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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28. 2019

악이란 무엇인가

양들의 침묵, 동방불패

악이란 무엇인가, 양들의 침묵과 동방불패

     

악(惡)이란 무엇인가? 누군가 말했다. "회의 없는 신념이다." 요즘 들어 그 말이 자주 생각난다. 신념을 내세우는 자들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감추는 자들에게 연민의 정이 간다. 가급적이면 회의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일에는 철저하게 그 입장을 고수한다. 나와 내 가족에게 닥치는 축복이나 위험이 아니면 다 회의(懷疑)한다. 그게 편하다. 그게 내 신념이다. 늙은 나만 그런가 싶었는데 여기저기 그런 친구들이 꽤 많이 보인다. 나만 몰랐나?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젊은 층에서도 그런 ‘방관과 회의의 신념’의 지지자가 점차 느는 것 같다. 그때그때의 상황만 본다. 때로는 ‘순간 이동’ 하듯이 여론의 향배를 탄다. 네티즌의 부화뇌동이 더 그런 세태를 만든다. 어쨌든, 이제 악(惡)을 내용으로 판단하던 시대는 갔다. 오직 태도(악인(惡人)다운가?)나 형식(악랄(惡辣)한가?)만으로 그것의 악성(惡性)을 판단하는 시대가 왔다. 무엇을 실행하든, 태도나 형식에서 비인화(非人化)만 범하지 않으면, 적어도 필요악으로서의 존재의의만 인정되면, 결코 악(惡)으로 몰리는 일은 이제 없다. 그런 세태 변화의 전주곡이 영화 『양들의 침묵』(조나단 드미, 1991)이다.

     

...FBI요원 스탈링(조디 포스터)은 몸집이 비대한 여자들의 살을 도려내는 변태살인자를 추적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는다. 스탈링은 사건 해결의 단서를 얻기 위해 행동과학실장 잭 크로포트(스콧 글렌)의 지시를 받고 인육을 먹은 죄로 감옥에 수감된 정신과 의사 렉터 박사(안소니 홉킨스)를 찾아간다. 렉터는 자신을 찾아온 풋내기 견습 수사관 스탈링에게서 자신의 아니마를 찾고, 스탈링은 그런 렉터에게서 어릴 때 상실한 전능한 부상(父像)을 찾는다. 그런 무의식적 충동 속에서 두 사람은 긴장감 속에서 협상을 한다. 이러한 와중에 상원의원의 딸 캐더린이 납치된다. 결국 범인의 정체를 알려준다면서 이감을 요청한 렉터는 지하 감옥을 떠나 지상의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고 스탈링은 수사에서 제외된다. 범인에 대한 단서를 알고 있는 범죄심리 전문가인 렉터는 이송중에 경관들을 살해하고 도주한다. 스탈링은 혼자 수사를 계속하던 중 렉터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기억하고 범인 버팔로 빌(테드 래빈)의 행적을 추적해서 그를 사살한다. 

    

끔찍한 살인마들의 이야기지만, 영화 속의 닥터 렉터는 악(惡)으로만 묘사되지 않는다. 그의 악행은 다른 악인들의 악행에 가려져 흐릿하게 처리된다. 스탈링에게 범죄 해결의 단서를 제공하는 노현자의 이미지마저 부여된다. 그는 더 이상 절대악이 아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악, 인류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 절대악(絶對惡)은 이제 동화 『해리 포터』에나 나오는 것으로 치부된다. 어른들의 동화인 무협(武俠)에서도 절대악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 『동방불패』가 그 시발탄이다. 그(그녀)는 홍콩 무협판 닥터 렉터다. 특정한 한 인물(주인공)에게는 전능한 조력자로 기능한다. 그에게는 선(善)한 친구다. 죽음까지도 그 우정은 침범하지 못한다. 무엇을 실행하든, 태도나 형식에서 비인화(非人化)만 범하지 않으면서, 적어도 필요악으로서의 존재의의만 인정되면, 결코 악(惡)으로 몰리는 일이 없는 시대상을 반영한 내용이다. 『동방불패』 이후에 나온 무협영화는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왕우, 이소룡, 성룡에 이어 이연걸이 ‘황비홍’으로 잠시 그 맥을 이었을 뿐, 순수한 무협영화의 시대는 『동방불패』 이후로 ‘장려한 낙일(落日)도 없이’ 쓸쓸히 그 막을 내린다. 그 이유를 선과 악의 선명한 대립구조가 붕괴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대중에 의해 기대되는 서사 구조에 대한 몰이해>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이미 세상은 복잡해져 있는데, 과거의 단순한 서사 구조는 그러한 ‘세상의 욕망’에 시의적절히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잡한 심사’를 보여주는 영화들이 성공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영화 『양들의 침묵』이 보여주는, 선과 악의 경계 해체를 바탕으로 하는 드릴러적 서사 구조가 그런 경향의 대표적인 한 사례다. 닥터 렉터는 절대악에 가까운 존재이지만 주인공 크라리스 스탈링에게는 선하고 전능한 부상(父像)이 투사되어 ‘내면의 연인’으로 각인되는 인물이다. 동방불패(임청하)가 영호충(이연걸)에게 보여주는 전능한 모상(母像)으로서의 연인상에 대비되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이 두 영화는 쌍둥이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서로 주인공들의 성적(性的) 위상만 도치되어 있다. 역할은 똑같다. 이 두 영화의 재미는 악(惡)의 캐릭터가 지니는 ‘예측할 수 없는 오묘함’에서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극의 모든 재미는 그 구성에서 나온다’라고 말한 것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상이다. 플롯이 성격에 흡수되면서 관객의 기대를 여지없이 묵살하고 따돌리는 반전이 서사의 핵을 이룬다. 몰입 효과와 소격 효과가 빈번히 교체되는 상황에 관객은 당황하기도 하지만, 곧 그것이 새로운 서사 전략임을 알고 내심 안도한다. 어차피 반전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낯익은 얼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당연히 구성은 이미 결말이 예정되어 있는 ‘보나마나한 정보의 지연 전략’에 불과하다. 그러나 독자(관객)의 흥미는 전혀 줄어들 기색이 없다. 선과 악이 종횡으로 서로 물고 물리는 상황이 흥미를 배가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욕망의 방정식 안에서 일정한 조건과 공식을 통해 그때그때 해석될 수 있는 것일 뿐, 타고나면서 선(善)인 것도 없고 마르고 닳도록 악(惡)인 것도 없다.


악(惡)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을 대할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악(惡)은 있다. 그것은 태초부터 확연하게 실체로, 내용으로, 인간 안에 존재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선이라 생각하는, ‘태도나 형식’은 그저 사소한 것이다. 하나의 위안일 뿐이다. 자위(自慰)다. 그것도 일종의 엄이도종(掩耳盜鐘)이다. 어떤 큰 소리가 나도 자기 귀만 막으면 된다는 행태다. 세계사적 사건, 국제적인 분쟁, 민족사적인 갈등, 전환기의 정치와 경제에만 악(惡)이 내용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도 늘 존재하는 것이 악이다. 악(惡)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도둑도 강도도 깡패도 사기꾼도 협잡꾼도 이간꾼도 모사꾼도 모두 악(惡)이다. 권력과 돈으로 비굴과 탈법을 강요하는 자들도 모두 악이다. 섣부른 재미나 무관심으로 타인의 존재를 말살하는 것도 악이다. 시기심, 질투, 지배욕, 독점욕, 떼거리 문화, 그 모두가 악이다. 지금 나에게도 매일같이 일상의 악(惡)이 작용한다. 개중에는 거의 절대악 수준인 것도 있다. 가까운 동료 한 사람은 그 악(惡)이 용인되는 현실을 견디다 못해 전공도 아니면서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논문도 썼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 악(惡)은 지지자와 추종자와 엄호자와 함께 자신의 행위를 필요악(必要惡)으로 치부하면서 전횡한다. 그 수법이 악랄하다. 세상의 모든 정치역학을 이용해서 악행을 저지른다. 왜 그런 악행이 가능한가? 그 이면에 ‘악성(惡性)에는 내용이 없다’라는 후안무치한 모럴 아닌 모럴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본성의 ‘낮은 물’을 충동질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차라리 나도 그 악(惡)의 품안으로 들어가 ‘모든 것이 용서되는 울타리’를 보호막으로 가지고, 좀 편안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스스로 닥터 렉터가 되고 싶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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