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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12. 2019

오래된 풍경이 전하는 소식

황석영의 <탑(塔)>이라는 단편소설은 하나의 탑을 둘러싼 두 개의 '생각과 이념'을 다룹니다. 하나는 월남에 파병된 젊고 순진한 우리 병사(주인공)가 생각하는 ‘기억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의 표징으로서의 탑’이고, 다른 하나는 미군 지휘부의 냉정하고 기계적인 생각, 즉 ‘그저 돌출되어 있는 표지판으로서의 탑’입니다. "탑을 사수하라."라는 명령을 받고 밤새 목숨을 걸고 논 한 가운데 자리잡은 그 ‘탑’을 지킨 주인공은 피아를 떠나서 그것을 세운 현지 사람들과의 어떤 정신적인 일체감마저 느낍니다.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볼품없는 탑 하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인명 피해를 본 이유도 그들 ‘(전쟁에서 상처받고 있는) 무고한 백성’들과 ‘더불어 한 몸’이 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날이 밝고 미군들이 들어와서 불도저로 그것을 밀어버리는 것을 보고는 아연실색합니다. ‘탑을 사수하라’라는 명령은 (큰 부대의 이동을 돕기 위해) 그 위치에서 목숨을 걸고 적의 남진을 저지하라라는 '기계적인 신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안 주인공은 환멸에 젖습니다.  

얼마전 50 여년 전에 다닌 초등학교를 찾았습니다. 반 세기의 시간이 지났으니 모든 것이 다 바뀌고 생소했습니다. 정문과 후문, 교문의 위치도 바뀌고, 남향에서 북향으로, 본관 건물도 정 반대로 자리 이동을 했습니다. 남은 것은 제가 2학년 때 몸 담았던 신관 건물(지금은 부설 유치원 건물)과 볼품없는 낡은 탑 하나뿐이었습니다. 마치 부끄러운 가족사의 한 부분인 양 새로 지은 본관 건물 뒤쪽 구석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정문 옆에 세워져 있던 이 탑 앞을 수도 없이 걸어다녔지만 단 한 번도 탑에 새겨진 글자를 읽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읽어보니 ‘미국건축원조기념비’였습니다. 아마 지금은 헐어버린 그 옛날 본관 건물을 미국(미군)에서 지어준 모양입니다. 6.25 동란 때 학교가 미군 주둔지로 사용되었던 연유에서가 아닌가 짐작됩니다. 짙은 회색으로, 웅장하게 전형적인 학교 건물로 지어진 그때의 본관 건물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예의 황석영의 <탑>이라는 소설도 같이 떠올랐습니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우리는 살아야만 한다는 근본적인 수치심 속에 하나이다.”라는 어떤 책 속의 한 구절도 같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내 탐색이 그저 고집스러운 탐닉이 아니라, 역사의 면밀한 탐색에서 비껴간 것들, 간과되고 감추어졌던 것을 재포착하는 유용성에 근거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수많은 흑인들처럼, 나는 자신을 역사 속에 뿌리박고 과거 속에 존재하고 미래로 계속되는, 중대하고도 발전적인 존재로서 시간의 흐름 속에 위치시키려고 애써왔다. 기록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 지속되기 힘들고, 쉽게 역사 밖으로 떼어져나가고, 내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까지 다시 쓰려는 사람들의 손에 너무도 위험스럽게 놀아날 수 있다.(중략)
나는 핏줄의 비밀을 어머니가 나에게 물려준 자부심과 수치심 둘 다로 받아들이고서 하버드의 환경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 자신이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소설 『연인(The Lover)』에서 묘사한 상황에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살아야만 한다는 근본적인 수치심 속에 하나이다. 우리 공통의 운명의 핵심은 우리는 우리 어머니의 자식들, 즉 사회에 의해 살해당한 죄 없는 생명의 자식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 속에 빠뜨린 사회 편에 서 있다. 그토록 사랑이 가득하고 진실되던 어머니에게 사회가 했던 짓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한다.” [패트리셔 J. 윌리엄즈(이선주 옮김), 「재산 품목이 된 존재」 중에서]


풍경은 언제나 늦은 소식을 전합니다. 어린 시절의 풍경들은 무엇이든 우편함 속에서 수십 년을 기다렸던 소식들입니다. 오늘 그것이 내민 오래된 엽서 한 장을 받아들었습니다. 낡고 희미한 것이지만 내 유년의 필치가 완연한 반가운 편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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