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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Sep 18. 2019

목숨의 꿈

나의 침실로

목숨의 꿈


밤이 주는 꿈은 언제 어디서나 시인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시인 이상화도 「나의 침실로」에서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라고 읊었다. 이 시와 관련해서는 할 말이 좀 있다. 한글을 막 깨쳤을 때 이 시를 처음 읽었다. 대구 달성공원에 있는 이상화 시비에서였다. 내용도 어려웠고 글씨도 낯설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상화 시인의 어린 아들이 쓴 것이었다. 그 중에서 ‘목숨의 꿈’이라는 단어가 내게는 가장 어려웠다. 도대체 저 말이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수백 번 이 시를 읽었다. 공원 앞에서 작은 주류 가게를 내고 있던 아버지가 공원 안에다 설치한 임시 보급소가 바로 그 장소였다. 학교 갔다 오면 나는 소주나 사이다 같은 물품들을 지키러 상화 시비로 향했다. 그렇게 내 각박했던 ‘목숨의 꿈’이 아로새겨진 곳이 상화 시비다.  


.....무엇보다도 어둠은 사랑의 말이 더 자유롭게 흘러나올 수 있는 친밀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촛불이나 등불의 희미한 불빛으로 남녀는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더 친밀해졌다. 이탈리아의 한 작가는 “어둠이 모든 것을 말하기 쉽게 만들어줬다”고 표현했다. 밤에는 시력이 어두워지고, 감정을 일으키는 데 더 위력적인 청각, 촉각, 후각이 더 중요해졌다. 로미오는 줄리엣에게 “밤에 연인의 목소리는 얼마나 옥구슬 같은가”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남녀가 함께 있는 곳에서 촛불이나 등불을 끄는 것은 성욕으로 충만한 행동을 뜻했다. 매사추세츠의 한 술집에서 헤스터 잭슨이 촛불을 끄자 또 다른 여인이 외쳤다. “저 여자는 용감한 갈보, 아니면 용감한 주부야.” 헤스터는 유부녀였지만, 뱃사람의 손을 잡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로저 에커치, 조한욱 역,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교유서가, 2016), 296쪽]


밤이 ‘도와주는 환경’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도 “밤은 가려진 본성이다”라는 말이 내겐 더 친근하다. 목숨의 꿈은 늘 밤에 자신을 드러낸다. 낮의 양광(陽光) 아래선 좀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설혹, 낮이라 할지라도 단절되고, 고립된 곳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사교와 고독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밤이다.


내 글쓰기의 오랜 습관 중의 하나가 ‘소음 속에서의 몰입’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들이 일종의 차단막 구실을 하는 것 같다. TV든 라디오든 다른 것이든(요즘은 스마트폰을 음향기기에 연결해 쓴다), 낮 것들의 침입을 막아주는 충실한 병사들이다. 순간순간 글줄이 막힐 때를 노리는 낮의 첩자들을 그놈들이 쏙쏙 잘 잡아준다. 두어 놈 보초병을 세워두면 자연 마음도 편하고 글도 잘 써진다.


“저 여자는 용감한 갈보, 아니면 용감한 주부야.” 이 말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된 것인지를 알고 싶어 책 뒤에 붙어있는 주석을 찾아봤지만 짧은 영문(英文) 교양 덕분에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근세 유럽의 문란한 성 풍속을 묘사하고 있는 책에서 인용된 것 같았다. 영국에서 ‘어두운 놈’(Dark Cully)이란 “발각될까 두려워 밤에만” 정부(情婦)와 만나는 유부남을 가리켰다(위의 책 같은 곳). 윤리적인 잣대로 본성을(특히 가려진!) 나무라는 것은 나이 든 자의 소관이 아니다. 상간(相姦)의 힘도 신체의 활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결국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불륜의 소산이다. 마음속에 음욕을 품고 이성을 바라보는 것도 간음이라는 예수의 말씀이 하나 틀린 게 없다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든다. 몸이야 죽으면 이내 썩어문드러질 것, 종내 내 목숨의 꿈은 내 몸에 있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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