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傳)에 관하여⑤
전(傳)에 관하여⑤ - 적두병(赤豆餠)
최후의 결론은 항상 ‘자기를 죽여라’다. 종교든 철학이든 문학이든 모두 그렇다. 차이가 있다면 방법이다. 어떤 칼을 빌려서 자기를 죽이느냐가 서로 다를 뿐이다. 죽으면 죽을수록 살 수 있는 게 인생이다. 모두 그렇게 가르친다. 내 문학도 내게 죽기를 권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다시 적두병으로 돌아가라. 지금 내가 쓸 칼이 적두병이다. 그 칼이 가장 날이 잘 서 있다. 그래, 적두병으로 죽자, 그렇게 속삭인다.
“살아있는 상징은 핵심적인 어떤 무의식적 요소를 형태화하는 것이다.”
융이 말했다. 적두병은 내 개인적 상징이다. 상징인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무의식적 요소를 표현한다. 적두병은 상징이므로 모호한 암시와 풍성한 관념을 연결해 준다. 그렇게 해서 개인의 고립을 완화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이성적 사고나 의지의 산물이 아니다. 적두병은 궁리 끝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무의식적 심리활동의 ‘자발적 산물’인 것이다. 그래서 적두병은 ‘폭로자적인 성격’을 지닌다.
적두병이 내 개인적 차원의 상징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적두병이라는 한자 상호(商號)가 결국 가게 주인의 ‘뿌리 의식’과 연관되어 있다는 내 주장도 결코 비약이 아니었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문제였다(물론 아내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정했지만). 그런 추리가 일종의 문자 우선주의 혹은 문자 결벽증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는 반성도 물론 있었다. 평생을 글(문자)과 함께 살아오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문자 우선주의자가 되었다. 말(음성)과 글(문자) 중에서 인류의 문화 발전에 기여한 것은 전적으로 글이었다. 말은 녹음기나 축음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저 떠돌아다니는 풍문의 존재였었을 뿐 그 어떤 문화적인 역량으로도 기능하지 않았다. 고작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자기들끼리 동병상련하는 귓속말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세종대왕이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글자를 만들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나름 혁명적인 결단이었다. 풍문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붙들어 놓고 음미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 그리고 생각과 따로 노는 표기수단을 만들어 생각하는 게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보다 쉽게 자기주장, 자기표현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생각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다만, 그것이 세상의 모든 생각을 두루 품겠다는 과욕을 부릴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찬가지로 모바일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한글의 위대함이 다시 한 번 입증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자 인류문화의 완벽한 집적을 가능케 하는 한자가 명실공히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세상을 세종대왕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자신이 만든 훈민정음 때문에. 한글 덕분에 백성들의 생각이 날로 비루해지고 행동거지 역시 갈수록 강퍅해 질 것이라고 세종대왕 역시 공감했다면 아마 한글은 탄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 스스로 백성을 가르치는 훈민(訓民) 군주로 자처했던 세종대왕의 손으로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백성을 가르치는 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내 편협하고 강퍅한 문자주의의 한계를 모르고 그런 주장을 폈던 것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볼 때도, 적두병이라는 한자 상호를 쓰는 까닭이 가게 주인이 중국인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내 추리는 충분히 보편적이고 타당한 거였다. 요즘 같은 세태에 누가 그런 고색창연한 간판을 내걸겠는가. 진짜 중국인이 아니고서야 그런 반동을 저지를 리가 없는 것이다. 설혹 상식의 허를 찌르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나의 그런 추리가 쉽게 무너질 일은 없었다. 그가 중국인의 후예임이 분명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그의 제빵 기술이었다.
나는 그의 적두병을 처음 맛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그의 기술이 내림 기술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당대에 보고 배운 기술과 대를 이어 내려온 기술은 무엇이 달라도 다른 법이다. 그가 만든 적두병은 내가 맛본 것 중에서는 단연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이상적이라 할 만큼 팥소와 껍질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팥소에 견과류를 첨가해 팥의 지나치게 강렬한 특유의 자극적인 향미를 견제하면서 씹을수록 은근하고 깊은 식감을 내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모르는 이들은 팥소의 단맛에서 적두병의 맛이 좌우되는 줄 알지만, 사실은 단맛만으로는 식감을 풍성하게 할 수 없는 노릇이라는 걸 아는 이들은 다 알고 있다. 더욱이 팥의 물성이 차기 때문에 그것과 어울리는 따듯한 물성을 배합하는 일도 꽤 중요한 과정이었다. 껍질을 파삭하게 구워서 먼저 고소한 맛을 내고 이어서 단맛이 뒤따라오는 순차적인 식감을 제대로 만들고 있는 것도 남들이 따라 할 수 없는 비법이었다. 견과류를 첨가해서 팥소가 은근하게 뒷맛을 유지하게 해 주는 것도 일품이었다. 팥의 향미를 음미하면서 물리지 않고 그 맛을 오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팥소를 쓰는 고급 전병 유(類)가 지켜야 할 금과옥조였다. 팥소의 습기가 오래 유지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아마 계란과 우유를 활용해서 최대한 팥소가 마르는 시간을 늘리고 있는 듯했다. 그것도 쉬운 것이 아닌데 적두병은 잘 해내고 있었다. 겉을 싸는 식재(食材)의 풍미도 결코 일류 제과점의 그것에 밀리지 않았다. 가성비로 볼 때는 다른 업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제품이었다. 사소한 요령에서부터 명장(名匠)의 확고한 신념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수 없는 적두병이었다. 이 난국에서도(토성공원 앞도 조만간 젠트리피케이션의 질풍노도가 덮칠 것이다) 몇 년째 가격을 올리지 않는 불패의 상도(商道)까지 고려한다면 적두병은 틀림없이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그것도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렵게 자수성가한 부친의 삶을 기념하고 추수하려는 중국인 2세의 작품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추리도 아닌 추리는 매사에 호들갑을 떠는, 당신 같은 ‘팥쥐’들의 생각일 뿐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적두병에 대한 나의 품평 태도부터 평가절하했다. 입맛은 간사해서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고, 내 몸의 상태나 기분에 따라 다른 것이기 때문에 몇 번의 입질로 그 맛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한 상 차림도 아니고 고작 ‘한 입 먹거리의 호사’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서야 어떻게 작가 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는 훈계도 내렸다. 그리고, 우리 땅에서의 화교들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좀더 정치하게 정치경제학 쪽으로 이해를 넓힌 다음에 입질을 해도 하라고 나무랐다. 이 땅의 화교들이 제3공화국 시절의 차별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이곳저곳으로 이산(離散)한 것을 모르느냐는 거였다. 그렇게 떠난 지가 언젠데, 무엇이 자기를 부른다고 그 비루하고 강퍅한 토성공원 앞에 손자까지 나서서 다시 전을 펴겠느냐는 설명이었다. 재산 취득과 관련된 법령이 개정되어 외국인도 내국인과 별반 다름없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안다고, 짧은 상식을 동원해 반박도 해 보았지만, 아내 앞에서는 ‘도사 앞에서 요령 흔들기’에 불과했다. 미국에서 퓨전식당을 하고 있는 그녀의 형부, 아내가 그토록 경애하는 나의 손윗동서가 바로 그 이산 당사자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방면에서는 아내가 나보다 선지자임이 분명했다. 물론 아내의 적두병에 대한 평가가 전적으로 그런 사회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서인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체를 하니까 그렇게 면박을 준 것이었고 사실은 아내의 적두병 품평은 주로 객관적인 데이터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주요 재료인 팥이나 견과류가 그 가격으로 볼 때 국산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맛에 있어서도 유명 제과점 특히 일본 여행에서 맛본 나마가시(和菓子)들과는 아주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거였다. 그리고 영업 환경에 대해서도 아주 비판적이었다. 위생 상태가 불량하다는 거였다. 아내의 데이터에 의거해 적두병과 가게 주인을 분석해 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그저 토성공원 앞에서나 맛있게 먹을 정도의 작은 팥빵’이었다.
그게 콩쥐다운 생각인 것은 분명했다(아내는 나의 팥쥐 기질을 누구보다도 싫어한다). 그러나 콩쥐들은 세상을 즐길 줄 모른다. 좋아하는 팥소가 든 적두병을 보고 호들갑을 떨지도 못한다면, 지 마음대로 환상 속에 들어가 마음껏 공상도 즐기지 못한다면, 도대체 이 세상이 무슨 재미란 말인가? 이 지루한 인생을 어떻게 견디란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일만 하고 산단 말인가? 가족 부양 같은 주어진 임무에만 목을 매고 사는 건 결국 소나 말, 개나 당나귀의 삶이 아닌가? 비록 자정까지만 딱 유효한 것이긴 하지만, 사람에게는 쥐가 끄는 호박마차 한 대쯤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