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립소 이야기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
인문학이 위기입니다. 소설을 위시한 문학(소설은 대표적인 ‘거리의 인문학’입니다)의 위상이 급격히 추락하고 있습니다. 연간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과거와 비교해 볼 때, 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소설은 대중들이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문서입니다. 옛날부터 소설은 카타르시스와 인문학적 정보를 동시에 제공해 주는 대중적인 채널(통로)이었습니다. 그 전통적인 기능마저 이제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영화에서 그 욕구를 대신 해소하고 있다고 ‘허위전환’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철학이나 역사와 같은, 보다 전문적인 인문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80년대 들어 많은 독자를 거느리던 사회학 관련 서적들도 마찬가집니다. 불과 2,30년 전만 해도 베스트셀러의 절반 이상을 소설이나 그런 인문학 관련 책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자리를 처세술책이나 알량한 자기개발서, 위로(자위?) 목적의 달짝지근한 성공 에세이, 요리서(미식여행)나 육아 길잡이 등이 대체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인문학적 소양을 주 내용으로 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본격적으로, 정면에서 다루는 ‘돌직구’ 인문서들은 아예 명함도 못 내미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그럴듯한 출판사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그런 마당인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인문학이 대세다’라니 참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인문학자들의 아우성에 재갈을 물리는 어떤 임기응변, 이를테면 전시행정의 슬로건인 듯합니다. 처음에는 귀가 솔깃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그런 말을 들으면 역겹기까지 합니다. 누가 뭐래도, 명실공히, 인문학은 지금 지리멸렬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끌어다 쓸 필요도 없겠습니다. 저 같은 무지렁뱅이 시골무사까지 나서서 수삼년 간 페이스북에다 개발새발 <인문학 스프>니 뭐니 하면서 쉬지 않고 글을 써대는 것도 사실은 정상이 아닙니다. 거진 매일 같이 한 그릇씩 끓여내는데(요즘은 주로 재탕입니다), 맛이 있든 없든, 그저 따끈한 맛에 한 모금 맛을 봐 주시는는 독자 제현이 있어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이 인문학 전성시대라면 어떻게 저 같은 하수가 감히 강호 제현께 이런 ‘과분한 <좋아요> 사랑’을 받으면서 하루하루의 호사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날고 기는 고수들이 나타나서 화려한 실기(實技)와 무용(武勇)을 뽐내며 지면을 독차지, 저 같은 시골무사는 언감생심, 무디고 짧은 칼을 감히 칼집에서 빼보지도 못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또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라는 제목을 내걸어놓고 엉뚱한 ‘인문학타령’만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제목에 지지 않기 위해서 ‘인문학적 가치’가 있는 이야기 거리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와 칼립소의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은 어제 재미없이 본 모 방송국의 인문학 특강에서 빌려 온 것입니다. 편의상 줄거리 요약은 인터넷 검색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바다의 요정 칼립소는 티탄족 아틀라스의 딸이라고 전하기도 하고,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딸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영원히 젊고 풍만한 육체를 지닌 그녀의 이름 칼립소는 '숨기는 여인'이란 뜻이다. 조국 이타카가 그리도 열렬히 기다리던 위대한 영웅 오디세우스를 칼립소는 7년 동안 감쪽같이 세상으로부터 숨겨놓았다. 물론 그녀가 오디세우스를 숨기는 방식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칼립소는 난파해 자신의 섬으로 떠내려 온 오디세우스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 그리고 사랑을 주었다(라티노스라는 아이도 낳았다). 그가 자신과 함께 살기로 결심만 한다면 영생을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고향이 그리워진 오디세우스는 자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눈물로 뺨을 적셨다. 그것을 안 아테나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제우스가 칼립소에게 전령 헤르메스를 보내 오디세우스를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면 오디세우스는 그렇게 영원히 숨겨진 남자로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출처] 얀 브뤼헐의 '오디세우스와 칼립소가 있는 환상적인 동굴'|작성자 skypapa12 (인용문 인용자 일부 첨가 및 수정)
칼립소는 비운(悲運)의 여인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사랑을 고집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사는 오기기아 섬은 새들 이외에는 찾아오는 이가 없던 외로운 섬이었습니다. 그 외로운 섬에 한 사내가 나타나서 그녀의 가슴에 불을 질러 버립니다. 그녀에게 불같은 사랑을 알게 합니다. 칼립소는 우연히 찾아든 오디세우스를 운명적인 상대로 받아들이고 영원한 사랑을 꿈꿉니다. 그녀에게 오디세우스는 외롭고 지루한 세계에 던져진 하나의(단 한 번뿐인!) 변화였고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7년이나 같이 보낸 이 남자는 끝내 고향을 잊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생(永生)도, 평생 늙지 않는 아름다운 여인도, 위험 없는 안락한 삶도 모두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신들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신들은 오디세우스의 ‘돌아가려는 의지’를 높이 샀습니다. 그녀는 그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뗏목까지 만들어(만드는 법을 가르쳐서) 태워서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거기까지가 호메로스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는 오디세우스의 시련과 방황, 그리고 탈출과 귀향만을 이야기할 뿐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르침’은 항상 독자의 몫입니다. 그 오래된 이야기에 대한 인문학적인 해석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왜 그 아름다운 칼립소를 두고 적들이 우글거리는(홀로된 그의 아내 페넬로페는 그의 강적들로부터 끊임없이 구애를 받고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본색을 미리 밝힌다면 그는 생명의 위협에 노출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을까요? 집 떠난 지 근 20년, 그 사이 부부는 얼른 봐서는 서로를 몰라볼 정도로 늙어버렸습니다. 청춘을 공유하지 못한 채 늙어버린 아내, 그리고 늙음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고향, 오디세우스는 왜 그곳 이타카를 버리지 못했을까요? 왜 칼립소의 가슴에 못을 박은 채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했을까요?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오디세우스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우선 그런 생각부터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이 부분은 남녀를 불문합니다). 20년 간 헤어져 있던 남편이나 아내를 다시 찾아가겠습니까 아니면 젊고 아름답고 능력자인 현재의 파트너(둘 사이에는 자식도 있습니다)와 영생을 누리겠습니까. 고향에 있는 아내도 유산이 좀 있고 외모와 교양도 좀 갖춘 편이어서 그녀 혼자서도 사는 데에는 큰 불편이 없는 상태입니다(뭇남자들이 그녀와 결혼해서 그 지역의 지배자가 되려 합니다). 내가 없다고 해서 그녀가 크게 불행해지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칼립소에게 남으시겠습니까, 페넬로페에게 돌아가시겠습니까? 물론 저 같으면 당장 돌아갑니다(아내가 이 글을 볼 지도 모릅니다). 엄처시하에서 글 쓰는 자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입장을 빼고 생각을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만약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선은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겠지요. 오디세우스의 노래라는 제목을 가진 『오디세이아』는 거기서 끝이 나야 합니다. 호메로스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칼립소와 사는 일은 인간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더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작가 입장에서는 오디세우스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게 유리한 일입니다. 거기서 또 한 번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제가 보기에는 이 ‘이야기가 계속되기 위한 선택’이 가장 큰 ‘돌아가야 할 이유’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이유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만약 오디세우스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 사실이 이야기 자체가 지닌 어떤 태생적인 룰, 이른바 이야기의 모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 배치된다는 것입니다. 오디세우스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페넬로페에게만 배신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온 세상에 대한 배신입니다.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착한 주인공’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지상의 모든 작가는 결국 ‘착한 인간’일 뿐입니다. 세간에 퍼져 있는 아주 잘못된 편견 중의 하나가 ‘시인은 착해야 하고 소설가는 안 착해도 된다’라는 투의 섣부른 장르적(?) 인식입니다. 말도 되지 않는 말입니다. 굳이 그렇게 ‘이원론적 판별’을 하고 싶다면 ‘시인은 몰라도 소설가는 안 착하면(안 착해지면) 결국 망한다’로 고쳐서 새기셔야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기의 탈을 쓴 모든 거짓부렁들은 모두 윤리적 결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이야기들, 작가들은 잠시 반짝일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망했습니다. 『사기』의 사마천 이래로 모두 그랬습니다. 모랄을 거역한 이 치고 하나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오래 살아남고 자신도 망하기 싫다면, 세상의 모든 오디세우스들은 반드시 돌아가야 합니다(돌려보내야 합니다). 이유불문, 그는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야기가 살아남습니다. 아까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좀 궁색한 이유가 되겠습니다만, 오디세우스도 인간인 이상 사회가 필요했을 겁니다. 외딴 섬 동굴에서 아름다운 미녀와 둘이서 호의호식(옷은 입을 필요도 없겠습니다만)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재미있는 것이, 이 신화적 인물들을 그린 유명한 그림에 고향이 그리워서 바다 쪽을 쳐다보고 있는 오디세우스는 전신을(머리까지) 옷으로 칭칭 감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 반면 그 뒤에 동굴 쪽을 향해 앉은 칼립소는 거의 전라의 몸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겁니다. 한 쪽은 인간사회(삶?)를 다른 한 쪽은 자연세계(죽음?)를 표상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 영웅 오디세우스는 인간계로 돌아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에 더해서(혹은 그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정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7년 간 외도는 했습니다만 그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였습니다(돌아갈 가정이 아직 있을 때 돌아가는 게 상책입니다). 그렇게 그는 영생의 육체보다는 죽어서 남길 이름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는 영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족 한 마디. 흔히들 ‘『오디세이아』의 주제는 귀향이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 이야기 속의 사건들은 그것의 윤리적 의미나 역사적 교훈을 위해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오디세이아』라는 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지속시키는 일’이지 그 안의 사건들 자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토도로프 같은 구조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이야깁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모든 어머니는 여자다’나 ‘모든 아이 있는 여자야말로 엄마다’와 같이 일종의 자명성을 띤 발언이기 때문에 특별히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언명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결코 인문학적이지 않습니다. 무릇 이야기의 주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오디세이아』의 주제는, 그리고 그 가치는, 당연히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중요한 것은 ‘돌아가라’는 그 가르침입니다. 두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디세우스가 헤쳐온 인생을 그대로 본받거나 아니면 그의 실패를 거울삼아(타산지석), 때론 현명하게, 때론 잔인하게 복수하며, 때론 어렵게 자기를 넘어서며, 때론 지키기 힘든 의리를 지키며, 때론 일말의 순정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도 없고 오디세우스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방도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디세이아』가 인문학 강의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이유도 결국 그것 때문이라는 걸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