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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Nov 11. 2019

양선규의 글쓰기 특강

화이부동 (1), (2)

양선규의 글쓰기 특강


<목차>

화이부동(和而不同), 맥락을 살리는 글쓰기  

군자불기(君子不器), 여운을 남기는 글쓰기  

마부작침(磨斧作針), 후회 없는 글쓰기    

용상봉무(龍翔鳳舞), 자기를 확장하는 글쓰기

역지사지(易地思之), 두루 통하는 글쓰기


1. 화이부동(和而不同), 맥락을 살리는 글쓰기  

 

설명, 묘사, 서사, 논증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이루어진 상태라면 그 다음 단계로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바로 ‘맥락’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모든 글쓰기는 맥락에서 ‘뜨고’ 맥락에서 ‘진다’. ‘뜨고, 진다’라는 표현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의미가 존재한다. 글이 탄력을 받아서 잘 쓰여질 수가 있는가 없는가. 또 좋은 글로 평가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 그런 이중적 의미가 그 말 안에 있다. 맥락이 제대로 형성되면 글쓰기는 작가의 손을 떠나서 굉장한 탄력을 받는다. 문장이 문장을 불러오는 용상봉무(龍翔鳳舞,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춤)의 의사(疑似) 자동기술적 형상을 보인다. 그렇지 못하고 맥락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오리무중이면 각 문장들이 풍비박산(風飛雹散, 사방으로 날아 흩어짐)의 꼴을 보이며 결국 자멸하고 만다. 모든 것이 맥락에 달려 있다. 모든 것이 맥락 안에 있다. 맥락을 살려서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는지 하나씩 살펴보는 것이 이 장(章)의 목표다.

 

1) 결이 있는 글쓰기


연암은 그의 글쓰기 병법론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 적국 한가운데에 내 깃발을 꽂는다)’에서 글에는 모름지기 ‘결’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글에는 글 전체를 타고 흐르는 어떤 흐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있어야 그 흐름 안에서 서로 다른 요소들이 하나로 뭉쳐서 소기의 의미를 제대로 생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령 카스테라를 만들고 싶다면 밀가루와 물과 버터와 계란을 최적의 비율로 섞어야 하는데 그 ‘최적의 비율’이 ‘글의 결’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그 ‘최적의 비율’만으로 카스테라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재료에 새로운 성질을 부여하는 적당한 숙성의 시간과 강력한 불기운도 있어야 한다. 글쓰기에서는 작가의 사람됨이 숙성의 시간이 되고, 작가의 의지와 정열, 그리고 창의(創意)가 불기운 역할을 한다. 그 모든 것이 모이고 합쳐지고 가열될 때 인생에 유익한 새로운 생산이 이루어진다. 카스테라라는 맛난 빵을 만드는 과정이나 정신(영혼)의 양식이 되는 좋을 글을 써내는 과정이 그 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빵이나 글이나, 유익한 새로운 것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원재료가 가진 성질을 버리고(숙성되고) 다른 것들과 최적의 비율 안에서 서로 섞인 상태에서 가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쓰기가 단순하게 ‘머리에서 손으로 내려오는’ 과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 쓰는 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승부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도도하고 약동하는 결이 있는 글쓰기, 하나의 큰 맥락 속에서 글의 소재들이 서로 다르지만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글쓰기가 가능하려면 어떤 학습과 수련이 필요할까? 평범한 일상적 소재를 사용해서 가볍지 않은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는 글을 한 편 점검하면서 그 물음에 답을 구해 보자.   

 

원래 그런 것들 - <뜨거운 것이 좋아>, <취화선


곰 TV 무료영화 보기에 재미가 붙었다. 며칠 전에는 <뜨거운 것이 좋아>(권칠인, 2008)를 봤다. 오늘은 <취화선>(임권택, 2002)이다. <뜨거운 것이 좋아>는 내 영화 취향의 맹점(盲點)을 확실하게 보여준 영화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만약 유료로 보라고 했다면 절대로 안 볼 영화다. 내 청소년 취향의 영화관(映畵館) 안에서는 유료로는 상영불가 판정을 받을 소재의 영화다. 멜로는 내 취향이 아니다. TV 드라마도 그런 류의 것은 아예 안 본다. 그래서 김수현 드라마는 늘 내게 홀대받는다. 다른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다. 현실이 맨얼굴로 등장하는 걸 ‘두고 보지’ 못한다. 영화든 드라마든 내가 리얼리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그 이유뿐이다. 특히 남녀상열지사를 리얼하게 묘사하는 리얼리즘 영화는 최우선 기피대상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런 영화를 돈 주고 본 적이 거의 없고 그런 영화를 대상으로 한 영화 이야기도 내게는 거의 없다(내 영화이야기를 몇 편 읽어본 독자는 이해하실 거다). 그러니까 <뜨거운 것이 좋아>는 아주 예외적인 영화다. 내 관심 목록에 들어온 최초의 리얼리즘 멜로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저 심드렁히, 정말 할 일이 없어 본 이 영화가 의외로 재미있었다. 초기의 감정이입 단계에서 약간의 인내심 혹은 버퍼링(?)이 필요했지만, 큰 어려움이 없이 이내 몰입이 되었다. 감독의 시야가 투명했다. 투수로 치면 정통파 투수였다. 에로티즘을 전경화해서 세 여자의 정체성 서사를 정공법으로 다루고 있었다. 이를테면 특별한 목적 없이 사는 여자의 삶에서 의미 있는 게 무엇인가? 에로티즘은 그 자체로 혹은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가? 세대를 달리하는 가족 내적 여자들에게 서로는 어떤 의미인가? 등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었다. 소년기 동성애, 젊은 날의 사랑과 야망, 기약 없는 중년의 불꽃놀이(그렇다고 불장난은 아니다) 등, 사랑을 둘러싼 청소년기, 결혼 적령기, 만추(晩秋)기의 여성 심리의 디테일이 꼼꼼하게 묘사되고 있었다. 다만 너무 리얼리스틱한 것들이 오히려 영화에서는 극적 몰입을 방해하는 수도 있다는 걸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영화는 영화의 틀 안에서 기승전결을 보여주는 게 관객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몰입도를 높일 수 있는 방편이 된다는 것을 감독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쑥불쑥 내 현실의 기억들이 영화에 개입해서 몰입의 연결을 끊어버리는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예쁜 영화였다. 무엇보다도 김민희와 안소희의 연기가 예뻤다. 연기 안에서 예쁜 배우가 진짜 예쁜 배우다라는 걸 실감했다.

<취화선>(임권택, 2002)은 수 년 전에 TV로 일부 본 적이 있었지만, 전편을 감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용은 장승업의 일대기다.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은 호방한 필묵법과 정교한 묘사력으로 19세기말의 조선화단을 풍성하게 만든 화가였다. 그의 오원(吾園)이란 아호는 100년 앞선 조선최고의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와 혜원(蕙園) 신윤복처럼, “나도[吾] 원(園)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고아로 자라 어려서부터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화재(畵才)에 뛰어났고 술과 색을 몹시 탐했다고 전한다. 전하는 것에 비해서 영화에 묘사된 주인공의 일대기는 때로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밋밋했다. 관객의 시선(심미안)을 좀 낮게 잡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특히 최민식의 ‘최민식 다운’ 연기 때문에 더 식상한 느낌을 주었다. 장승업의 일대기가 아니라 최배우의 일대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재미가 있었다. 순전히 영상미 덕분이었다. 대단한 영상미가 최민식을 집어삼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한 폭의 대단한 그림이었다. 망발이라는 말을 들을 지도 모르겠지만,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오원의 그림이 오히려 제일 못한 그림이었다. 대단한 화가 이야기니 영상미 쪽에서도 대단해야 되겠다는 감독의 욕심과 노심초사가 화면 곳곳에서 배어나왔다. 미(美)든 색(色)이든, 악(樂)이든 화(畵)든, 오기(傲氣)든 절망(絶望)이든, 무엇이든 지상에 내려온 그것들의 지극한 모습을 보이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화면 곳곳에서 확인이 되었다. 그런 지극한 것에 대한 헌신은 어디서나 누선(淚腺)을 자극하는 법이다. 이 영화도 그랬다. 보는 것만으로도 코끝이 찡할 때가 많았다. “그림 보는 자들은 자기들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최민식의 음성으로 듣는 오원의 말(상투적인 대사)도 이상하게 코끝을 찡하게 했다. 아마 40년 가까운 문필생활 동안, 내 글을 끝내 속속들이 읽어내지 못하는(읽어주지 않는) 야속한 독자들에 대한 시골문사의 원망이 그렇게 투사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특히 마지막의 입화자소(入火自燒, 불 속에 들어가 자신을 태움) 장면, 오원이 우정 도공(陶工)을 찾아가 신분을 감추고 그의 작업을 돕다가(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다가) 끝내 불구덩이 속으로 자기 몸을 집어넣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도 내 책상 위에 걸려 있는 ‘입화자소(入火自燒)’를 그렇게 영화 속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흔 살 이후로 나는 그 글귀를 항상 내 앞에 두고 살아왔다. 내 몸을 불살라야 한다고 누누이 되뇌며 살아왔다. 그것을 그림으로 마주하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 무릇 모든 예술은 그 자체로 에로티즘이다. 그러니 최고의 에로티즘은 예술 속의 에로티즘이다. 영화 속에 요소요소 배치되어 있는 도저한 도색(桃色)도 충분히 좋았다. 그런 면에서 <취화선>도 또 한 편의 <뜨거운 것이 좋아>였다. 

사족 한 마디. 지금은 서른 살 청년이 된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는 나나 아이나 유일한 취미가 비디오 감상이었다. 아버지가 비디오를 빌리러 가면 으레 따라와서 자기 볼 것도 챙겨서 갔다. 하루는 아이가 비디오테이프 <드래곤볼>을 빌려서는 텔레비전을 코앞에 두고 세상모른 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뒤로 물려놓으면 어느새 또 그렇게 다가앉아서 보곤 했다(결국 나중에 라식 수술을 했다). 아들을 TV에서 떼어놓으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부지불식, 극 중 주인공 손오공의 아버지 이름도 손오반이고, 손오공의 아들 이름도 손오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코흘리개 아들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이름하고 손자 이름이 어떻게 똑같냐?”

그러자 아들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큼 대답했다.

“원래 그래요!”

아이는 별걸 가지고 다 시비를 건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시작부터 그랬는데, 또 만화인데, 그 정도야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런 어투였다. 작가가 이미 그렇게 지어서 내 놓은 일을 우리가 어떻게 왈가왈부 할 수 있겠는가? 또 이 이야기 자체가 판타지인데 그런 네이밍 하나를 두고 시비 걸 일이 아니지 않는가? 아니면, 그렇게 유전되는 게 인생 아니겠는가?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물론 이건 내 생각이다).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겠지만, ‘원래 그런 것’을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중요할 때가 많다. <뜨거운 것이 좋아>를 보고난 후의 내 심정이 그렇다. 연애의 리얼리즘을 싫어하는 콤플렉스도 빨리 벗어던져야겠다. 내 연애가 볼품이 없었다고 해서 남의 연애도 보기 싫어한다면 결국 ‘중딩 입맛’밖에 남는 게 없게 된다. 그런 것들을 다 빼고 볼 거라곤 결국 <도깨비> 같은 황당 연애나 <추적자> 같은 황당 정치나 <왕이 된 남자> 같은 황당 역사 패러디나 <미스터 션샤인> 같은 기타 활극들뿐 아닌가?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모두 다 황당한 것들뿐이다. 그렇게 황당하게 살아도 될까? ‘원래 그런 것들’에게도 좀 더 다정한 시선을 보내야 진짜 ‘입화자소’에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설 수 있는 게 아닐까?

 

위의 예시문 <원래 그런 것들 - 뜨거운 것이 좋아, 취화선>에는 세 개의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뜨거운 것이 좋아>, <취화선>, 두 영화의 내용과 그것을 본 소감, 그리고 애니메이션 <드래곤 볼>에 얽힌 집아이와의 추억담이 그것이다. 영화감상문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 세 편의 에피소드가 ‘따로 또 같이’ 잘 어울리고 있다. <뜨거운 것이 좋아> 편(篇)에서는 연애의 리얼리즘을 여자(각 세대에 걸친)의 입장에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일급 멜로 영화의 이모저모를 상찬하고 있다. <취화선> 편에서는 영화를 빌어 예술론을 펼치려는 욕심을 낸다. ‘입화자소’라는 좌우명을 영화에 대입해서 ‘장승업-임권택-필자’를 예술가의 일생이라는 관점에서 한 줄로 엮으려고 시도한다. 마지막 <드래곤볼> 편에서는 “원래 그런 것들을 존중하자.”를 강조한다.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오늘 내가 한 행위의 역사적 의미를 명심하자.”라고 말하고 있다. 원래부터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 후대(後代)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예시문 속의 세 개의 에피소드는 각기 자신의 형(形)과 색(色)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전체의 맥락 속에서 잘 어울리고 있다. 일종의 변증법적 정반합(正反合)의 관계 속에서 이 글 특유의 결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리얼리즘 연애 영화나 드라마에는 통 취미가 없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뜨거운 것이 좋아>라는 영화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의 편견에 약간의 금이 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취화선>을 보게 되는데 오원 장승업이 마지막 자신의 몸을 바쳐 예술을 완성하는 장면에서 ‘입화자소’라는 자신의 좌우명을 연상되면서 격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의 정면충돌을 자기 안에서 경험하면서 필자는 옛날의 기억을 되살린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두 편의 영화를 본 소감을 확장해서 ‘원래 그런 것’, 혹은 반복적 일상과 관습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역사적 실천의 중요성에 대해서 새로이 각성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영화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자기반성으로 이어지는 글쓰기의 결이 돋보이는 글이라 할 것이다.” 


2) 코드와 맥락 혹은 오해와 편견


맥락(脈絡, context)이라는 말을 연암이 말한 ‘결’이 대신하거나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비슷한 내포를 지니고 있는 말이라는 건 확실하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글의 ‘결’은 글을 쓰는 이의 기상(氣像)이나 윤리 감각, 인간으로서의 품성, 사회적 실천 의지 등등에 따라 천차만별의 형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맥락이라는 말에는 그런 글 쓰는 이의 내적 요소에 대한 고려가 충분치 않다. 그런 요소보다는 글이 탄생하는 상황이나 환경, 글의 표층구조 아래에 놓여 있는 사회 역사적 배경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큰 개념이다. 그런 전제 위에서, 글에는 ‘결’이 있어야 한다는 연암의 말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맥락을 살리는 글쓰기’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맥락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된 하나의 계기를 제공한 로만 야콥슨의 의사소통의 도식부터 일별해 보자.


                                  맥락(context)

                                  접촉(contact)

화자(speaker)------------------메시지(message) ------------------청자(hearer)

                                  코드(cord)   


야콥슨은 의사가 전달되는 데에는(의미가 재생산 되는 데에는) 여섯 가지 정도의 변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화자, 청자, 맥락, 접촉(접속), 메시지, 코드(문법)가 그것이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맥락(환경)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가 말한 맥락이라는 개념은 사실 나머지 다섯 가지 요소들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었다. 좁은 개념으로는 발화가 이루어지는 ‘사회 역사적 환경’이지만 그 개념을 조금 넓히면 발화가 이루어지는 모든 환경이 다 맥락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특정의 화자와 청자, 특정의 접촉과 코드가 사용되는 것 자체가 다 맥락적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맥락이라는 개념은 포괄적이고 모호한 개념이다. 만약 ‘화자 맥락’, ‘청자 맥락’이라는 말을 쓰는 이가 있다면 이는 야콥슨이 말한 맥락 개념을 정 반대로 사용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맥락을 접촉, 메시지, 코드 등과 일렬로 나열하지 않고 일렬로 나열되면서 동시에 나머지 다섯 요소들을 크게 감싸고 있는 개념으로 그리기도 한다.

그리고 야콥슨이 제시한 의사소통의 도식(여섯 변수를 특정한)은 편의상 만든 그림이기 때문에 이해만 하고 그 그림에 따른 제3의 ‘독서의 이론’이나 ‘작문의 이론’을 만들어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화자와 청자는 각각의 고유한(변화막측하고 예단하기 어려운) 심리적 주체이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서 전달되는 메시지에는 접촉의 방식이나 공유하는 코드(문법체계), 그리고 두 주체의 사회역사적 환경에 의한 변수 이외에도 극도로 불투명한 심리적 요인이 이미 개입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불투명한 내적 요소들의 상호텍스트성은 우리의 언어가 포착해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화자 중심(심리비평), 청자 중심(수용미학), 메시지 중심(형식주의 비평), 코드 중심(신비평), 맥락 중심(사회역사적 비평), 접촉 중심(소통 미학) 등으로 나누어서 미학적 소견(소위 비평이론)이나 교육적 소견(주로 읽기, 쓰기에 대한)을 정립하는 것은 사실상 별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글을 쓸 때 가장, 혹은 유일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포괄적이고 모호한 개념이지만 맥락 하나뿐이다. 당연히 이때의 ‘맥락’은 각 요소의 상호 작용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글 밖의 맥락과 글 안의 맥락을 잘 궁구(窮究)해서 내 글쓰기에 잘 활용해야 한다. 글쓰기에 사용되는 각 소재들의 불화를 다독여서 그것들이 협화(協和)할 수 있도록 묶어주는 안팎의 맥락을 잘 찾아내어서 독자의 불신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설득의 논리를 개발하는 게 글 쓰는 자의 급선무다. 그 다음 적절한 비유(은유와 환유, 특히 환유)를 제시하여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하면 독자를 완벽하게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 거기다가 주제적 측면에서 대의와 명분을 내세울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독자가 내 편이 되어서 함께 싸움터에 나갈 수 있도록 독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확립)-논리(개발)-수사(공감)-명분(독려)’의 예시가 될 수 있는 글을 한 편 살펴보도록 하자. 한 종교 서적에 대한 짧은 독후감이다.


원수와 이웃행동하는 예수


기독교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일 것입니다. 그 말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저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사랑’보다 ‘원수’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 제게는 ‘원수’라 할 만한 존재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나이에 스스로 만든 ‘원수’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저 ‘미운 놈’ 한두 명 정도가 있을 뿐이었습니다(동네 골목에서 돈 자랑하는 심술쟁이 친구가 한 명, 학교에서 힘자랑하며 공연히 아이들을 괴롭히는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해 듣고는 내 ‘원수’가 누군지 곰곰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단 ‘도마렛(서라)!’을 외치는 왜놈 순사들을 꼽았고(당시 즐겨 보던 만화에 그런 장면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공산당과 김일성 도당을 꼽았고(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그 다음엔 중공군, 그 다음엔 도둑놈(당시에는 도둑맞는 일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그렇게 ‘원수’들을 정해 나갔습니다. 모두 저와는 직접적인 원한이 없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 말이 진정한 호소력을 가지게 되는 것 즉, 제 개인적인 ‘원수’가 생기게 되는 것은 아주 오랜 뒤였습니다. 10년에 한 명 정도? 그렇게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이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원수들은 멋대로 저를 괴롭히다가 돌연 홀연히 사라지기도 하고(멀리 새 직장을 찾아가기도 하고 혹은 병들어 죽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끈끈이주걱처럼 제 곁에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감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드니 다 희미해졌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과연 제게 ‘용서할 수 없는 자’가 존재하는지 저 자신도 궁금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혹시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을 애초에 듣지 못했다면 이런 상황이 도래하지도 않았을 줄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기도 합니다. 그 반대 생각도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제가 그런 말을 애당초 들은 일이 없었다면  ‘원수’ 자체가 안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라는 엉뚱한 생각도 간혹 들기도 합니다. 

그 비슷한 일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말씀에서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이웃’이라는 말이 그렇게 ‘살가운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나서부터는 ‘이웃’은 결코 남이 아닐 것이라는 이상한 신념 같은 것이 제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언젠가 토플러의 말을 빌려서 “네 이웃이 곧 세계다.”라는 말을 전한 적도 있습니다만(사고는 글로벌(global)하게 하고 실천은 지역적(local)으로 하자고 어느 글에서 쓴 적이 있습니다), 기실 토플러의 그런 주장도 그 기원을 찾아가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두 말씀 다 “사랑하라”라는 술부가 중요한 말씀인데 이상하게도 삐딱하게 그 목적어들에 더 꽂히는 제 심보가 좀 얄밉습니다. 아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지 못한 탓이 아닌가 여깁니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2% 부족하게 타고난 것 같습니다.


...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을까’라는 루터 식 고뇌를 예수는 하지 않은 것 같다. ‘내 삶으로 인해 내 이웃의 삶이, 특히 가난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라고 예수는 고뇌한 것 같다. 이웃 종교인 불교나 도교 역시 이웃사랑을 강조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러나 니체에게 인간의 약함과 위선일 뿐이다. 독일 작가 하이네(Heine)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만일 하느님께서 나를 행복하게 하시려면, 내 원수 예닐곱을 나무에 못 박는 기쁨을 내게 주시기를… 인간은 그 원수를 사랑해야 하지만 원수들이 나무에 못 박히기 전에는 안 된다.” 하이네의 심정이 우리 심정이리라. 원수 사랑이 그리 쉬울까. 원수를 사랑함은 하느님의 완전함에 다가서는 행동이다. 하느님 사랑을 깊이 느끼지 못한 사람은 이웃 개념을 확장하기 어렵다. 하느님 사랑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성 노동자 여성도 세리도 박해하는 사람도 모두 이웃이 된다. 원수 사랑이 어렵다면 우선 이웃 개념을 넓힐 필요가 있겠다.[김근수, 『행동하는 예수』, 메디치, 2014] 


종교는 인생의 필수 모티프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을 자유 모티프로 여기는 있겠지요. 그러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교를 믿어야 합니다. 종교는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이유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랑’은 ‘자기만 사랑하는 것’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되면 이웃사랑도 원수 사랑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종교를 ‘아편’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종교를 싫어하는 까닭은 사실은 종교 그 자체가 싫어서라기보다는 종교를 믿는(운영하는) 사람들의 못나고 못된 삶의 태도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디 자기 사랑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인데 불가능한 실천을 강조하면서 인간에게 자기를 기만할 기회와 빌미를 종교가 주는 것에 불만이 많은 것이지요. 정작 싸워서 깨부숴야 하는 적을 앞에 두고도 엉뚱한 논리를 앞세워 도피하게 한다고 그들은 종교를 나무랍니다. 우리가 기복신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기적인 ‘자기 사랑’은 ‘아편’이 맞습니다. 공동체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보기에는 곱지만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독버섯과 같은 것이겠고요. 기복신앙에 치우쳐서 죄의식 없는 ‘바람(願望)’과 사랑 없는 ‘기원(祈願)’만을 일삼는 일부 신앙 공동체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마비된 이성’에 동정심마저 생깁니다. 그러나 제 삶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저 역시 그런 태도를 취하곤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그런 ‘가난한 마음’을 마냥 탓할 수만도 없습니다. 저라고 떳떳한 신앙인이라고(이었다고) 말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에도 이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고통이 있을 때만 유독 신심(信心)이 돋았습니다. 몸이 지독하게 아플 때, 아니면 모함을 받거나 사기를 당해서 사회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만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제 이성을 마비시키고 눈물을 돋게 했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그때그때 조금씩 반성적인 태도로 독후감을 써 본다는 것이 도를 넘겨서 주제넘은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보지 마시고, 제 글도 그저 ‘못난 이웃의 하소연’ 정도로 여기시고 부디 내치지 않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참, 이 글을 쓰면서 보는 오늘 <한국인의 밥상>은 사람을 많이 울리네요. 거제와 마산, 해녀 어머니와 해녀 딸, 두 사람을 이어주는 ‘어머니의 바다’와 미더덕 미역국 이야깁니다. 저에게도 그쪽 바다가 어머니의 바다였던 관계로 유독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이제 마산의 오동동도 나오네요. 옛날 제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신세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 고개 숙인 길가 풍경들이 그대로 남아 있군요.


예시문의 필자는 “사랑하라,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세상 끝날까지.”라고 말한다. 그 말을 하려고 애써 기독교라는 종교를 우회한다. 무언가 권위 있는 ‘말씀’을 가져다 자기 속을 얹어야 독자들에게 좀 더 쉬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예시(例示)’가 될 수 있는 것은 주지(主旨, 필자가 하고 싶은 말)보다 권위가 있거나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성경 말씀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 성경 말씀에 대한 자신의 소감과 성서학자의 주석(인용된 글)을 은근 마주 보게 세워서 독자로 하여금 과연 우리 인생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가치인가를 음미해 보도록 권장하고 있다. 

예시문 <원수와 이웃>에서 다루지 않는 것은 ‘원수’와 ‘이웃’의 관계다. 혐오하는 이웃이 원수인지, 원수도 이웃이 될 수 있는지, 이웃과 원수는 어떻게 구분될 수 있고 또 구분될 수 없는지 등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목적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술어(술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그 단어들에 대한 필자 자신의 느낌만 이야기하고 그 단어들이 예수의 어록 속에서 어떤 상호텍스트성을 지니는지에 대해서도 일절 말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들이 공연히 ‘이성’의 발동을 부추겨서 ‘사랑’의 실천이 이성을 뛰어넘는 그 어디쯤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또 다시 망각하게 만들지나 않을까하는 노파심에서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라”라는 술부가 중요한 말인데 이상하게도 삐딱하게 그 목적어에 꽂히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라는 필자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읽혀야 한다. 이성적인 사유에 매몰되지 말고, 목적어에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사랑하는 일’에만 몰두하라는 주지를 담고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예시문 <원수와 이웃>이라는 글의 ‘결’은 종교적인 그 무엇이다. 사랑의 방법과 효능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종교적 화법을 충실히 답습한다. 글 속의 모든 화제들이 그 ‘결’을 따라서 한 줄로 들고 난다. 왜 우리는 그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렇게 그들 ‘결에 꿰인 글감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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