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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07. 2019

얼굴

가면의 의미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 때 꿈은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 빛 하늘 아래
구름 속에 나비처럼 날으던 지난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심봉석 시, 신귀복 작곡, 윤연선 노래]


<얼굴>이라는 노래는 참 묘합니다.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으면서도 들을 때마다 마음에 모종의 페이소스를 남깁니다(그리스어의 파토스(Pathos), 즉 「고통, 깊은 감정」의 뜻에서 유래된 애수 · 애감(哀感) ). 그리운 사람들은 이미 '얼굴'이 아닌데 왜 '얼굴'이라는 말 그만큼 애틋한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얼굴’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만 해 봅니다.


"동물들도 상대의 얼굴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남녀불문, 얼굴에 집착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그런 질문을 한 번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쪽에 나름 식견을 가지고 있는 한 직장 동료에게 물었습니다. 대답은 ‘그렇다’였습니다. 사람보다는 냄새나 소리에 더 민감하기도 하지만 동물들 역시 얼굴에 큰 비중을 둔다고 하였습니다.


엉뚱한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얼굴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은 미적 추구이외에도 또 다른 까닭이 있어서이지 싶습니다. <얼굴>이라는 노래에서도 확인되다시피 "얼굴이 곧 마음이다"라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의식적 차원보다는 무의식적 차원에서 더 그럴 것 같습니다. 얼굴이 고우면(고운 인상으로 남아 있으면) 마음도 고울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지요.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들에게는 지금도 복부(腹部)가 마음의 소재지라고 여겨지고 있다고 합니다만 그건 좀 특별한 경우이고, 인간의 뇌가 마음의 소재지이고 그것의 출입구가 결국 이목구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마음이니까요.


아시는 분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가면(假面)’이나 ‘탈’은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내고 싶을 때 많이 사용하는 오래된 인류의 ‘지혜의 소산’입니다. 각 나라, 각 민족, 각 지역마다 볼만한 탈춤, 가면극 하나 정도는 대물림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제가 평생 배우고 있는 검도에서도 그런 ‘가면극’에서의 ‘가면’ 역할을 하는 게 있습니다. 얼굴을 보호하는 호면이 그것입니다. 본디 다른 소용(얼굴 보호)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새로운 인격의 발견’이라는 용도로도 많이 쓰입니다. 호면을 쓰면 얼굴이 완전히 가려진 것도 아니고 그대로 노출되는 것도 아닌, 묘한 앙상블을 이루는 제3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당연히, 검도 수련 중의 ‘호면 쓴 얼굴’은 맨얼굴과는 전혀 다른 인격체입니다. 온갖 그림자(감춰진 얼굴, 무의식적 자아, shadow)가 다 올라옵니다. 그야말로 "두 사람이다!"라는 탄성(?)이 절로 우러나옵니다. 평소에 그렇게 점잖고 온화하던 사람이 거친 칼을 뿜어내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순한 양과 같은 사람이 맹수로 돌변합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보기에 사자같던 사람이 호면만 쓰면 원숭이로 변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물론 고단자로 갈수록 그런 하향 변신은 찾아보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검도를 통해 만난 사람들은 항상 ‘호면 쓴 얼굴’이 우선입니다. 호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의 얄팍한 가면(드러난 얼굴, 사회적 자아, persona)에는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게 됩니다. 그게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게 얇은 얼굴로 우리는 한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 가면을 벗기는데 또 다른 가면이 필요합니다.


자기 부정(自己否定)의 미학, ‘스스로를 죽이는 자가 결국 다시 살게 된다’라는 역설의 미학이 그 가면 놀음을 통해서 조금씩 몸으로 전달되어 오는 것이 검도의 묘미 중 하나일 것입니다. 교검지애(交劍知愛 : 칼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알게 된다)를 느끼는 것도 그 과정에서일 것입니다. 참고로, 검도에서 가장 높이 치는 기술이 상대의 얼굴을 베는 것입니다. 허리나 손목에 비해서 가장 멀리 있는 목표물이기 때문에 그런 평가가 나온 것일 것입니다. 거기에 또 저만의 의미 부여를 해 봅니다. 우리말로는 ‘머리’, 일본말로는 ‘멘(面)’을 기합으로 가지는 그 '얼굴 베기'는 상대의 누추한 퍼소나를 떨어뜨리는 이타적 행위입니다. 나의 칼로 당신의 낡고 헐거운 얼굴을 떨어뜨릴테니, 당신은 죽으시오(내 덕분에!), 그래서 거듭 나시오(축복합니다!). 멘(얼굴), 코데(손목), 도(허리), 츠끼(찌름) 등과 같은 기합(타격 부위) 중에서도 단연 ‘멘(面!’이 검도를 대변하는 기합(氣合)이 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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