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교육의 방법
한 줄로 요약할 수만 있다면
「여기가 중학교 1학년 교실이라고 생각하고 학생들에게 왜 독서를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딱 한 말씀으로 요약해 주십시오.」
몇 분 선생님의 질문이 있고 나서 마지막으로 교장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음식이 사람의 몸을 만드는 것처럼, 독서는 사람의 정신을 만든다”라는 한 마디를 꼭 ‘마무리 밀씀’으로 듣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어느 사립 중학교의 교사 연수 행사에 강사로 초빙되어서 독서(지도)와 논술(지도)에 대해서 몇 말씀 드리던 자리에서였습니다. 두 시간의 강의가 한 순간에 원점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그 직전에,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섣부르게 ‘단정적인 한 마디’의 유혹에 빠지지 말자고, 독서교육에 한해서라도 그렇게 한 번 해 보자고, 간곡하게 당부를 드렸던 차였기에 더 그랬습니다.
한 때, 지역 중앙도서관에서 사회교육의 일환으로 개설한 <독서지도사> 양성과정을 맡아서 몇 년간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강의 초입에 저는 미리 ‘대못’을 확실하게 박아둡니다. 저에게 독서 지도의 어떤 변치 않는 규범이나 커리큘럼 같은 것을 배워서 그것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적용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당부합니다. 아이들에게 책읽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하나의 종합예술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만약 ‘완성된 기성품’으로서의 교수기술을 원한다면 나와 함께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방부제와 인공조미료가 가득 든 싸구려 가공식품을 아이들에게 아침저녁으로 줄창 먹이겠다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독서교육과 같이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세상에 하나뿐인 정신’을 다루는 영역에서는 그런 단편적이고 편의적이며 조급한 생각이 치명적인 함정이라고 강조합니다. 말만 가지고는 절대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덧붙여서, 집에서는 함부로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열심히 사는 곳이 집입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당부합니다. 밖에서 하나를 배워서 그것을 그대로 집에 가지고 가서 아이에게 ‘적용’하겠다는 생각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고 다짐을 놓습니다. 정히 ‘나만큼만 하면 된다’, '나만큼만 살아라'라는 생각이라면 그렇게 해도 좋겠지요. 그러나 나보다는 잘 살아라라고 생각한다면 아이를 가르치지 마십시오. 세상의 엄마 아빠 중에는 자식이 자기만큼만 되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 중에서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가르침이 필요 없는,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을 자식으로 두지 못한 이들은 거의 다 실패합니다. 왜 그럴까요? 깊이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부모가 자기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교사부터 책을 열심히 읽는 이가 되자고, 존재 그 자체가 가르침이 되자고 ‘필요충분할 만큼’ 떠든 상황에서 막판에 교장 선생님의 그런 ‘요약성 최종적인 한 말씀’을 요구받으니 적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한 말씀’들은 예외 없이 가짜라는 것을 두 시간에 걸쳐서 역설했는데 마지막에 가서 그런 요구를 받으니 달리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말로) 가르치지 말고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한석봉의 어머니가 불을 끄고 떡을 썬 일과, 맹자의 어머니가 경제적 손실을 무릅쓰고 세 번이나 이사를 간 사실까지 들어서 ‘알아듣게’ 설명을 했는데도 그렇게 굳이 또 ‘한 말씀의 요약’을 원하시니 참 곤란했습니다. ‘독서의 의의와 목표’와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좌중의 어른이신 교장선생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독서하지 않고서는 언제고 닥쳐 올 정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으며,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는 힘을 기르지 않고서는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의 삶에 관여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강의 내용에 없는 몇 마디 말씀을 첨언하는 수준에서, 얼버무리고 마쳤습니다.
한 말씀의 요약, 하나의 진리, 만물에 일관하는 하나의 설명의 존재를 바라는 것은 예나제나 순진한 이들의 전유물입니다. 지적 순진성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으로(그런 태도나 신념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도 수련에서도 그런 태도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하수(下手)들의 일반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분절적(分節的) 사고’입니다. ‘조급한 것’ 다음으로 많이 발견되는 일반적인 ‘하수의 표징’입니다. 하수들은 하나 들으면 하나 알고, 둘 들으면 둘만 압니다. 게슈탈트(Gestalt, 부분의 집합체로서가 아닌, 그 전체가 하나의 통합된 유기체로 된 것)와 같은 발상도 애당초 없습니다. ‘들어서 치라(검도에서)’고 주문하면 딱 그것만 합니다. ‘들어서 치려면 한 발 먼저 들어가야 한다’는 개념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작은 동작으로 툭탁거리며 ‘쥐 대가리 때리는’ 검도를 하지 말고 크게 움직이며 ‘단번에 소 목을 베는’ 검도를 해 보라고 주문하면 무턱대고 칼을 들고 뛰어듭니다. 대련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틈을 보고 단호하게 뛰어 들어가는 동작이 선행되어야만 크고 미려(美麗)한 기술이 가능한데 그런 ‘몸을 버리고 뛰어드는 용기’를 배양하지 않은 채, (맞지 않고) 오직 상대방을 타격할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으니 좋은 동작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피하고 막으며 한 대 때려 먹는 칼싸움’에만 몰두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자득(自得)의 묘를 깨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무엇이든 한 말씀으로 깨칠 수 있다면 도(道)라는 게 존재할 리도 없겠지요.
순진한 이들의 분절적 사고는 글쓰기 공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로 하는 공부만 해온 사람들은 글쓰기도 마치 컴퓨터가 해내는 일종의 기계적 정보처리 과정과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무엇을 집어넣으면 무엇이 나오는데, 이때 중앙 처리 과정은 이러저러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글쓰기 혹은 글 읽기의 발달과정은 기초(입문), 숙달(심화), 통달(응용)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것들의 세부적 단계와 구성적 절차는 이러저러하다고 말하기를 즐깁니다. 그런 공부는 ‘글쓰기’에 대한 ‘머리공부’는 되지만 ‘손(몸)공부’는 되지 못합니다. 많이 알지만, 잘 쓰지는 못하는, 고작 관념적(표상적) 지식에 머무는 것이거나 잘 되어도 ‘소 잡는 칼로 쥐 대가리나 때리는’ 비효율적인 글공부에 머무를 공산이 큽니다.
어디서든 분절적인 사고로는, ‘단번에 소 목을 베는’, 호쾌하고 미려한 기술을 터득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특히 글쓰기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복잡한 과정을 스스로 내장하고 있다는 것을, 글을 조금이라도 써본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래서 현재까지는, ‘글 읽고 저자 따라 쓰기(read-this-essay-and-do-what-the-author-did)’가 가장 효과적인 글쓰기 공부법입니다. 물론 자신이 몰두하고자 하는 장르의 선택이 먼저이겠지요. 소설을 쓰고 싶으면 소설가의 글을, 시를 쓰고 싶으면 시인의 글을, 학문을 하고 싶으면 학자의 글을 많이 읽고 그를 따라 써야 합니다. 통째로 눈치껏 그들을 답습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견물생심(見物生心, 스스로 생각을 일으키는 경지)’, 언젠가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내 ‘글 욕심’이 나옵니다.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견물생심’도 없이 그냥 튀어나오면 ‘소 목’은커녕 ‘쥐 대가리’도 베기가 힘듭니다. 고작 누구의 아류에 머문 꼴을 보일 뿐입니다. 통째로 눈치껏, 세상을 사랑하며 ‘역지사지(易地思之)’, 쓰고 싶은 글을 묵묵히 읽고 따라 쓰다 보면 길이 열립니다. 그 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