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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13. 2019

만지는 것의 즐거움

지식과 실천

만지는 것의 즐거움

저만의 느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이 들수록 만지는 것의 즐거움이 남다릅니다. 옛날에는 그저 무심히 만지던 것들도 요즘은 가급적 ‘느끼면서’ 만지려고 노력합니다. 만약 이런 촉수(觸手)의 축복이 없었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전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수업할 때도 일일이 '손으로 만져본 지식'들 위주로 전달합니다. 그냥 책보고 안 것이나 들어서 안 것들은 순서가 뒤로 밀립니다. 그렇게 되니 오히려 가르치기가 좀 편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스개소리로 누가 말했지요. 30대 교수는 어려운 것만 가르치고, 40대 교수는 중요한 것만 가르치고, 50대 교수는 아는 것만 가르치고, 60대 교수는 생각나는 것만 가르친다고요. 오래 전에 유행했던 이야깁니다. 그 말이 하나 틀린 게 없습니다. 저도 30대 때 가르친 것들은 지금 하나 기억에 남아 있질 않습니다. 그 시절 제자가 찾아와서 ‘그때가 좋았습니다’라고 이것저것 회상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개중에는 지금 교수(강사 포함)로 활동하는 이도 있습니다. 제가 가르친 것을 조목조목 들어서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당황스럽습니다. 그때 그런 것도 가르쳤었나? 열에 아홉은 그렇게 반문합니다. 40대에 들면서는 사정이 바뀝니다. 책도 몇 권 내고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막상 실제로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인지, 그 욕망과 좌절의 기억이 어느 정도 남아있습니다. 50대에 접어들면서는 ‘하고 싶은 것’에 대한 미련을 끊고, ‘할 수 있는 것’에만 매달렸던 것 같습니다. 주로 그런 것들을 ‘만지며 즐기기’에 몰두했습니다. 요즘 제가 쓰고 있는 글들도 거기에 속합니다. 제 손 안에 든 것만 쓰고 있습니다. 60대를 관통하면서 그동안 쓴 것 중에서 꼭 남기고 싶은 것들만 고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떨지 궁금합니다. 좀더 가 봐야 알겠습니다.  


...우리는 만질 수 있는 물건을 좋아한다. 그것은 실재하며 무게가 있다. 놓으면 그냥 땅에 떨어진다. 실재하는 물건은 또한 특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가 켜던 바이올린, 제임스 조이스가 사용하던 펜, 부처가 베고 누웠던 목침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마음 속으로 새긴 감성적 가치를 수반하기에 동시대의 같은 물건보다 더 소중히 여겨진다. <진품> 개념은 물질적인 수준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무형의 에테르 같은 것이다.
전통적으로, 어떤 물건이 신화적 가치를 지니려면 역사나 혈통에 연계되어야만 했다. 한줌의 빵이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성화되는 일은 여느 개인의 거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사무라이의 칼이나 부활절 달걀, 또는 미국 헌법 원본이 한 개인이나 제도로부터 다른 사람이나 제도로 전승되는 까닭은, 그 수용자가 신청이나 의례를 통해서든 아니면 런던의 미술품 경매상에서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서든 개별 물건의 가치를 인정하고 또 거기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열렬히 추구하는 각종 이단 사상은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할 권리를 되찾기 위한 것이다. 뒷골목에서 행하는 주술행위는 쓰레기통의 뚜껑도 성스러운 음반으로 탈바꿈시킨다. [더글러스 러시코프(김성기․김수정), 『카오스의 아이들』중에서]


언제가 여기 페이스북에서, 우리 시대에 와서 공간(空間) 개념이 바뀌면서 ‘이웃’의 의미와 가치도 많이 바뀌어 간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네 이웃에게 잘 하는 것이 곧 인류 전체에 대한 기여고 공헌이라는 취지였습니다. 프로슈밍이라는, 화폐 경제 밖에서의 경제활동도 궁극적으로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되는 것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부의 미래』(앨빈 토플러)라는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제의 말씀에 ‘내 이웃의 몸’이라는 말로 화답하자는 제안까지도 드렸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혁명적인 인간관계의 변화를 실감하자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가까이 접촉할 수 있는 타자’로서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 결국은 우리의 삶을 행복한 것으로 안내하는 키워드가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인용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우리 시대에 와서 크게 대두된 것 중의 하나가, 실재하는 물질, 물체, 관계에 대한 존중입니다. ‘접촉’에 대한 애착의 정도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생각으로 소유하는 것보다는, 접촉으로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만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선호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건이든, 육체든, 만질 수 없는 것은 이제 2류나 3류로 전락합니다. 심지어 ‘만지는 것’에도 등급이 매겨집니다. ‘터치’의 질감까지 차별화합니다(스마트폰 광고). 마우스를 움직여 클릭이라는 간접 경로를 통해 접속되는 것까지도, 그 편한 행위마저도, ‘만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선호를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퇴출됩니다(아이패드). 직접 터치해야, 직접 찍고 직접 밀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변하는 것은 또 있습니다. 이야기도 바뀝니다. 전통적인 선형적 스토리가 사라지고, 비선형적 스토리들이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총아로 등장합니다. ‘이해’보다는 ‘느낌’이 중요합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보다는 그때그때의 현장감 실린 공감이 중요합니다. 그것도 결국은 ‘만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선호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족 한 마디. 제가 속한 베이비 붐 세대는 특히 적응력이 강합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능력, 그 생명력이 ‘몸’을 얻어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우리 세대입니다. 누구보다도 빨리 가면을 벗고, 이중생활을 청산하고, 맨 얼굴을 요구하는 페이스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만질 수 있는 소식’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그들의 자신의 여생을 충분히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서로를 좀 ‘만지며 살아야’ 되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칩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 향기롭고 부드러운, 만질 것 많은 이 세상을 그냥 그렇게, ‘생각’ 속에 파묻은 채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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