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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Oct 05. 2019

고래사냥

전에 관하여

전(傳)에 관하여④-고래사냥


우리의 ‘팥쥐 이야기’가 『마누라전』으로 시작한다고 해서 끝까지 그렇게 갈 것이라고 염려하는 독자들도 있을까봐 한 마디 덧붙인다.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셔도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억을 가지고 산다. ‘지나온 것들’에 대한 되새김질 없이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이를테면 ‘경험의 의미화’라는 정신(정서) 기능이 상시 가동되어야 진짜 살아있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아내 이야기도 그렇다. 이 나이 되도록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사람이 아내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와는 고작 10여년(그것도 같이 몸으로 부대끼면서 살아온 것은 6,7년?), 아버지와 형과는 20여년을 같이 살았지만 아내와는 30여년을 같이 살았다. 몸으로 부대끼면서 동거한 세월로 계산하면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차가 난다. 그러니 아내 이야기가 내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옛말에도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본색이 가장 잘 드러나게 되어 있다. 물론 독서 훈련이 되어 있는 독자분들은 이미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을 것이다. 늘상 하는 말이지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에 집착하는 이들은 하류독서를 벗어날 수 없다. 책을 읽으며 처세술이나 생활의 지혜를 찾는 것은 가장 하류 독서다. 지식 그 자체를 사랑하는 독서, 나아가서 윤리를 찾는 독서가 상류 독서다.

젊어서부터 가까이 지내던 한 선배가 있다. 술 좋아하는 선밴데 하루는 이 양반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잘 지내는 것을 보면 참 신통혀~.”
“거의 하루도 안 거르고 그렇게 ‘술 권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열심히 사는 선배도 만만찮거든요~.”
그런데, 이 선배 다음 말이 재미있다.
“때로는 기억을 단절시키기 위해서 술을 마실 필요가 있는 법이지.”
누구와 의절한다거나, 또 누구에게 섭섭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아니면 섭섭하거나 비참한 기분을 지울 때, 자기에게는 꼭 술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진탕 마시고 한 잠 푹 자고는 전날의 갈등과 가책과 비굴을 망각의 쓰레기장에 모두 갖다버린다는 거였다.
“선배에게는 술이 망각의 강 레테군요. 내게도 그런 만능 쓰레기통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요.”


요즘 들어서 ‘삭제된 것들’이 제멋대로, 자동으로, 복원되는 일이 늘어서 골치다. 사실 지금 우리의 ‘팥쥐 이야기’도 그런 ‘자동 복원’에 대한 응급 처방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마누라전』의 역사가 꽤나 오래되었다는 증거를 한 편 인용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지어진 시기는 약 3000년 전이다. 그 전부터 구전되어 영웅담이 그 시기에 와서 세련된 문체로 정착된 것으로 여겨진다. 『마누라전』의 원형인 ‘오디세이아’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 후 10년 동안 고향 이타케로 향하는 여정에서 겪는 모험과 부인 페넬로페를 다시 만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오디세우스는 신들도 인정하는 ‘지혜로운 사람’의 대명사가 된다. ‘일리아스’가 아킬레우스를 주인공으로 트로이 전쟁의 경과와 그리스군의 승리를 노래한다면, 그 후편에 해당하는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를 주인공으로 삼아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아내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무사귀환하는 한 지혜로운 사나이의 경험담을 그리고 있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귀향 소식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들어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오디세우스는 제5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때 오디세우스는 귀향길에서 만난 요정 칼립소의 동굴에서 7년 동안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자신과 같은 불사의 몸과 재물, 권력을 주겠다고 구애를 하지만 아내에게 돌아가겠다는 오디세우스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한다. 칼립소는 “진실로 나는 몸매와 체격에서 그녀 못지않다고 자부해요”라며 페넬로페로부터 오디세우스를 떼어놓으려 하지만 그의 귀향 의지를 꺾지 못한다.
한편, 오디세우스는 잠시 저승에 가서 아가멤논의 혼백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오디세우스에게 ‘마누라 다루는 법’을 전수한다. 아가멤논은 자신이 아내와 정부에 의해 살해된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타케에 당도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침을 베푼다. ‘죽을 때까지는(죽어서도) 아내를 믿지 말라’는 교훈이었다(물론 이것은 ‘팥쥐 이야기’ 작가로서의 주관적인 해석이다).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수많은 우여곡절과 위기를 극복하고 아내가 기다리는 고향 이타케에 도착한다. 지옥에서 만난 아가멤논의 조언대로 오디세우스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만 자신의 신분을 알리고 아내 페넬로페에게는 거지로 행세하며 자신을 알리지 않는다(이 부분은 『춘향전』에서 암행어사로 내려온 이몽룡이 취한 방법과 일치한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복수로 ‘일리아스’를 그렸고, 오디세우스의 고행과 귀향을 소재로 ‘오디세이아’를 만들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디세이아’는 결국 『마누라전』이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는 끝까지 마누라와의 초년 의리를 지키는 자다라는 게 ‘오디세이야’의 주제다. 나머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그 주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하나의 장식품이거나 미끼다.
지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영웅의 마지막 과업, 최종 목표가 ‘아내 되찾기’와 ‘귀향의 안식’이었다는 게 좀 생뚱맞다고 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는데 너무 패배주의자의 인생관이 아니냐고 강변할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회의와 강변은 아직 장가 한 번 못 가본 숫총각이나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맛보지 못한 사회생활 초년병들의 넋두리로 봐야 한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우리의 ‘팥쥐 이야기’를 일독하고 나면 아마 그런 ‘쓸데없는 만용’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질 것으로 믿는다.


뜻밖의 ‘알아두면 전혀 쓸데없는 잡학사전’식 교양 강좌를 수강한 아내는 의기양양, 고개를 바짝 쳐들고 스타벅스의 문을 박차고 실내로 입장했다. 내 이야기가 스타벅스 애용자로서의 자긍심에 크게 일조한 듯 보였다.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아내의 뒤태가 유난히 탄력이 있었다(아내의 뒤태는 처녀 시절 그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청바지를 입었을 때의 엉덩이는 일품이었다). 오랜만에 ‘걸어서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내게는 아내가 여신(女神)으로 기억되는 몇 장의 브로마이드(bromide, 연예인의 사진을 담은 큰 그림)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걸어서 아름다운 여자, ‘그리디바’다. 나는 옌젠의 중편소설 『그라디바』를 분석한 프로이트의 글을 결혼 후에 읽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이 단숨에 읽었는데, 프로이트의 소설을 통한 무의식 분석도 아름다웠지만 그것보다도 원작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두 개의 모티프가 단연 매혹적이었다. 하나는 ‘걸어서 아름다운 여자’ 모티프였고, 다른 하나는 ‘곁에 있는, 그러나 알아보지 못하는 연인’ 모티프였다. ‘그라디바’를 처음 대하는 독자를 위해 간략하게 그 얼개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젊은 고고학자인 노르베르트 하놀트는 어느 날 한 고대 그리스의 부조(浮彫)에 매혹된다. 그 조각판에는 활기차고 당당하게 걷는 한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그라디바라는 이름을 붙이고, 폼페이에 거주했으며, 귀족의 딸이며, 신전에서 일했을 거라고 마음대로 단정(망상)한다. 그 후 그는 그 비슷한 ‘걸어서 아름다운 여자’를 길거리에서 만나기를 소원하며 그녀를 찾아다닌다. 이는 평소 그의 여성기피증으로 볼 때는 아주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폼페이 최후의 날에 자기의 그라디바가 매몰되는 악몽을 꾼 뒤 그는 불현듯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이탈리아 신혼여행을 온 신혼부부들을 목격하고 결혼이라는 제도가 인간이 보여준 최고의 광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로서는 왜 여자들이 어느 특정한 남자를 선택 했는가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으며, 남자들이 어느 특정한 여자를 고르게 된 동기는 더욱 알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고개를 들 때마다 그녀들 가운데 어느 한 여자의 얼굴에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귀여운 용모로 그의 얼굴을 즐겁게 하는 얼굴 또는 다정하거나 종교적인 영혼이 깃들인 얼굴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는 확실히 그녀들을 평가할 척도(尺度)가 없었다. 왜냐하면 현대 여성을 고대 예술품의 숭고한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기준이 부당하다 해도 자기에게 책임이 없으며 그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그 얼굴 모습들에는 없다는 막연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야릇한 태도를 몇 시간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며, 마침내 인간의 모든 광기 중에서 으뜸가는 것은 어쨌든 결혼이며, 결혼이 가장 거창하고 가장 엉뚱한 광기이긴 해도, 최고의 광기는 터무니없는 이탈리아 신혼여행이 분명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거기(폼페이)에서 하놀트는 놀랍게도 바로 그 그라디바와 똑같은 걸음걸이를 지닌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분명 동시대의 사람이었고 더군다나 독일어를 말하는 사람인데도 하놀트는 그녀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그라디바라는 망상을 멈추지 않는다. 그 여인은 그런 하놀트의 이상한 태도에 당황하며 화를 내고 떠난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날 다시 그와 마주쳤을 때 여러 가지 모호하며 의미심장한 제스처를 취하며 그를 혼돈에 빠트린다. 가령 하놀트의 그라디바 부조(浮彫)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녀가 바로 그 걸음걸이를 재현한다든지, 자신이 2000년 전 사람인데 환생한 존재라고 말한다든지, 또 자신이 조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든지, 하놀트에게 반말을 사용한다든지, 마치 하놀트를 환자나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하놀트는 과거 사람인 동시에 현재 사람이라는 모순을 안은 조에-그라디바에 대한 의문을 품은 채로 갈등 속에서 그녀와의 만남을 지속한다. 그녀는 매번 정오에 폼페이의 유적지에 나타나서 그를 기다리는데 그런 나날 중에도 하놀트에게는 질투심과 관련된 복잡한 망상이 계속된다. 결국 그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싸우며 그라디바를 만나다가 마지막에 가서 그녀가 그의 어릴적 소꿉친구, 조에 베르트강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녀는 그의 사실상의 첫사랑,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으나 자라면서 억압된 기억이 된, 대학 은사의 딸이었다. (막스밀레르, 이규현 옮김, 『프로이트와 문학의 이해』, 문학과지성사, 1997, 제4장 참조)


『그라디바』의 스토리는 이른바 ‘억압-망각-회상’의 패턴을 기본 뼈대로 삼고 있다. 소꿉친구였던 그녀가 뇌리 속에서 지워졌다가 우연한 계기로 다시 만나지만 한동안 망각(망상)의 상태에 빠져 있다가 감동적으로 이를 회상해내고 재결합한다는 스토리다. 이 소설에서는 그것 이외에도 다양한 정신분석적 소재들이 많이 등장한다. 프로이트가 이 소설을 보고 『옌젠의 「그라디바」에 나오는 정신착란과 꿈』(1906)이라는 불후의 명작(名作)을 남긴 것도 우연이 아니다(소설보다 분석이 더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한다). 모든 무의식의 최초 발견자는 작가들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하겠다.


내게는 『그라디바』가 일종의 계시처럼 읽혔다. 내가 아내를 보고 처음 매혹된 장면이 ‘그라디바’였고, 그녀가 나중에 ‘조에 베르트강’으로 밝혀지는 과정도 거의 같았다. 우리는 한 동네에서 골목 하나를 가운데 두고 유소년 시절을 같이 보냈다. 그리고 아내를 만날 때의 내 상태도 하놀트와 많이 흡사했다. 망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으며 여성기피증을 앓고 있었다. 하나 더 보태자면(망상을 해 보자면), 나중에 같이 살다가 보니 프로이트가 분석하고 있는 조에 베르트강의 부성(父性) 콤플렉스도 아내의 경우와 매우 흡사했다.
어쨌든 그라디바 아내와 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모든 남편은 하놀트고 모든 아내는 조에 베르트강이다. 각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렇게 온갖 분석과 해석이 필요한, 보기 좋게 불완전하게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그래서 ‘알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다. 우리가 ‘팥쥐 이야기’ 같은 소설을 적고, 읽는 것도 사실은 다 그런 연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이 무슨 아이러닐까? 아내 이야기를 하는데(너는 내 운명?) 갑자기 “안들 무슨 소용인가?”라는 그녀의 평소 신조가 심하게 모욕을 받는 느낌인 것은.


말이 좀 길어졌다. 그러나 페넬로페와 그라디바를 빼먹고서는 이 세상 누구도 『마누라전』을 적을 수 없다는 내 생각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그건 그렇고, 아내는 내 얍삽한 스타벅스론을 접하고 기분이 크게 업그레이드 된 것이 분명했다. 그 무엇이, 자긍심이든 자만심이든, 여하간에 그녀에게는 있었다. 흥분이 가라앉기 전까지는, 아내의 경쟁자들에게 그녀는 다시 없이 당당할 것이다. 스타벅스라는 공간 안의 모든 여자는 그녀의 경쟁자이고, 모든 남자는 그녀의 관찰대상이다. 그러니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녀는 스타벅스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관심이 있다. 그녀는 나처럼 망상에 사로잡힌 하놀트가 아닌 것이다. 그녀는 그라디바다. 너희들 이 공간의 의미를 알고나 있었니? 세상은 의미로, 너희들이 모르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단다, 이 어린 것들아. 무지만큼 못난 것이 어디 있겠니? 인간은 결국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뉜단다. 모르는 것들은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게 바로 인생의 법칙인 것을, 불쌍코 불쌍한 중생들이여... 그녀는 그렇게 경쟁자들을 조롱할 것이다. 앞에서도 이미 밝힌 적이 있지만, 아내는 자신이 함부로 무시당하거나 멸시당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게 또 나와는 다른 점이다. 나는 누가 나를 무시하면 그냥 차단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녀는 반드시 보복을 한다. 자기 앞에서 상대가 무릎 꿇는 것은 기어이 보고야 만다. 이제 중년의 고비를 넘기면서 마지막 인정 투쟁을 벌이고 있는 아내가 내게 이쁘기 그지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없는 것을 그녀는 해낸다. 내게는 그게 참 보기가 좋다. 옷차림도 피부 관리도 지금 절정에 도달해 있다. 평생 본 아내 중 지금의 그녀가 가장 아름답다. 미당 서정주가 ‘국화 옆에서’에서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라고 중년의 미를 상찬했다지만 친일은 친일이고 표절은 또 표절인 채로, 요즘 들어 부쩍 그 말이 좋게 들린다. 그게 빈 말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 물론 나만의 주관적 평가가 아니다. 주변의 평가도 대체로 그렇다. 아내는 오랜 만에 보는 학창 시절의 동무들로부터 “몰라보겠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내가 직접 곁에서 들은 것만도 수차례나 된다. 바야흐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는 아내다.

아내는 스타벅스를 고래 뱃속으로 활용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틀림없다. 참, 아내는 요나 이야기(고래 뱃속에서 사흘을 머문 후 그 열로 머리가 다 타 버린)를 알고나 있을까? 문득 든 의문이지만 향후에도 그것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것이다. 과유불급, 방자하게 지나친 지식욕이 때로는 결정적인 역효과를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녀는 무시와 멸시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타벅스와 아내에 대한 이야기도 일단 이 정도에서 멈추어야겠다. 지금은 적두병 프로파일링(profiling, 범죄자 유형 분석기법)이 무엇보다도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게 급선무다. 진짜 출발점이 거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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