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관하여 4
전(傳)에 관하여④ - 스타벅(Starbuck)
좀더 본격적으로 스타벅스 이야기를 해 보자. 마지못해 아내를 만나러 한 번씩 스타벅스를 찾지만 나는 10분 이상 그곳에 머문 적이 없다. 아내도 그런 나의 심정을 감안해서 볼 일을 대충 마무리 지은 뒤, 퇴장하기 10분 전 쯤 해서 나를 부른다. 그런 아내의 배려는 정말이지 눈물 나게 고맙다. 평생 아내는 그렇게 나를 배려한다. 그러니까 송자호에서 서다복으로의 나의 개명(改名) 결심은 그런 아내의 배려심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 하나만은 아니다. 그녀에 대한 나의 맹목적인 사랑을 포함해서, 훨씬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앞으로의 이야기들은 결국 그 이유에 대한 해명의 성격을 띤다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녀는 이제 완전히 토성을 떠나서 아주 스타벅스로의 이주를 도모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 아내는 확실히 결연하다. 제대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아직도 토성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도무지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적두병에 대한 집착은 사실은 내 멋대로의 명분이나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은 토성을 떠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집착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스타벅스와 같은 신세계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서다복으로의 개명은 나 스스로에 대한 어떤 최고장(催告狀)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신경증에서 벗어나라는 가열찬 독촉이다. 한 번 해보자는 결심을 그런 식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 풍자는 기본이다. 아내의 스타벅스 사랑에 질투를 느끼는 옹졸한 자기 자신에 대한 풍자인 것이다. 레밍(lemming)이라고 했던가? 누군가 우리 민족을 맹목적으로 줄 서서 따라가는(동반자살까지 감행하는!) 나그네 쥐새끼들과 같다고 비아냥거렸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어차피 나는 ‘팥쥐’ 정체성을 가진 신세니까 쥐 서(鼠)를 성으로 삼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저 겸사겸사, 내 새로운 이름은 여러 가지 기대감의 복합체인 것이다. 웃기는 일이지만, 이름을 바꾸고 나서부터 모종의 자신감 같은 것이 스멀스멀 내 등을 기어 올라오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스타벅스는 이제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내 이름이 된 이상, 나는 그것으로부터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격려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아내의 스타벅스 사랑이 왜 그리 심오한지 그 까닭을 잘 모른다. 아내라고 해서 그 점에 대해서 정통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알면 뭐하나?”라는 비학비문(非學非聞)의 인생관을 소지하고 있었다.
“스타벅스란 이름이 『모비딕(Moby-Dick)』에 나오는 일등 항해사의 이름 스타벅(Starbuck)에서 나온 건 알고 있어?”
얼마 전, 스타벅스로 그녀를 태워주면서 조심스럽게 그렇게 물었을 때, 아내는 놀랍다는 듯이 고개까지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평소라면 그저 앞만 보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녀는 다행히 영문과 출신이었다.
“그래? 사람 이름이었어? 그것도 그 유명한 소설에 나오는?”
그렇게 반문하면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황홀한 표정을 짓는 아내를 본 적이 없었다. 아내의 황홀한 그 표정에 은근 질투심도 들었지만 때 아니게 사기가 부쩍 오르는 것도 함께 느낄 수가 있었다.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스타벅스는 1971년 미국 시애틀의 영어교사였던 제리 볼드윈과 역사 교사였던 제프 시글, 그리고 작가였던 고든 보커에 의해 설립됐지. 이들은 쓴맛이 강한 커피원두 ‘로부스타’ 대신 부드럽고 향기가 뛰어난 ‘아라비카’를 더 좋아했어. 하지만 아라비카 원두를 판매하는 곳이 시애틀에는 한 곳도 없었지. 그래서 이들은 1971년 각자 1만 달러씩을 투자해 아라비카 원두와 향신료, 그리고 차를 판매하는 커피 전문점을 열었다. 가게 이름은 소설 『모비딕(Moby-Dick)』에서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오는 1등 항해사 ‘스타벅’의 이름을 따 ‘스타벅스 커피, 티 앤 스파이스’라고 지었어. 그 뒤 1987년 하워드 슐츠라는 새 주인을 만나면서 지금 세계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스타벅스 브랜드가 탄생하게 된 거지.”
아내는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있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역시 황홀한 눈빛이었다. 질투도 느꼈지만, 은근 기분이 좋았다.
“그럼, 스타벅스 로고로 사용되는 여성의 얼굴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겠네, 라고 말하려다 일단 멈췄다. 너무 많이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자유의 여신상 아닌가? 맨해턴에 있는....”
아내는 아이들이 다 크고 조만간 내가 퇴직을 해서 자기가 가사 업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면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갈 작정이다. 처형이 살고 있는 미국은 그녀에게는 영혼의 친정과도 같았다. 이미 여행 경비는 충분히 마련된 상태였고 때만 되면 나는 그녀를 수행해서 “미국여행 어디까지 가 봤니?”를 복창하며, 미국 여행을 다녀야 한다. 매일 한 시간 이상 처형과 나누는 국제 대화 속에서 점점 구체적인 여행 코스가 등장하는 것을, 애틀란타에서 뉴욕까지의 각종 볼거리에 대해서, 요즘 들어서 자주 듣는다.
“오딧세이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 사이런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겸손하게 말했다. 아내는 늘 내 지식의 과잉을 나무란다. 십중팔구는 다 무용지식(無用知識)이라는 것이다. 본질은 스스로를 감추지 않는데 무용지식의 안개가 늘 본질을 가린다는 것이 그녀의 철석같은 믿음이었다. 내가 아는 명사와 형용사들은 그녀 앞에서는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그녀는 동사만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명사나 형용사를 사용해서 이것저것 안들 무슨 소용이냐? 그래서, 그것들이 내 인생을 바꾼 게 뭐가 있느냐? 당신의 명사와 형용사가 오늘의 양식을 구할 수 있는 돈으로 환전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느냐? 매번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돈을 벌어오는 논술계와 내가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계는 완전히 별개의 세상이라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학문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 그것이 그녀가 자신의 자존감을 살리면서 옳게 사는 법이었다. 아마 그녀가 학창 시절 만난 모든 식자(識者)들이 인간 이하의 것들이었던 모양이었다. 단 한 명만이라도 제대로 된 인간이 있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이번은 예외였다. “안들 무슨 소용인가?”,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필살의 명제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스타벅스에 관한 한 모든 것이 용납되었다. 그것 앞에서는 아내는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왜 그거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치 학구열에 불타는 학생처럼 내게 물어왔다.
“유혹의 요정 사이런처럼 많은 손님을 유혹하라는 뜻이겠지. 그렇지만 그 내용을 보면 그닥 좋은 상징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죽음으로 유혹하는 사이런은 오딧세우스의 귀향을 가로막는 장애물 중의 하나지. 오딧세이에는 그런 구신(귀신 같은 것)들이 많이 나와요. 반인반조(半人半鳥)의 사이런(Siren) 말고도 반인반신(半人半神)의 늙지 않는 영원한 미녀 칼립소(Calypso), 인간의 육체를 돼지로 만드는 마법사 키르케(Circe) 같은 여성 캐릭터들이 다 그런 것들이지. 모르긴 해도 아름다운 노래로 사람을 홀리는 사이런을 로고로 사용하는 건 아무래도 스타벅스라는 상호의 기원과도 관계있는 것 같아. ‘인생은 항해다’라는 모종의 인생관? 아니면 넘실거리며 풍만과 풍족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대양(大洋)을 동경하는 모종의 물의 상상력과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될 것 같았다. 오딧세우스를 유혹하는 칼립소와 키르케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자다, 모두 매력 넘치고 능력 있는 여자들이다. 유혹에 넘어가면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고, 늘 쾌락 속에서 살 수 있으며, 심지어는 죽지 않는 불멸의 인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유혹은 뿌리치는데 그 묘미와 의미가 있다는 듯 오딧세우스는 꿋꿋하게 아내 페놀로프(Penelope)와의 초년(初年) 의리를 지킨다, 의리에 집착하며 유혹을 모르는 인생은 얼마나 지루한가, 그런 다소 반항적인 생각을 하면서, 그런 멋진 유혹자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이란 결국 눈 가리고 아옹하는 반어법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 숱한 유혹담 속의 주인공들은 사실 세상에 없는 것들, 그림자거나 환영에 불과한 것들이고, 있는 것은 냉엄한 현실 오직 바가지 긁는 늙은 아내뿐이라는 걸 명심하라는 이야기일 뿐이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세상의 모든 이야기라는 것들, 특히 고전 명작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마누라와 아들과 딸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간단하게 일별해 보자.
<계속>
* 『모비딕(Moby-Dick)』에서 가장 멋진 뱃사람으로 묘사되는 그는 선장 에이 허브의 어두운 면을 보강하는 이상적인 선원상(像)을 구현한다. 그를 텍스트 무의식의 슈퍼에고로 사용한다. 몽환적이고 살인적인 집념(이드의 분출)의 소유자인 에이 허브를 살아있는 인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가 독자 앞에 등장하는 장면을 소개한다.
피쿼드 호의 일등 항해사인 스타벅은 낸터컷 출신으로 키가 크고 성실한 인물이었다. 추운 바닷가에서 자랐는데도 피부가 잘 구워진 것처럼 탄탄해서 열대 지방에서도 잘 적응할 것 같았다. 스타벅은 말보다는 끈기 있게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때로는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뱃사람치고는 보기 드물게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믿음직스럽게 행동했는데 고래를 잡는 아슬아슬한 순간에도 다른 선원들처럼 쓸데없는 용기로 들뜨는 일이 없었다.
“나는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배에 태우지 않는다.”
스타벅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이 말은 아마도 적절한 용기는 위험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서 나오며,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비겁한 사람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말일 것이다. (허먼 멜빌, 정제광 엮음, 『논술 대비 세계문학 29. 모비딕』, 한국헤르만헤세, 64쪽)
** “안들 무슨 소용인가”는 김이듬 시인이 쓴 글에서 빌려 온 것이다. <가끔 시소 놀이를 한다. 대개의 경우, 시소를 끌어내린 후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아 쇠 손잡이를 잡는다. 다시 시소의 배를 엉덩이까지 끌어올린 뒤에 양 다리를 번쩍 치켜들면 꿍 내려간다. 시소의 수평 상태는 불균형을 향한 머뭇거림이다. 나는 중심에서 멀찍이 앉아 혼자서 논다. 아까 일간지에서 절제나 균형감 없이 군말이 많은 시를 나쁜 시로 분류한 비평가 Y의 새 책 광고를 보았다. 상관없지만 그의 기준으로 보면 나의 취향은 나쁜 시 쪽이다.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나는 이랬다저랬다 긴가민가하는 불안한 중생이다. 뭘 가르치려 들어도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미숙아다. 안들 무슨 소용인가.>(김이듬, ‘퇴폐라뇨$&#?’, 『시와반시』, 2005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