 왔지만 저는 그의 반칙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일상을 같이 나눈 친구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저의 이 싸움은 오늘 처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진 ‘싸움의 기록’입니다. 앞서 나온 저의 다른 책에도 이미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약간의 수정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다시 그것을 옮겨 적으면서 느끼는 소감은 처음 때와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시의 이미지 중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도 있고 바다에서 건져올리는 것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 시의 이미지들은 바다 깊은 곳에서 건져올리는 것들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늘 내 안에 있습니다. 바다에 큰 해일이 몰려올 때 안에 든 것들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러나 늘 잔잔한 바다일 때는 이 시에서처럼 우정 스스로 ‘등대’가 되어 그것들을, 저 깊은 곳에서, 비추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2013. 8. 26.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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