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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27. 2019

남자의 자격, 음식남녀

남자는 만지고 여자는 본다

남자의 자격, 음식남녀


『음식남녀(飮食男女)』(이안, 1994)라는 영화를 보면서 생각(선입견)보다 재미있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과연 사계(斯界)에서는 이미 이름이 나있는 영화였다. 음식(조리)과 관련된 인간의 제 욕망과 그것의 존재론적 가치를 탐구하면서 인간사의 디테일(주로 남녀 관계)을 세필(細筆)로 꼼꼼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홀아비로 늙고 있는, 사람 좋은 특급 요리사 주 선생과 어머니 없이 다 자라버린 방년(芳年)의 세 딸, 그리고 주 선생 주변의 ‘사랑을 기다리는’ 여인들. 인물 구성만 보더라도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거기다가 주 선생은 점차 미각을 잃어간다. 누군가 주변(가족)의 도움 없이는 그의 천상지기(天上之技)도 더 이상 빛을 볼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별 일 없으면 그들이 사람이 아니다. 화려한 요리 기술과 먹음직한 음식들,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는 미녀들의 사랑, 가족을 회복하고 유지하려는 눈물겨운 노력들, 다양한 사건과 사물이 등장하면서 만족스런 극적 결말을 향해 영화는 한 걸음 한 걸은 나아간다. 도대체가 급한 게 없다. 어쨌든 영화를 보다 보면, 사람이 산다는 게 결국은 음식남녀(eat, drink, man, woman)의 네 가지 귀퉁이에 어쩔 수 없이 매여 지내는 일일 뿐이라는 걸 실감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와 함께 ‘음식남녀’라는 말이 본디 인간의 식욕(食慾)과 색욕(色慾)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飮食男女 人之大慾存焉)도 저절로 독자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다. 옛 성인들은 음식남녀에 사로잡히지 말고, 문화(文化)를 추구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야 인간이 된다고 가르쳤다. 출발은 그랬지만, 이제 우리는 다시 음식남녀로 돌아간다.


그건 그렇고, 그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의 알짜 소감은 좀 달랐다. 한 마디로, <남자는 역시 요리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느닷없이 왠 비문(非文)이냐?", 남자 동지들에게 그런 타박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절 수 없다. 잘 생각해 보면 그건 당연한 이치다. 먹을 것을 공급하는 일(음식)은 고래로 남자들의 몫이었다. 예나제나 여자들의 주 임무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남녀)이다. 물론 일부의 예외도 있긴 하겠지만, 남자가 식량을 공급하고 여자들이 그것을 조리하는 식의 역할 분담은 그 원초적인 역할론에 비견하면 오히려 부수적인 일이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식량을 공급하는 일이 남자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여자들도 얼마든지 바깥에서 식량을 조달한다. 식량 구하기도 예전보다는 수월하다. 이제 그것을 가져오는 것만으로는 남자가 그 역할을 충분하게 인정받을 수 없는 세상이 왔다. 이제 <음식>을 조리해서 갖다바쳐야 제대로 그 역할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오고 말았다. 결국 여자에게 맡겼던 조리(調理)의 영역, 그 역사적인 여자의 역할도 남자가 다시 찾아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건 어쩌면 무의식이다. 달리 생각해 볼 방도가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판단할 일은 아니다. "그래서 요즘 들어 그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남자들이 TV에 자주 나오는구나." "그들이 사람들(특히 여자들)의 환심을 사는 일이 그래서 당연한 일이었구나." "의사고 교수고 지휘자고 백수고 할 것 없이 남자들이 요리책을 내는 일이 잦은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그래서 결론이 났다. "나도 요리를 배워야겠다(그래서 뭐 하겠다고?)." 그런 생각, 어떻게 보면 다소 엉뚱한 상상이,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우선 쉬운 것부터, 유명한 요리책인 『나물이네 밥상』부터, 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물론 그런 교훈적인(?) 생각들만 주입하는 것은 아니다. 본디 우리 인간 세상은 ‘보기에 아름답다’라는 말을 제일 큰 찬사로 여긴다. 옛날 어른들에게는 ‘모양 나쁘다’라는 말처럼 큰 욕이 없었다. 모양을 생각지 않는 것, ‘모양 빠지는 일’은 체면 없는 것들이나 할 일이라고 여겼다. (요즘 들어 여기저기서 ‘모양내는 일’이 자주 눈에 띤다. 자세한 속내야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가 다시 옛날로, 동방예의지국으로, 돌아갈 모양이다). 그건 라캉 같은 이들이 입에 침을 튀기며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그냥 살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일이다(이론가들이 치는 건 늘 뒷북이다). 이 영화에서는, 주 선생이 보여주는 현란한 조리 과정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 중의 하나다. 모양과 색과 냄새, 그 삼위일체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요리는 제대로 된 맛을 뽐낼 수 있는 법, 그 맛있는 요리를 보여주는 것, 혹은 조리 과정 일체를 맛있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그 소임의 대부분을 이미 달성한다.


“타이페이 시내 풍경이 보입니다. 신호등이 바뀌자 오토바이들이 벌떼들처럼 앞으로 달려 나옵니다. 이 복잡한 사거리 풍경은 영화 내내 간헐적으로 반복됩니다. 오래된 가옥의 전경을 보여준 후 카메라는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일요일 만찬. 아버지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고 세 딸은 앉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 선생은 살아있는 민물고기 한 마리를 건진 후 나무젓가락을 끼워서 한방에 놈의 숨통을 끊습니다. 비늘을 벗기고, 포를 뜨고, 밀가루를 묻히고, 기름을 부어 튀깁니다. 흥겹게 요리합니다. 오징어에 칼집을 내고, 고추를 썰고, 돼지고기를 자르고, 무채를 썰고 다 익은 돼지고기를 얼음물에 담급니다. 마당에는 장독대가 있고 처마 밑에는 마늘과 고추를 말리고 있습니다. 주 선생은 닭장으로 가서 닭 한 마리를 잡아옵니다. 요리용인지 개구리도 몇 마리 기어 다니고 있습니다. 접시에는 청경채로 예쁘게 장식을 해놓고, 고기를 굽고 소스를 붓습니다. 닭을 집어넣은 자기 냄비에는 얇은 천을 덮습니다. 주 선생이 즐거운 표정으로 도마 위에 재료를 올려놓고 칼로 다질 때 그 사이로 수십 종의 칼이 보입니다. 요리사 주 선생의 삶이 그렇게 요약적으로 제시됩니다. 그는 숙달된 솜씨로 만두를 빚습니다. 화면에는 감독 리안이라는 자막이 뜹니다. <음식남녀>의 오프닝 씬은 이렇게 화려한 조리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됩니다.” <1994년 칸 영화제에서 본 리안 감독의 맛있는 영화 <음식남녀>(작성자 조르바) 내용 중 인용자 일부 수정>


인척 중에 영화의 주 선생에 필적할 만한 솜씨를 지닌 요리사가 한 사람 있다. 외국에서 사는 그 양반이 오랜만에 고국 여행을 와서 우리 집에서 장기 투숙하고 갔다. 영화에서도 비슷한 대사(“음식을 할 때처럼 재료가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가 나오지만, 별 재료도 없는 부엌에 들어가서 임기응변(臨機應變), 쾌도난마(快刀亂麻), 큰 어려움 없이 제법 먹을 만한 것들을 척척 만들어내는 것이 신통했다. 요리 전문가의 손기술을 가까이서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TV 화면으로 보던 것과는 또다른 느낌이다. 힘들이지 않고 반죽을 만들고, 썰고, 튀겨내는 것이 과연 능수능란(能手能爛), 보기에 좋았다. 시쳇말로 모양이 났다. 공부든 운동이든 요리든, 어디서든 전문가들은 늘 그렇게 쉽게, 보기 좋게, 모양을 낸다. 저 정도 보여주려면 얼마나 힘들게 익혔을까, 그런 염도 들었다(내가 평생 해 온 글쓰기와 칼쓰기에서 그 정도의 모양이 나는지 반성이 좀 되었다). 그걸 보니 욕심이 나서 두어 종목은 설명을 자세히 내려받아 적어놓고 차차 숙달시키기로 했다. 


육체 노동, 특히 손으로 하는 일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유리하다. 체력이 일단 남자 쪽이 더 강하다. ‘만드는 일-작업’에서 일관성 있는 주제가 관철되려면 일단 체력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만지는 감각도 남자 쪽이 조금 더 발달되어 있는 것 같다(이건 주관적 판단이다). 재료 간의 궁합이나 배합비율에도 남자 쪽이 좀더 분석적인 접근을 하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여자는 전체적인 것을, 한꺼번에 잘 파악하는데 능하다. 남자가 만지는 것에서 우위에 선다면 여자는 보는 것에서 우위를 점한다. 무엇이든 논리로 설명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그걸 우뇌와 좌뇌의 차이로 설명할지도 모르겠다. 요리도 예술이다. 예술을 하려면 일단 우뇌적 감각(감성) 기능이 발달되어 있어야 하겠지만, 좌뇌 없이 되는 ‘작품’은 없다. 모든 ‘만드는 일’의 기획자는 좌뇌다. 결국 양자가 고루 발달해야 좋은 요리사가 된다. 


각설하고, 이제 대세는 요리다. 언젠가 소설가 황석영 선생이 TV에 나와서(고정 패널이다) 자기도 작은 양식당을 하나 하고 싶은 게 꿈이다라고 말했다. 주택가 한 가운데 자리잡은 작고 소박한 양식당을 하나 내고 싶다고 했다(연세 생각은 안 하신다). 그래서 지금도 어디 가서 좋은 음식을 맛보면 화가 막 난단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자기가 꼭 해야 할 일을 남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용심(用心)이 나는 거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조만간에 소설가(전직)들이 내는 요리책도 수종 나오고, 여성 소설가가 아닌 남성 소설가가 내는 식당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길 것 같다. 문화(文化)의 끝이 결국 음식남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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