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운명과 형식
젖어미의 추억
중국 시인 애청의 서사시 「대언하-나의 유모」와 이양하의 수필 「나의 어머님」을 비교하고 있는 김윤식 교수의 글(「운명과 형식」)이 보기드문 책읽기의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인간애와 문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젖어미’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을 한 사람은 서사시로, 또 한 사람은 에세이로 그렇게 애절하게 형상화해낼 수밖에 없었던 소이가 상세히 밝혀지는 가운데 우리가 왜 서로를 사랑하고 또 문학을 할 수밖에 없는지도 절로 깨닫게 하는 글입니다. 비평도 엄연한 예술일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글이라 하겠습니다.
‘젖어미’는 젖어머니의 낯춤말인데 그 사전적 의미는 ‘남의 아이에게 그 어머니를 대신하여 일정한 동안 젖을 먹여 키우는 어머니’입니다. 유모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어머니의 모든 역할을 대신하는 ‘기간제’ 어머니입니다. 그 기간 동안 아이는 젖어미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랍니다. 가난하지만 성정이 바르고, 그 무렵 아이를 낳고 젖이 풍부한 아낙을 골라 젖어미를 삼습니다. 젖자식에게는 그 기간이 모정(母情)을 체득하는 유아, 유년기에 해당되기 때문에 당연히 젖어미는, 유모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진짜를 능가하는 가짜 어머니가 됩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짜’로 몰아세우고 오직 혼자만 ‘진짜’로 살아남는, 가짜이면서도 엄연한 진실인, 불패의 어머니가 됩니다. 보통 친어머니가 건강이 나빠 직접 키울 수 없는 상황에서나, 아니면 어떤 주술적인 믿음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젖자식들이었으므로, 친어머니를 대신해 지극정성으로 자신을 키워준 젖어미는 이미 그 자체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불패의’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그들에게는 젖어미가 곧 최초의 어머니이며 동시에 영원한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누추하고 가난한 살림살이였지만 언제나 자식에게는 헌신적이었던, 그 안락하고 완전했던 최초의 우주가 가짜였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은 젖자식에게는 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젖자식이 귀환하는 날은 온 동네의 볼거리였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습니다. 당일로 모자 이별이 성수(成遂)되지 못해 며칠씩 그 눈물의 행사가 연장되는 경우도 허다했답니다. 그런 연유로 젖어미 젖아비가 돌아가시면 그 젖자식은 엄연한 상주로 상복을 입습니다. 성씨가 달라도 엄연히 상주의 자격으로 조문객을 받습니다. 예전에는 적어도 일년 동안은 복을 입게 했다고도 합니다. 그 젖어미를 소재로 쓴 글들이 중국 시인 애청의 「대언하-나의 유모」와 이양하의 「나의 어머님」이고 그 글들에 숨겨진 내밀스런 문학적 원리들을 탐구하고 있는 것이 김윤식 교수의 「운명과 형식」이라는 글입니다.
이 글이 주는 감동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애청과 이양하의 ‘젖어미 경험’이 보여주는 차별성을 ‘혼과 형식’이라는 일반론적 논리로 치환해 내는 글쓴이의 깊은 사고력과 예리한 감수성에 대한 감복이라면, 다른 하나는 ‘젖어미’라는 개별적인 그리움의 실체가 이 글 속에서, 글쓴이의 삶과 예술에 대한 통찰에 힘입어, 일종의 심볼리즘 속으로 편입되면서, 이른바 형이상학적 의미로 전이되는 것을 보는 즐거움입니다. 저에게는 뒤의 것이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지니고 있는 어떤 ‘원천적인 외로움이나 그리움’에 대한, 선견자(先見者)로서 베푸는, 선생의 자상한 설명이 우선 좋았습니다. 한편으론 그런 외로움이나 그리움을 문학을 통해 승화시키려고 애쓰는 인간정신(영혼)에 대한 선생의 깊은 애정도 감동적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나 읽는 것이나(무엇을 보고 느끼든), 인간의 모든 문자행위는 결국 자기 동일성의 주제(identity theme)를 한 줄씩 써나가는 일입니다. 진정한 삶이 있는 한 우리는 그런 ‘써 나가는 자의 운명’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쓸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이을 것인가, 정체성 서사의 내용과 형식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최초의 출발점, 그 로코보코, 내 마음의 ‘젖어미’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실재이면서 실재를 능가하고, 실체이면서도 애써 부재화될 수밖에 없는,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더 그리운 모성(母性)으로 각인되는, ‘젖어미’의 의미와 가치는 그렇게 일반화된 논리로 확장됩니다. 애청이나 이양하라는 한 개별적 인간들의 그리움의 실체로만, 그들만의 문학적 감수성의 원천으로만 한정되기에는 너무 그 의미와 가치가 중합니다. 젖을 떼고 본가(本家)로 귀환하면서 부득이 겪어야 했던 고통스런 세계분리의 경험이 어찌 그들 젖자식들만의 고통이었겠습니까? 가짜였지만 진짜보다도 더 절실한 모성의 실체, 그 어머니(젖어미)의 품을 떠나 낯설고 공포스러운 세계로 내던져질 때의 그 아득함, 그 아득함이 어찌 그들 젖자식들만의 전유물에 그치겠습니까? 그만큼 깊어가는 ‘젖어미’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이 어찌 그들만의 안타까움이겠습니까? 물론 용심(用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용심이 결국 문학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세상 모든 ‘젖자식’들의 ‘젖어미’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은 그래서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존재론적인 귀소(歸巢)를 향한 우리의 애타는 그리움이 지상의 것으로 엄존하는 한, ‘젖어미’는 영원한 문학(글쓰기)의 원형(原型)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