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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Aug 28. 2019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장사의 기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 주머니로 옮기는 일입니다. 소소한 장사로 큰돈을 버는 이들(서민갑부, 생활의 달인)이 남달리 위대한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조그마한 가게의 주인들에게도 예외 없이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오늘은 그 어려운 '파는 일'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상품(물건이나 서비스)을 팔고자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무엇일까요? 손해 보고 판다(나는 도둑 아니다), 물건 좋다(한 번 써 보면 내 물건의 진가를 안다), 누구누구도 샀다(다 샀으니 안 사면 바보다), 정도가 아닐까요? 상품은 아니었지만 제가 검도라는 좋은 운동을 같이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권할 때 주로 사용했던 상술(?)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정색을 하고 그 세 가지 말을 주로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효험있었던 것이 ‘누구누구도 샀다(다 하는데 안 하면 왕따된다)’였습니다. 나이나 신분을 막론하고,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척 보면 아는’, 식자층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부화뇌동(附和雷同)’이 가장 안전한 생존전략이라는 것이 오래된 인류의 지혜인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특히 자신이 모르는 세계로 진입할 때는 항상 누군가의 뒷줄에 서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 인류의 오랜 경험칙인 것입니다.


한편, 누가 와서 자꾸 상품을 사라고 조를 때 거절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말이 마침 돈이 없다(다른 때는 늘 있는데), 당장 필요가 없다(물건은 좋은데), 지금 좀 바쁘다(늘 별일 없지만 지금은 바쁘다), 아무도 안 사는 것 같다(믿음이 안 간다), 정도가 되지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젊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검도라는 ‘싸움의 기술’을 권할 때 들은 거절의 언사(言辭) 중에는 좀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미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는 것이 두렵다."라는 언사입니다. 주로 식자층들이었기에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 번 시작하면 거기에 온통 내 삶을 투여해야 하기에 지금 하고 있는 장사에 손해를 많이 본다는 것입니다. 손해보는 일은 장사에 절대 금기이기 때문에 새 일에는 함부로 끼어들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열이면 여덟 아홉은 그런 말로 거절했습니다. "하고는 싶은데 지금 하는 장사에 여력이 없어서 못한다.", "이 나이에 시작하려니 체력에 자신이 없다.", "용기가 잘 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무엇엔가 어렵게(노력해서) 몰입을 해본 이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심리내적 에너지의 변환과정’을 겪어본(겪었다고 여기는) 이들, 그리고 스스로 성공한 자라고 여기는 이들은 ‘새로 시작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모든 일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기 대문이지요. 그것이 의식적으로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가치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를 강요합니다. 무엇이든(자의든 타의든) 시작한 일에서는 반드시 성공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강박과 함께, 무엇이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은 ‘남달리 위대하다’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그들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새로운 ‘가치있는 일’을 들고 나와서 같이 해보자고 했을 때 그들은 내심 당황합니다. 그건 지금 자기(가 쌓아온 성과적인) 장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 장사가 쉬운 일이 아니다 싶을 때는 저항이 더 심하게 옵니다.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을뿐더러, 지금껏 애써 이루어놓은 것을 지키기도 바쁜데 이 시점에서 ‘성을 허물고 새로 길을 낸다’는 것은 큰 모험입니다. 공연한 호기심에서 자신을 허무는 일이 동조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들게 합니다. 그런 불안이 전혀 엉뚱한 언사(言辭)를 만들어냅니다. 일종의 ‘방어기제’를 동원하는 것이지요. 시작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끝을 보는 성미’ 때문에 현재의 일상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는(장사에서 손해볼 것 같다는), 합리화치고는 아주 지적인 합리화(겉으로 보기에)를 만들어냅니다. 그런 대답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여러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정말이지 신기합니다. 20세기의 큰 팥쥐 프로이트의 말(콤플렉스 이론)이 전혀 근거없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겠습니다.


‘싸움의 기술’을 몸으로 익히다 보면, 자신의 허약과 나태를 다른 원인으로 돌리려는 이들을 많이 봅니다. 물론 제 자신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몇 가지 소개합니다. 검도라는 무용(無用)의 기술에 집착하는 것은 일종의 신경증에 속하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회의에서부터, 상대의 가격(加擊)이 워낙 난폭해서 이쪽도 부득불 자세가 무너졌다, 양손을 짜서 치라는 것은 결국 내쪽에서의 타격감과 속도를 상쇄시키는 것인데 격투기에서 꼭 그래야 될 필연이 있느냐, 무조건 치고 나가라는데 나 같이 나이 든 입장(늙고 병든 몸)에서 좀 서서 치면 어디가 덧나냐... 제 몸이 힘들어 하는 것들에게는 모두 트집을 잡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살펴보니 그런 트집은 모두 저 자신의 몹쓸 ‘허약과 나태’에서 비롯된 것들이었습니다. 모두 ‘방어기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방어'에 급급해서는, 말만 앞세워서는, 진정한 의미의 ‘끝'을 볼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매사에 끝을 보는’ 성미는 스스로 자신의 ‘허약과 나태’를 다스릴 수 있는 의지와 집념을 가진 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질병입니다. ‘끝을 본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그 성미 때문에 새로운 ‘길 없는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는 것은 모순어법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겁니다. 그런 언사를 제게 하신 분들에게는 좀 미안합니다만(모두 잘 되자고 하는 소리랍니다) 그런 걸 두고 ‘징징거린다’라고 말하는 것이지 싶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손해보는 장사에도 한 번 몸을 던져 봅시다.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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