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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Oct 09. 2019

모든 이야기의 궁극적인 주인공은

글루미선데이

모든 이야기의 궁극적인 주인공은


모든 이야기의 궁극적인 주인공은 그 이야기를 전하는 자입니다. “모든 작품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다”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아무리 신기하고 당돌해도, 이야기가 전하는 사실(사물)이나 사건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 ‘그렇고 그런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혹 ‘짠하디 짠하다고’ 해서 특별하게 마음을 내어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든(치밀한 작가적 고려에 의해서) 이야기 안에서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있도록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일희일비할 가치가 없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개의 이야기는 결국 그것들의 ‘이야기 속 진실성(리얼리티)’에 따라서 독자(청자)들의 사랑과 멸시를 받게 되어 있어 작가들은 어떻게든 그 ‘이야기 속 사건 사물들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 씁니다. 타고난 재주나 배운 지식을 총동원해서 언필칭 장졸우교(藏拙于巧, 자신의 치졸함을 기교로 감춤), 자신을 과대포장하기 바쁩니다. 그럴 경우 대개는 독자 쪽이 집니다. 이야기를 찾는 자들의 근본 심리가 ‘위로받고자 하는 마음이나 태도’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몸 중심’을 흔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판이든 기술을 먼저 거는 쪽이 유리한 것이 ‘싸움판’입니다.


허잡한 기술에 내 몸이 넘어간다는 것은 싸움꾼에게는 크게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일대종사>라는 영화를 보면 “(져서 땅바닥에 누운 자들은 할 말이 없고) 오직 서 있는 자만이 말할 수 있다”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이야기를 읽고 허무하게 속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누가 그 이야기를 전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자(내포저자)야말로 모든 사건의 핵심입니다. 그의 말하는 방식과 사건을 구성하는 태도에 따라서 과거의 사물과 사건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합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어떤 이야기에서든, 소설이든 영화든 신문기사든, 궁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은 작가(감독, 기자) 자신입니다.

‘이야기의 주인’이 ‘이야기를 전하는 자’라는 것을 알면 ‘이야기 속 주인공’은 그저 인형극의 인형(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뻔히 알면서 꼭두각시에 대해 동정하고 반발하고 일희일비합니다. 누가 인형에 줄을 달아서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도통 무감하게 됩니다. 우정 모른 척합니다. 누가 그 무대 위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서 이야기할작시면 아예 외면하는 이들도 숱합니다. 그들의 속셈은 단순합니다. 내겐 이야기가 필요한데 너 때문에 내가 가진 이야기가 갑자기 재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무엇이든 내 삶을 위로해 줄 것이 필요한데 왜 그 일을 방해하느냐고 성을 냅니다. 그럴 때는 속수무책입니다. 더 신기하고 당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공급하는 일 이외에는, ‘꼭두각시놀음’에 취해있는 대중들의 눈과 귀를 다른 곳으로 돌릴 방도가 없습니다. 그게 이야기의 힘이고 독성입니다. 약한 인간의 타고난 품성입니다.

한 여자(일로나)와 세 남자(자보, 안드라스, 한스)의 애증(愛憎)어린 삶과 죽음을 다룬 영화 <글루미선데이>의 ‘이야기 주인’은 그들 주인공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원주인은 자보레스토랑의 새 주인, 영화에서는 이름도 얻지 못하고 있는(영화 속에서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작과 끝에만 등장하는 중년의 남성, 일로나의 유복자 아들입니다. 그는 한스가 일로나의 몸을 폭력(자보를 구하기 위해서 일로나가 자초한 것이긴 합니다만)으로 취한 후 생긴 아들입니다. 아마 그래서 영화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의 이름에서 한스와 관련된 어떤 단서라도 노출이 된다면, 이 영화가 어머니와 짜고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의 이야기라는, 일종의 여백의 미로 남겨둔, 마지막 반전의 묘가 결정적으로 훼손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것은, 혹은 드러날 필요가 없는 것은, 그가 바로 ‘이야기의 원주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기 집에서, 자보 레스토랑에서, 그곳을 거쳐간 젊은 날의 어머니와 세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원래 집주인은 명찰(패찰)을 달지 않는 법이니까요.


이 영화에서 일로나가 일체의 윤리 관념을 뛰어넘어 ‘육화된 천사’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은 이 이야기의 원주인이 그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연적이 없습니다. 그가 ‘오기 전’(그는 자보가 자신이 오기 전에 떠났다고 한스에게 말합니다)에 자보와 안드라스는 이미 세상을 떴습니다. 있다면 자신의 생부 한스가 고작입니다. 그마저도 죽음을 앞둔(그들 모자는 한스를 죽일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팔순의 노인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승천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랑스러운 어머니만 있을 뿐입니다. ‘아들-연인’으로서, ‘아버지의 말’이 애초에 부재하는 우로보로스적 공간(영화에서도 가운데가 움푹 꺼진 자보 레스토랑의 내부 공간은 모태의 이미지를 지닙니다)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는, 아버지들이 정한 윤리나 법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오로지 ‘어머니의 몸’만이 존재합니다. ‘어머니의 몸’은 세상의 모든 갈등과 균열을 하나로 통합하는 공간입니다. 이를테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파괴와 재생의 블랙홀입니다. 그러므로 유복자로 태어난 그가 누구의 아들이냐는 질문은 맥락적으로 우문(愚問)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어머니의 몸’, 그 천상의 에로티즘만이 이 세상을 설명하고 또 구하는 유일한 천리(天理)였습니다. 그 천상의 에로티즘을 가로막는 것들은 가차없이 제거됩니다. 독점과 지배의 남성성은 지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야 합니다. 천상은 그들의 것이 아닙니다. 자보든 안드라스든 한스든, 아버지들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족 한 마디. 영화 <글루미선데이>를 보고 기분이 별로였다고 말하는 이들도 꽤 있습니다. 그들은 자보와 안드라스를 동시에 사랑하는 일로나에게 격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저는 이 이야기가 홀로 60년 동안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사모곡이라는 것을 이해하라고 말해 줍니다. 그러면 조금은 수그러집니다. <써머스비>와 같은 영화가 있었다면 <글루미선데이> 같은 영화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합니다. 세상은 어절 수 없이 ‘아버지의 말’과 ‘어머니의 몸’으로 굴러갑니다. 그 둘은 이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밀고나가는 ‘세계의 수레’를 떠받치는 양쪽 바퀴들입니다. 어느 하나만 있어서는 온전한 운행(運行)이 어렵습니다. 어느 시대든 어느 한 쪽이 과도한 힘을 받았을 때는 크게 세계가 흔들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나가야 했습니다(일로나의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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