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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Oct 11. 2019

박학하였으나 이름을 낸 것이 없는

사와 집

박학하였으나 이름을 낸 것이 없는


...공자께서는 이(利)와 명(命)과 인(仁)을 드물게 말씀하셨다. 달항당(達巷黨)의 사람이 말하기를, "위대하구나 공자여! 박학하였으나 (어느 한 가지로) 이름을 낸 것이 없구나." 하였다.
공자께서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장차 무엇을 전문으로 잡아야 하겠는가? 말 모는 일을 잡아야 하겠는가? 아니면 활 쏘는 일을 잡아야 하겠는가? 내 말 모는 일을 잡겠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베로 짠 관(冕旒冠)을 쓰는 것이 예법에 맞지만, 지금 사람들은 생사(生絲)로 만드니 검소하다. 나는 여러 사람들(時俗)을 따르겠다. (신하가) 당(堂) 아래서 절하는 것이 예법에 맞는데 이제 와서는 당 위에서 절을 하니 이는 교만한지라 비록 대중과 어긋나더라도 나는 당 아래서 절하겠다." 하였다.
공자는 네 가지의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 사사로운 뜻(편협되게 뜻함)이 없고 기필하는 마음(장담함)이 없고 집착하는 마음(고집함)이 없고 이기심이 없으셨다.
공자께서는 광(匡) 땅에서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셨을 때 말씀하시기를,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가 남긴 문화는 이제 나에게 있지 아니 하느냐? 하늘이 장차 이 문화를 없애버리려 했다면, 후세 사람들이 이 문화에 더불지 못하려니와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지 않을진대, 광땅의 사람들이 나를 어찌 하겠느냐?" 하였다.(子罕言 利與命與仁. 達巷黨人曰 大哉 孔子. 博學而無所成名. 子 聞之 謂門弟子曰 吾何執. 執御乎. 執射乎. 吾執御矣. 子曰 麻冕 禮也 今也純儉 吾從衆. 拜下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爲衆 吾從下. 子絶四 毋意 毋必 無固 毋我. 子畏於匡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 其如予何.) [『논어』 「자한」편]


『논어』 「자한(子罕)」편의 서두는 인문학(자)의 요체를 일목요연하게 밝히고 있는 부분입니다. 사람 되기(成己)에 힘을 쓰는 공부에는 의(義)를 해칠 일이나, 신비주의에 빠질 일이나, 구름 잡는 이야기가 결코 소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공자님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 말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단지엽적인 것에서 세속의 명성을 구하지도 말라고 타이릅니다. 그것보다는 ‘말을 잘 몰아서 마차에 탄 사수(射手)의 활이 적당(敵黨)에게 바로 꽂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일마부 이사수(一馬夫 二射手)’라는 것이지요.

법과 때는 상호텍스트적이라는 것도 윤리적인 관점에서 친절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삼베로 짠 관(冕旒冠)을 쓰는 것이 예법에 맞지만, 지금 사람들은 생사(生絲)로 만드니 검소하다. 나는 여러 사람들(時俗)을 따르겠다. (신하가) 당(堂) 아래서 절하는 것이 예법에 맞는데 이제 와서는 당 위에서 절을 하니 이는 교만한지라 비록 대중과 어긋나더라도 나는 당 아래서 절하겠다"는 말씀은 ‘법’에 우선하는 ‘때’와 ‘때’가 침범할 수 없는 ‘법’의 경지를 설파하는 것입니다. 법을 지켜야 할 때와 시속을 따라야 할 경우는 오로지 윤리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문화(인문학)가 전승되는 것에는 천명(天命)이 게재되어 있는 것이어서 인력으로는 함부로 어찌할 수 없다는 엄숙장엄한 부분에 가서는 불초 시골무사라도 어쩔 수 없이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그런 위의 내용 중에서도 특히 제가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말을 모는 일을 잡겠다’라는 공자님의 말씀입니다. 먼저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그 부분에 대한 주석을 살펴보겠습니다.


....집(執)은 전문(專門)으로 잡는 것이다. 사(射)와 어(御)는 한 기예인데 어는 남의 마부가 되는 것이어서 잡는 일이 더욱 비천하다. “나로 하여금 어느 일을 전문으로 잡아서 이름을 이루게 하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장차 말 모는 일을 잡겠다”고 말씀한 것이다. 이는 남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서 겸사(謙辭)로써 받으신 것이다.
● 윤씨가 말하였다. “성인은 도가 온전하고 덕이 완비되어 어느 한 가지 장기(長技)로 지목할 수 없다. 그러나 달항당 사람은 공자의 위대함을 보고서 생각하기를 그 배운 것이 넓으나 어느 한 가지 잘함으로 세상에 이름을 얻지 못했음을 애석히 여겼다. 그러하니 성인을 흠모하였으나 성인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하여금 무슨 일을 전문적으로 잡아서 이름을 얻게 하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말 모는 일을 잡겠다’고 하신 것이다. [성백효 역주, 『논어집주』 자한 第九]


사(射)와 어(御)는 육예(六藝)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등 육예는 고대 중국의 테크노크라트였던 사(士)들에게는 벼슬길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교과목이었습니다. 공자님이 “말 모는 일을 잡아야 하겠는가? 아니면 활 쏘는 일을 잡아야 하겠는가?”라고 반문하신 것에는 바로 그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전문 과목 하나에서 특별한 명성을 얻은 이들도 다수 있었을 겁니다. 공자님은 그러한 전문인들이 나타날 수 있는 총체적인 기반(基盤)으로서의 인문학을 ‘말 모는 일’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나라의 규모를 ‘승(乘)’으로 나타냈습니다. 제법 규모가 있는 큰 나라를 보통 ‘천승지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대(周代)의 제도(制度)에 전쟁이 일어나면 큰 제후(諸侯)는 병거(兵車) 천승(千乘)을 내놓는 풍속이 있었다 합니다. ‘승’이 바로 말이 끄는 이인승 전차(兵車)를 세는 단위였던 것입니다. 병거에는 두 사람이 탑니다. 한 사람은 말을 몰고 한 사람은 활을 쏩니다. 말 모는 자의 기술이 활의 적중률을 높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공자님은 바로 그런 뜻에서 ‘내 말 모는 일을 잡겠다(吾執御矣)’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 일이 비천한 일이라서 겸사로 그리 말씀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인문학에 대한 비유였던 것입니다.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나로 인해 세상의 빛나는 문화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생성될 수 있는 위대한 어머니, 그 대지(大地)의 모성(母性)처럼, 당신의 학문은 세상 모든 문화의 바탕이 되는 것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말 모는 일’에 대한 공자님의 가르침은 학문(특히 인문학)이 기껏 전문 분야에서 자기 이름이나 날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천명(天命)이 함께 하는 것이기에 인간의 욕망이 그것 안에 거(居)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읽는 게 맞지 싶습니다.

인문학은 결국 글쓰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님이 직접 쓴 글을 접할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본디 큰 스승들은 조술(祖述)하되 말로써만 했다고는 하지만 내내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러나, 『논어』의 저자들은 가급적이면 공자님의 말씀을 원형대로 보존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 노력이 언제 읽어도 새로운 느낌(가르침)을 주는 고전(古典)으로서의 가치를 『논어』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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