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관하여
전(傳)에 관하여⑤ - 아버지와의 이별
그것 말고도 아버지가 형을 홀대한 정황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형의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장사를 핑계로 일절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아직은 힘에 부칠 때인데도, 마치 형을 장사치로 키울 요량인 양 노역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형이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인가 되던 때였을 것이다. 여름 방학 땐데, 아버지는 토성공원 앞에서부터 한 리어카 가득 음료수 따위를 실어서 도회의 끝자락인 방천 유원지까지 운반하도록 했다. 그때는 방천이 물도 제법 맑고 많아서 여름 피서지로 꽤 역할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전만 펴면 이문은 남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의 도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먼 거리였다. 형과 나는 끌고 밀고 하면서 오전을 꼬박 걸어서야 목적지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시장 네거리, 키네마극장, 군사령부, 방천시장, 뚝방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도회의 큰 장소나 요지들을 거치면서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앞에서 끄는 형은 땀을 비 오듯이 흘렸고 얼굴은 도착했을 때 이미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우리는 오후 내내 실고 간 것을 다 팔고 돌아왔다. 꼬박 일주일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는 힘에 부쳐 더 이상 가지를 못했다. 형이 몸살로 앓아 누웠기 때문이다. 그때 아버지가 내린 보상이 내 기억에는 지금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 사이다 한 병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형에게는 칠성사이다(서울에 공장이 있다). 내게는 삼성사이다(장난감도시에 공장이 있다).
그러니까 형이 모든 일에 재바르고 탁월했던 것은 그런 아버지의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어떤 투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목숨을 건 인정 투쟁,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형의 타고난 자질 자체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100m 달리기는 도내 중학생 기록을 가지고 있었고, 중학교 때는 핸드볼 선수로도 맹활약했다. 체력과 경기 감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리더십도 있어서 실장, 학생회장 같은 것을 도맡아했다. 머리도 있는 편이어서 공부도 잘했고 일류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 없이도 설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만족할 수가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의 급격한 몰락이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냉대에 대한 형의 저항을 더 이상 불가능하게 만든 어떤 결정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리고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 그것이라는 게 현재의 내 추리다. 물론, 확실한 물증 같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상황증거가 그렇다는 말이다. 상황증거 가운데는 ‘궤도반’(철로 보수팀. 보통은 궤도공영 주식회사 등의 외주회사에서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해서 외주팀으로 운영한다. 반장(십장)을 중심으로 팀별로 움직인다. 노동 조건이 열악하고 인명 사고가 자주 일어나서 지원자가 적은 편이다.)이 그 첫째가 된다.
형이 궤도반에 들어가서 막노동을 한다는 것을 알려 온 것은 고2 여름방학 무렵이었다. 나는 1학기 내내 고전해야 했던 초등생 입주 가정교사를 드디어 그만 두고 같은 반 친구 집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다. 난생 처음 해 보는 하숙이었다. 친구에게 공부하는 학생의 모범을 보여주는 조건으로 20% 정도의 할인을 받았다(보통 하숙비가 만원이었을 때 8천원). 내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온 것이다. 부진했던 학업 석차를 다시 한 번 끌어올릴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형에게는 고난의 행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립대학 합격증을 가지고 내려간 형에게 등록금 지원을 거절했다. 그 많은 돈을 변통할 데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대학에만 들어가면 그 이후로는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형의 간청을 아버지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 뒤 형은 홀연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내게 편지를 보냈다. 짧게 안부를 물은 후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이 용산역 구내라고만 알려왔다. 아버지에겐 알리지 말라고 덧붙였다. 형에게 편지를 받은 것은 그때가 두 번째였다. 처음은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나, 아버지 곁에서 M고교를 다니며 안정적으로 학업을 지속하는 게 좋을 것 같다”라고 나의 K고 진학을 말렸다. 형이 그렇게 ‘아버지 곁에서’를 강조한 까닭을 나중에 알았다. 열악하기 작이 없는 자취생활 중에서도 형은 아버지의 ‘눈 밖에 나는 일’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었다. 일종의 불안증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때로 황당할 정도로 무심할 때가 있다는 것을 형은 내게 전하려 했지만 나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형의 입대영장을 들고 용산역에 내렸을 때는 이제 막 해가 지려고 하는 찰나였다. 서서히 땅거미가 몰려오고 있었다. 초저녁 무렵이었다. 역 구내에서 철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내려 가자 국방색 군용 천막을 친 막사가 두 채 나타났다. 한쪽은 침소(寢所)였고 다른 한쪽은 식당이었다. 식당 옆에는 큰 가마솥이 두 개 걸려 있었다.
“밥부터 먹지 총각~”
형은 일터로 나가고 없었다. 식당 아주머니가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밥과 국을 내왔다. 밥은 흰쌀밥에 완두콩을 드문드문 얹었고 국은 시뻘건, 그러나 짜거나 맵지 않은 서울식 육개장이었다. 푸짐하고 맛있었다. 몸살기가 돌아 쉬고 있다는 아저씨가 나를 형의 자리(군대식 내무반 형태였다)로 안내했다. 군용 담요가 단정하게 개어져 있는 침상이었다. 앉아서 형이 오기를 기다렸다.
“곧 형이 들어올 거여. 동생이 형하고 많이 닮았네?”
나이가 서른 대여섯이나 됐을까?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에 여기저기 주름살이 퍼져 있었다. 얼굴에 산전수전 다 겪은 표시가 났다. 그러나, 사람은 서글서글했다.
“재미난 이야기 하나 해 주까?”
대답하기가 겸연쩍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내 신세가 요리 된 게 딱 그쪽 나이 땐디....”
내 모습이 딱 그때의 자기 같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째지게 가난한 시절이었다. 집에 먹을 것이 떨어져 누나가 양식을 구하러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몇 달 째 소식이 없어서 물어물어 대처로 찾아갔더니 자기를 한 허름한 자취방으로 데려가더라는 것이다. 거기서 공장에 다니며 친구와 둘이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주로 야간에 나가고 낮에는 잠을 잤는데 그렇게 해야 더 많은 잔업수당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하루는 배부르게 먹고 한 잠 푹 자는 중이었는데 기분이 하도 묘해서 눈을 떴더니 같이 공장에 간 줄 알았던 누나 친구가 떡하니 자기 배 위에 올라가서는 그짓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이 하는 일이 공장에 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렇고 그런 곳에 소속이 된 직업여성이었더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팔자에 없는 기둥서방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절 이후로 팔자가 꼬여서 이곳 궤도반까지 흘러들어오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좋은 걸 왜 그만 뒀어요?”
듣다 보니 음담패설이었다. 서글서글 한 줄 알았는데 썩을 놈이었다. 노는 게 너무 꼴같잖아서 그렇게 내지를 뻔했다. 사는 게 모두 어차피 누추한 것이라는 건 이미 M시에서 징하게 겪은 터였다. 어른이 징징대는 건 인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아니었다. 게으른 것들이 남 탓을 한다. 그 중에서도 여자 탓을 하는 놈이 가장 못나고 못된 놈이란 걸 모르는 모양이엇다. 내 조근놈 시절의 마지막 무대가 M시의 중앙동, 이른바 ‘특정지역’이었다. 밤마다 홍등이 화려하게 켜지고 신데렐라처럼 아름다운 누나들이 허연 허벅지살을 마음껏 드러내며 껌을 딱딱 씹고 앉아 있으면 우리는 멋도 모른 채 황홀했다. 지금은 없어진 신역사(新驛舍)로 나가 뜨내기 나그네나 휴가 나온 장병들을 모셔 와야 일용할 용돈이 생겼다. 고작해야 콜라 한 병 값이지만 삐끼질은 그 동네 모든 아이들의 신성한 부업이었다. 누구도 그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무라는 부모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부러워했던 놈들이 바로 기둥서방들이었다. 천하에 못돼먹고 못난 놈들, 어린 나이에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짓이 무슨 자랑거리라고, 그걸로 구라를 치다니 정말 못난 새끼였다.
물론 그런 구라쟁이만 궤도반에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막노동보다는 비교적 간조(勘定かんじょう, 품삯)가 좋은 편이라 부자(父子)가 함께 열심히 일해서 목돈을 모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형에게 들었는데, 궤도반에서는 원래 과거 이력을 묻는 것이 금기시 되어 있다고 했다. 수배 중인 사람도 꽤 있었다고 했다. 간혹 형사들이 수배자를 찾아오는 경우도 있고 헌병들이 기피자를 찾아오는 경우도 있는데 성공해서 사람을 데리고 가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가족들이 찾으러 오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 경우에도 “모릅니다”가 정해진 답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을 구할 수가 없어서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통신시설이 잘 갖추어진 요즘도 사고가 한 번씩 나는데 그때는 정말 위험한 직종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인 게 시간에 쫒기며 일을 하다 보면 기차가 바로 등 뒤까지 와도 까맣게 모른다는 것이다. 반드시 한 사람은 망을 보고 있어야 하는데 잠깐 한 눈을 팔거나 일을 거들다가는 팀 전체가 한꺼번에 저승길로 가기 십상인 게 궤도반 일이었다. 아마 그때 그 아저씨에게는 내가 꽤나 순진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내가 우러러볼 줄 알았던 모양인데 속으로는 참 가소로운 인물이로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때 형이 들어왔다. 대뜸 그 인사의 구라를 알아채고는 한 마디 던졌다.
“104호부터 좀 무사히 보냅시다~”
그러더니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작업복 차림의 형은 누가 봐도 궤도반이었다. 얼굴도 시커멓게 타 있었고 몸집도 제법 불어 있었다. 입대 영장을 받아서 윗주머니에 넣더니 지폐 몇 장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시계를 보더니 천천히 걸어서 용산역으로 가자고 했다. 열차 번호 104호를 타고 장난감도시로 내려가라는 거였다.
“여기서 바로 입대할 거다.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씀드려라.”
형은 공부 열심히 해라, 학교생활 잘 해라와 같은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한 번씩 뜬금없이 던지던 “남 앞에 서 봐야 한다. 기회가 되면 학생회장 같은 것에도 한 번 도전해 보고”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 알아서 잘 하겠지라는 표정이었다. 형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믿었다. 열차에 올라 어둑어둑한 저녁 차창을 통해서 위에서 보는 형의 프로필이 영락없이 아버지의 그것이었다. 아, 형은 정말 아버지를 많이 닮았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말없이 손을 흔들며 이별을 고했다.
“조근놈은 외탁이야, 형하곤 달라~”
그 장면에서 갑자기 어머니가 한 말이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진학 무렵 아버지 곁을 떠나던 그날 새벽도 생각이 났다. 다시는 아버지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나는 그렇게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친탁인 형도 그렇게 형은 아버지 곁을 떠나는구나 싶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