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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Oct 30. 2019

인생은 패자부활전

김주영의 달밤

달밤


내 용모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는 일생(一生)의 화두다. 남녀가 따로 없고, 노소에 차별이 없다. 흔히들 용모나 풍채가 좋은 사람을 두고 "인물이 좋다."라고 말한다. ‘인물’은 실제로 한 인간의 실존적, 역사적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인물'에 대한 평가는 첫인상이 90% 이상이다. 인물에 대한 그 인상비평적 결정이 나머지 여러 판단기준들을 조정한다. 그래서 혹자는 ‘내면의 아름다움’ 운운은 태생 못난 자들이나 하는 자위(自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든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 한 미(美)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미(美)의 통로는 눈(시각, 시야)이기 때문에 겉으로 나오지 않는 것은 결코 미(美)의 범주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젊을 때는 크게 관심두지 않던 부분인데 나이 들수록 공감이 간다. 말은 안 해도, 모든 이들이 다 그렇게, 적어도 무의식적으로는, 생각하는 것 같다. 이 또한 천지불인(天地不仁)이다.


다행인 것은 인간의 용모(容貌)나 풍채가 장소나 때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는 것이다. 밝은 장소 어두운 장소, 아침이나 저녁, 속이 시원하게 비워졌을 때와 변비로 고생할 때, 기쁠 때와 슬플 때, 우리의 표정이나 자태가 많이 다르다. 그래서 나는 과년한 딸에게 늘 강조한다. 아버지를 원망하지 마라. 여자에게는 표정이 전부다. 활짝 웃고(눈웃음!) 상대에게 집중해라. 밝게 살아라. 그러면 성공한다(네 엄마를 봐라).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정작 중요한 변인(變因)은 따로 있다. ‘콩깍지’나 ‘안경’이 동방불패다. 그런 것이 씌여진 자에게는 대충 막나가도 된다(그것도 네 엄마를 봐라). 무엇을 하든 다 좋게 봐주니까. 그것도 천지불인(天地不仁)이다.


나이 들면서도 용모가 변한다. 우선은 노화 현상으로 볼품이 없어진다. 피부에 탄력이 떨어지고 주름이 잡히면서, 표정도 어두워진다. 내면의 피부도 탄력을 잃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나이 드니까 오히려 얼굴이 보기 좋아졌다는 말을 듣는 이들도 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우리 집 식구들이 그렇다. 내 경우는 금방 답이 나온다. 젊을 때 워낙 사납게 살았던 터라,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마다, "많이 부드러워졌네, 오히려 지금이 낫다.", 그런 말을 자주 듣는다. 난생 처음, 춘원 이광수를 닮았다는 말까지 며칠 전에 들었다. 공격성이 많이 제거되었다는 말로 이해된다. 그래서 한술 더 떴다. 수염을 조금 길렀다. 그러니, ‘아주 그냥 죽여줘요’란다. 그래서 요즘은 수염을 깎고 싶어도 못 깎는다. 여자들은 잘 모르겠다. 집사람과 집아이는 내가 봐도 불가사의다. 점입가경(漸入佳境), 예측불허(豫測不許), 난공불락(難攻不落),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내가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너무 예뻐져서 못 알아봤다’고도 하고(집사람), 누가 자기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이목구비가 빚어내는 구도와 비율이 딱이냐’고 말하더라는 것이다(집아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생에는 언제나 패자부활전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패자 부활전, 말이 나와서 그쪽에서 한 번 생각을 해 보면, 소설은 늘 패자 부활전을 다룬다. 좋은 말로는 ‘문제적 개인(問題的 個人)’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 그들 중에는 소설 안에서 일생을 사는 이도 있고, 잠깐 소설 속으로 나들이를 나왔다가 돌아가는 이도 있다. 전자는 장편소설의 주인공이고, 후자는 단편 소설의 주인공이다. 보통 그들은, 좋은 소설이라면, 소설 속에서 한 번 변한다. 두 번 세 번은 시간 관계 상 좀 어렵다. 물론 안 변하고 그냥 제 모습으로 나대는 이들도 있다. 속칭 평면적 인물(납작한 놈들)인데 성격이 특별히 유별나면 모르되, 크게 재미를 주는 타입은 아니다. 스테레오 타입은 그 중에서도 가장 게으른 축에 속한다.

주인공이 소설 속에서 변한다는 것은 무언가 작가 쪽에서 독자 쪽으로 보낼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등장인물처럼 ‘너도 좀 변해라’라는 주문이다. 물론 뒷북을 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독자들은 이미 다 변해 있는데, 작가가 그제야 변화의 조짐을 읽고 ‘나는 변했다(변한다)’를 남발해 봐야 별 이득이나 재미를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작가들은 항상 독자보다 조금 일찍 변한다. 젊을 때 재미있게 읽은 소설 중 「달밤」(김주영)이라는 소설이 있다. 작가가 독자에게 ‘너도 좀 변해라’를 강조하는 소설이다.


「달밤」은 흔히 하는 말로 민중소설에 속한다. 민중들의 삶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고 그들의 삶이 좀더 나은 것으로 상향 조정되기를 바라고 요구하는 소설이다. 독자는 주인공 화자와 함께 탐색의 도정에 나서야 한다. 독자는 그가 안내하는 대로, 삶의 한 중요한 ‘비밀’을 발견한다. 물론 나 같은 미숙한 독자다. 경험의 구체성을 동반한 소재의 힘, 반전이 있는 구성의 힘, 주제의 건전성 같은 것이 돋보이는 수작(秀作)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문학성이 단순히 플롯에 의지하는 것만은 아니다. 플롯은 문학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적인 틀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 작품의 의미는 작가가 세상과 인간과 생활을 인식하는 그 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점은 화자의 관심의 변화에서 나타난다. 처음에 ‘나’는 단순한 화자였다. 무연탄 저탄장의 비밀을 밝혀내는 검수원일 뿐이다. 아마 독자들은 사건의 주인공이 정득수이거나 아니면 그 화냥기 있는 아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와서 주인공은 ‘나’로 바뀐다. 화자 주인공 소설이 되는 것이다. ‘나’는 여인네들의 ‘작업’에서 충격을 받으면서 소설 인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나’가 받은 충격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다. 그것은 단순히 세상살이 형편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드러나지 않은 그 어떤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화자가 독백투로 말했듯이 그것은 무용이었다. 한 밤중에 벌이는 그들의 노동은 전신으로 자기 삶을 표출해 내는 무용인 것이다."(현길언, 『소설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저탄장의 노무자들은 탄을 빼돌리고 거기다 그 무게만큼의 물을 쏟아붓는다. 그것은 ‘작은 사람들petites gens'이 기지를 발휘해 ‘큰 사람들’이 마음대로 그어놓은 생존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그들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나’는 그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띤 검수원이다. 그러나 탄이 줄어드는 까닭을 밝히기 위해 비리를 캐던 ‘나’는 오히려 달밤에 아낙네들이 하는 그 ‘작업’에서 아름다운 삶의 동작, ‘무용’을 본다. 저 역시 ‘작은 사람들’이며, 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건강한 삶의 아름다움, 민중으로 산다는 것의 그 깊고 깊은 의미에 눈뜨게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그 새로운 인식의 눈을 선사한 것은 정득수의 처다(그녀는 그 집단에서 ‘행실 나쁜’ 문제적 개인이다). 그녀는 눈치를 챈 ‘나’를 강가로 불러내 그녀에게 부여된(공동체가 부여한) ‘작업’을 성실히 완수한다. 몸으로 ‘나’를 매수한다. 그러한 작품 속의 맥락은 그녀를 공동체의 일체적인 연대감 속에서 그 존재성을 부여받는 ‘신성의 전문가(specialist of the sacred)’로 이해하게 만든다. ‘신성의 전문가’는 자신의 신열(ecstasy)을 집단공동체의 문화적 갱신을 위해 활용한다. 정득수의 처는 자신이 지닌 신열, 곧 ‘에로티즘’으로 집단공동체의 위기를 막아낸다.(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는, 남도 소리꾼 일가가 자연친화적 예술행위를 통해 환경과의 화해를 이루어낸다는 파블라(선학동 주민들은 이들의 예술행위에 의지해 공동체 위기를 넘어선다)를 보여주는데 그들도 ‘신성의 전문가’라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나’는 자신이 이미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것을 알고 사표를 내지만, 소설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의 백미는 마지막의 반전이다. 그녀의 역할이 ‘나’에게 비로소 명료하게 파악되는 그 부분,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 ‘너희도 변해라’라는 요구의 진면목, ‘이 양반, 나한테 재미붙였는가봐’, 그 한마디로 이 소설은 어쩔 수 없이 명불허전(名不虛傳), 우리시대의 수작(秀作)이 되고 만다.


"어느날 누가 다시 내 목덜미를 가만히 잡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예전처럼 내게 <저리로 갑시다>라고 말하진 않았다. 그녀는 내 등을 툭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양반, 나한테 재미붙였는가봐.」
여자는 입술을 실쭉하며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러나 난 사표를 내던진 것을 결코 후회하진 않았다. 나는 저탄장으로 올라가는 여자의 건강한 두 어깨와 다리와 팔을 한참이나 어둠 속에서 쳐다보며 서 있었다. 또 달이 뜰 것이었다."(김주영, 「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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