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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Oct 03. 2019

백의녀 매강설

전에 관하여 5

전(傳)에 관하여 - 백의녀 매강설


그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될 것 같았다. 오딧세우스를 유혹하는 칼립소와 키르케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자다, 모두 매력 넘치고 능력 있는 여자들이다. 유혹에 넘어가면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고, 늘 쾌락 속에서 살 수 있으며, 심지어는 죽지 않는 불멸의 인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유혹은 뿌리치는데 그 묘미와 의미가 있다는 듯 오딧세우스는 꿋꿋하게 아내 페놀로프(Penelope)와의 초년(初年) 의리를 지킨다, 의리에 집착하며 유혹을 모르는 인생은 얼마나 지루한가, 그런 다소 반항적인 생각을 하면서, 그런 멋진 유혹자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이란 결국 눈 가리고 야옹하는 반어법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 숱한 유혹담 속의 주인공들은 사실 세상에 없는 것들, 그림자거나 환영에 불과한 것들이고, 있는 것은 냉엄한 현실 오직 바가지 긁는 늙은 아내뿐이라는 걸 명심하라는 이야기일 뿐이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세상의 모든 이야기라는 것들, 특히 고전 명작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마누라와 아들과 딸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간단하게 일별해 보자.

1. 『춘향전』 : 『춘향전』만큼 아이러니한 소설도 없다. 당시 법도로 보면 기생 딸이면 당연 기생 신분인데 춘향이는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감히 양반집 자제(子弟)와 정혼하겠다고 강변한다. 요즘 같으면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운동권도 그런 운동권이 없다. 겉으로는 어쩌다 잘못 만난 남친(서방) 때문에 죽을 개고생을 하다가 막판에 하늘이 도와 대역전하는 시골 기생 마누라의 하류탈출기를 표방하지만, 안으로는 결국 마누라와의 초년 의리를 꼭 지키라는 당부다. 그것 말고는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거리(청춘 연애담, 탐관오리 응징담 등)를 끌고 다닐 만한 힘을 가진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춘향전』은 진짜 이름은 『마누라전』이다.

2. 『홍길동전』 : 『홍길동전』은 『아들전』이다. 애비(물론 노비였던 어미 탓일 수도 있다) 잘못 만나서 아버지를 아버지로, 형을 형으로 부르지도 못하면서 완전 개무시 당하다가 무릴 지어(활빈당) 성질껏 분탕질치고(조정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나중에는 후환 없도록 아주 먼 곳으로 토끼는 똘기 넘치는 한 아들 자식의 무용담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홍길동도 운동권 출신이라 할 수 있다.

3. 『심청전』 : 『딸전』이다. 스토리만 보면 완전 막장이다. 못난 아비가 딸 팔아서 눈뜨고 호강해 보겠다는 말도 안 되는 똥개꿈(bad little dream)을 꾸는데, 그것을 너무 착한 딸아이가 용꿈(big dream)으로 바꾼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효행담으로 반전시켜 이 세상 모든 불효녀, 불효자들을 고문한다. 정말이지 세상에 없는, 완전 막장 드라마다. 자기 혼자 품위 있는 그녀가 되기 위해 다른 모든 출연자들을 다 죽이는 스토리 전개다. 나중에 잘 되는 딸 이야기로는 신데렐라형과 심청형 백설공주형 등이 있는데 가장 잔혹한 게 심청이 이야기다. 그런 심청가(전)를 두고 무슨 대제사장 큰무당 이야기이고 바리데기 설화가 소설로 내려앉은 거라는 썰을 푸는 자들이 있는데 모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4. 『흥부전』 : 『형제전』이다. 형제는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들에게 늘 우애(友愛)를 강조한다. 흥부 놀부를 하나는 윤리, 하나는 경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만든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소산이며 그래서 그들은 짝패적 인물이라고 어거지를 쓰는 치들도 간혹 있는데 반드시 자기 집안의 우애를 돈독히 하는 일에 부단히 힘써야 할 것이다. 심지어 이 이야기가 장자 상속이 굳어지기 시작하는 사회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그쪽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된다고 게거품을 무는 자들도 있다. 모두 집에 가서 집 아이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지나 않는지 잘 살필 일이다.

5.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도 그런 사정은 조금도 숙지지 않는다. 기본적인 구조에는 하등 변함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The Karamazov Brothers)』이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Demian)』이나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나 허먼 멜빌의 『모비딕(Moby-Dick)』이나 어느 것 할 것 없이 모두 잘났거나 못난, 아니면 미쳤거나 무지막지한 아비, 어미들 이야기거나 아니면 그 밑에서 고생께나 해야 했던 불쌍한 아들 딸들의 이야기일 뿐인 것이다. 효니 충이니, 휴머니즘이니 실존주의니, 전환기의 삶이니 하며 그럴듯한 구라로 떠들어대지만 고작해야 일편단심 내 가족 이야기일 뿐이다. 엄마, 아부지, 내 마누라나 내 새끼, 그도 아니면 내 형제나 내 어릴 적 이야기를 눈물 나게 써야 고전 명작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길어야 일이십 년 안에 모두 잊혀진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The Karamazov Brothers)』, 『데미안(Demian)』,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 『모비딕(Moby-Dick)』이 우리 소설과 모종의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초고가 거의 완성될 즈음에 가서였다. 아직은 의식의 통제가 없었던 때였는데 이 네 작품이 무단히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6. 이상의 요약은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설이랍시고 시작부터 줄창 마누라 이야기만 해대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역사적, 문화적 맥락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독자 제현께서는 충분히 양해해 줄 필요가 있다.

6번은 빼고 5번까지는 아내에게 꼭 전하고 싶었지만 꾹 참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때가 아닌 것이다. 함부로 그녀 앞에서 그런 ‘알고 나면 허무한 쓸데없는 잡설들’을 들이댔다가는 한참 교양 욕구가 넘치는 아내의 부푼 가슴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냐며 내 의도를 잘못 짚고 섣부른 오해를 할 수도 있었다. 아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인 바, 자기를 조롱한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정말이지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은 완전한 경제적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경제권이 아직은 아내에게 있는 한 일거수일투족에 만전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집이든 차든, 모든 것이 다 아내의 소유로 되어 있는 판에 경거망동해서 아내의 신임을 잃게 되면 내 큰 코가 크게 다칠 수가 있었다. 아내는 이미 수 년 전부터 모든 자산을 현금화해서 『나의 삼촌 브루스리』의 주인공 삼촌(권도운)처럼 자기만 아는 장독대 밑에 감쪽같이 은닉해 놓을 것을 궁리 중이다. 내가 막판에 벌일 엉뚱한 일들에 대한 사전대비책이다. 언젠가 생전에 자비로 문학관을 하나 짓고 싶다고 발설한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칼판장처럼 아내의 돈이 숨겨진 장소를 귀신같이 찾아서 용케 훔쳐갈 수 있을 만큼 재바르지 못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아내가 공연히 백의녀 매강설이 아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녀는 방조남이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유일한 여자다. 과유불급, 아무리 방조남이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기준에 볼 때는 그저 어리숙한 시골무사에 지나지 않는다(시골무사는 인터넷 통신이나 페이스북 같은 곳에서 내가 주로 사용하는 아이디다).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그녀는 자신의 역린((逆鱗, 군왕의 분노, 혹은 그것을 사는 결정적인 에러)을 건드리는 자는 가차 없이 징벌한다. 누구처럼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된다. 아마 그런 것이 백의녀들의 일반적인 특징일 것이다. 백의(白衣)는 한 점의 얼룩도 용서치 않는다. 우리 소설이 완성되어 백만 부 정도 팔리기 전에는 절대 함부로 굴기(屈起)할 수 없는 일이다. 도광양회(韜光養晦, 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 완전히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 때 반기를 들어야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 반드시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움을 걸어야 한다는 게 손자병법의 요체가 아니던가. 힘이 생기기 전에는 절대 고개를 쳐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고금불변의 진리다. 그녀를 타도할 완전한 힘을 갖추기 전에는 절대 빛이 새어나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조금 전에도 “당신 뭐해?”라며 내 방을 슬쩍 스캐닝하고 지나갔다. 아내는 내가 소설을 쓴다는 것을 아직 모른다). 황홀한 비참(悲慘), 당당한 독거(獨居)의 순간이 올 때까지,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한 없이 빌빌대야 한다. 행여 카프카나 헤밍웨이처럼 나대다가는 그날이 제삿날이다. “문제는 행동의 깊이다. 내 삶이 곧 내 글 아니겠는가. 나는 소설가니까 소설가답게 살겠다. 아내는 협조하라”, 만약 그 따위 섣부른 태도를 보였다가는 모든 것이 도루묵이 될 공산이 컸다. 그녀가 나의 학문생활을 신묘하고 능숙하게 막았던 것처럼, 소설가로 재차 입신하는 것 역시 철저히 견제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저 그녀의 충실한 보좌역으로 살다 가야 하는 것이 그녀의 평생 바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내의 전성시대도 이제 서서히 막을 내리는 중이다. 확신할 수 있다. 내가 누군가? 노회한 팥쥐, 점집 골목에서 그 숱한 점술가들의 계시적인 넋두리 속에서 잔뼈가 굵어온 내가 아니던가? 공연히 친구들 사이에서 ‘앞을 좀 보는 자’로 치부되는 게 아니다(친구들이 댓글 좀 달아주면 고맙겠지만). 이제 아내의 시대도 저물고 있었다. 아내가 내 복으로 입신양명해 온 시간이 너무 길었다. 물론 그럴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말년에는 낙엽 한 장 떨어지는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라는 시늉을 지어줘야 한다. 은근하게 입술을 깨물며,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그 참을 수 없는 실토(實吐)의 욕구를 복장(腹藏, 부처님 뱃속에 안치함)시켜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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