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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03. 2019

땅과 인간

십승지지

땅과 인간

저는 풍수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제 때 배우지 못한 자들'의 보상심리에 기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저 재미있자고 하는 말들로 여깁니다. 그러나 '기분좋은 땅'이 있다는 것까지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소위 '십승지지'도 그런 것(좋은 기분)들의 일종이라 생각합니다.


십승지지 : 십승지(十勝地)라고도 한다. 이에 대한 기록은 〈정감록 鄭鑑錄〉·〈징비록 懲毖錄〉·〈유산록 遊山錄〉·〈운기귀책 運奇龜責〉·〈삼한산림비기 三韓山林秘記〉·〈남사고비결 南師古秘訣〉·〈도선비결 道詵秘訣〉·〈토정가장결 土亭家藏訣〉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공통되는 장소는 다음과 같다.
영월의 정동(正東) 쪽 상류, 풍기의 금계촌, 합천 가야산의 만수동 동북쪽, 부안 호암(壺巖) 아래,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남원 운봉(雲峯)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안동의 화곡(華谷), 단양(丹陽)의 영춘(永春), 무주(茂朱)의 무풍(茂風) 북동쪽 등이다. 이중에서 위치를 현재의 지명으로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는 곳은 운봉의 동점촌, 무풍의 북동쪽, 부안의 호암, 가야산의 만수동이다. 한편 영월 정동 쪽 상류는 오늘날의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풍기의 금계촌은 영주군 풍기읍의 금계동·욕금동·삼가동 일대, 공주의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는 말 그대로 공주군 유구면과 마곡면을 각각 흐르고 있는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의 지역, 예천 금당동 동북쪽은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의 금당실(金塘室) 지역, 보은의 증항 근처는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인 시루봉 아래 안부(鞍部) 지역, 안동의 화곡은 봉화군 내성면 지역, 단양의 영춘은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 부근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모두 남한에 편중되어 있고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접근하기 힘든 오지이다. 이런 곳이 선호된 것은 전통사회에서 전쟁이나 난리가 났을 때 백성들이 취할 수 있는 방도란 난리가 미치지 않을 만한 곳으로 피난하여 보신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십승지에 대한 열망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6·25전쟁 때에도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십승지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피란·보신의 소극성은 단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이상세계를 대망하는 적극성과 연결되어 있다. [daum 사전]  


언젠가 합천호(합천댐이 만든 호수) 쪽 어디쯤에서 제 주관적인 ‘십승지지’를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있다는 친구의 본가를 물어물어 찾아가는 길이었는데 높지는 않았지만 웅장한 품새를 자랑하는 돌산이 하나 솟아있는 아래로 넓지는 않았지만 일망대해로 펼쳐져 있는 논들(평야)이 있었고, 그 한 가운데 그 친구네 집이 있었습니다. 마치 절해고도처럼 오도커니 홀로, 딱 한 채만,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논 한 가운데에 낡은 기와집 한 채가 들어서 있었던 것입니다. 가히 생경스러우면서도 오묘한 풍경이었습니다. 장엄한 뒷배경이 되고 있는 외(巍)돌산과 어울려서 공연히 보는 이를 압도했습니다. 무언가 평화스러우면서도 경외로운 심사가 제 가슴께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그 장면이 딱 한 컷 상영되고는 이내 사라졌습니다. 순간적으로 ‘이건 십승지지다’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더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인근에서는 알아주던 유학자이신 친구의 아버님을 뵙는데 완연한 도인이셨습니다. 암 수술을 받고 나서 생식으로 십수년을 버틴다는데 여즉 정정하셨습니다. 젊어서는 영험한 한의(韓醫)로도 맹활약을 하셨는데 자격고시를 학력 미달(無學者)로 보지 못하시고 전을 접었다는 일화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당시 소학교(초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 규정 때문에 가전비학을 펼칠 기회를 잃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춘부장이 따로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집터를 잡을 때 풍수설을 많이 참고하신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쉬웠던 것은, 그 뒤 한 번 더 그 길을 답사하였는데, 종내 그때의 ‘십승지지’의 경지를 리바이벌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길 저길, 여러 군데의 통로로 답파하면서 그때의 그 장면을 다시 보기를 원했지만, 해가 지도록 결국 그 장면은 제 눈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선학동 나그네>(이청준)의 비상학처럼, 십승지지도 보는 이의 마음에 그려지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역시 믿거나 말거나이겠지만, 어제 성주군 월항면 소재 세종대왕자태실에 들렀을 때도 얼핏 '십승지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그리고 단종의 태실이 나란히 들어앉아 있는 태실을 둘러보고, 권력의 무상함과 인륜의 준엄함을 동시에 느끼며 터덜터덜 언덕 아래로 내려오던 제 발걸음을 멈추게 한 태실 맞은편의 풍경이 그것이었습니다. 그 옛날 가야산 언저리에서 보았던 것만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인 시루봉 아래 안부(鞍部) 지역(충북대 재직 시절 자주 다니던 곳입니다) 정도는 충분히 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거다 싶어서 셔터를 눌렀지만 집에 와서 사진을 띄워놓고 보니 역시나 범상한 풍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승지지를 사진 속에 담아서 내려오는 길에 주차장 노상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는데, 개량 한복을 입은 주인아주머니가 “범상치 않은 지기가 느껴지시지요?”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아주머니가 훨씬 범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구 말구요. 여기서 한양까지가 얼만데 무턱대고 태실을 썼겠어요?"라고 대놓고 맞장구를 치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그녀나 나나, 제때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 무엇이 하나는 확실히 있는 것 같습니다람쥐~.
<2012. 9. 3.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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