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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Oct 06. 2019

내 몸 속의 태엽 풀기

콤플렉스, 원형, 상징

전(傳)에 관하여⑤ - 내 몸 속의 태엽 풀기


“왜 이렇게 어렵지? 문맥도 잘 안 잡히고....”
대학원 시절 처음으로 심리학책을 하나 번역하기로 하고 몇 장 넘기면서 든 생각이었다. 융심리학에서 중요시하는 ‘콤플렉스, 원형, 상징’에 관한 설명서였다. 처음에는 그쪽 지식이 너무 빈약한 데서 오는 어려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가장 큰 난제가 내 안에서 준동하는 심리적 저항이었다. 이를테면 내 증상을 설명하는 곳에 가서는 갑자기 카오스 상태가 조장되면서 의미의 정렬이 방해를 받는 것이다. 몇 달을 그런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은 ‘문제는 나다’라고 자인을 하고 나서야 겨우 번역을 마칠 수가 있었다. 대학출판사에서 출간을 했다. 그렇지만 오역 투성이여서 남들 앞에 내놓기가 두려웠다. 10년쯤 지났을까? 누가 꼭 볼 게 있다고 그 책을 한 권 달라고 했다. 거절할 입장이 아니어서 하루 밤을 꼬박 새워서 오역을 바로잡았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 걸쳐서 연필로 가득 적었다. 지금도 누가 그 책 이야기를 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소설이든 심리학이든, 책들로는 항상 충분치 않다. 명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만으로는 늘 부족하다’라는 말씀이다. 내가 주변의 학도(學徒)들에게 늘 하는 말이 “일단 내 기분을 의심하라”다. 역지사지는 그 뒤집기 연습이 진척이 되고나서 시작해도 늦지 않다. 평생을 하수로 지내기 싫으면 정서적, 태도적 차원에서 자기를 뒤집는 연습을 부단히 해야 한다. 한 번은 확실히 깨져야 한다.


신혼 시절, 아내와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아내와의 갈등을 혼자 삭히지 못해 가깝게 지내던 한 친구에게 그 고민을 호소할 때가 많았다. 한 번은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방조남아, 상대의 행동이 도무지 납득이 안 되고 무슨 말을 해도 상대가 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나 자신을 한 번 되돌아봐라.”
그때 받은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늘 내 편에서 내 입장을 옹호해 주던 친구였다. 그런데 내 문제가 더 클 수도 있겠다는 투로 내게 충고를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온전히 ‘백의남(白衣男)’인 줄로만 알았다. 한 점의 얼룩도 없는 영혼의 소유자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문제가 있다니, 가장 신뢰하던 친구에게서 ‘너를 부정하라’는 말을 들는 순간 정말이지 까마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내겐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허투루 아무 말이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며칠을 갈등 속에서 보내다 ‘한 번 뒤집어 보자’라는 결심을 했다. 먼저 내 기분을 의심하고 아내의 입장에서 찬찬히 역지사지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거부하는 나의 가치와 의미와 선택과 효용에 대해서 하나씩 검토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아내를 내가 사랑한다면 그것들은 모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저 헛것들이었다. 오만과 아집, 오해와 편견으로 단단하게 뭉쳐진 헛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정리하니 온갖 수치(羞恥)와 회한(悔恨)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때 나는 운 좋게도 ‘밑이 확 빠지는 느낌’을 경험했다. 아마 그 느낌은 위에서 인용된 이타미의 소감과 거의 대동소이한 것이었지 싶다. 그렇게 ‘사발이 제거되는 느낌’을 가지게 되면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 하나 뚝 떨어졌다. 그때부터 비로소 나는 소설이란 것을 쓸 수 있게 된다.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어떻든 태엽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굴러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계시가 온 것이다.


“어? 요번 건 소설 비슷한데?”
계시를 전달했던 그 친구가 하루는 우리집에 놀러 왔다가 내 습작품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다듬으면 어디다 한 번 보내 봐도 될 것 같다는 것이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소설과 평론을 한 편씩 써서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둘 다 최종심에 올라서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라는 심사평을 들을 수 있었다.
“하나만 하지?”
친구가 소설을 권했다. 나도 그쪽이 좋을 것 같았다. 신춘문예에서 낙방한 작품을 보완하고(황순원선생이 “관념이 승하다”라는 평을 해주셨다), 두 편을 더 써서 오늘의 작가상에 투고했고 운 좋게 상을 받게 되었다. 두 편 중 한 편은 하루 밤 만에 다 썼고, 다른 한 편은 며칠 걸려서 완성햇다. 보병학교 시절 부대 내무반에서 초를 잡았던 작품이었다. 군대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탄생 때부터 말썽이 일었다. 출판사 편집실에서 <사관과 신사>라는 영화를 조금 베낀 것 같다는 크레임이 들어왔고(편집진이 전원 여성이어서 군대 이야기가 오십보백보, 다 비슷하게 여겨졌던 모양이었다), 인쇄 직전에 시작과 결말이 어긎진 게 발견이 되어서 급하게 현장에서 바로잡기도 했다. 오래 묵혀둔 작품이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실수가 나왔다. 처음에는 ‘동물과 군기’로 제목을 정했었는데 나중에 ‘외출’로 제목이 바뀌었다. 군부통치 시절이라 출판사에서 자체검열로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리고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보안검열을 미필하였다는 것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가장 치졸스런 작품이었는데 가장 많은 고민을 줘서 지금도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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