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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Dec 01. 2019

네 편의 영화, 혹은 멜로 편력

동방불패 외

네 편의 영화, 혹은 멜로 편력


어제 점심 시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딸 가진 부모 중의 한 사람이 한 마디 했습니다. “요즘 남자 아이들은 여자 얼굴밖에 안 본다.” 모두 긍정했습니다. 결혼하기 전, 아이들이 얼굴에 바치는 열정이 거의 광기(?)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닌 듯싶었습니다. 옛날에도 그랬습니다. 고래로 남자들은 색(色)에 약했습니다. 물론, 좋아하는 색(色)의 양태에는 개인차가 있기는 했습니다. 친한 친구 중의 한 사람이 제게 했던 말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무슨 이야기 끝에 그 친구가 “너는 여자 인물 안 보니까 ....”라고 말하면서 저를 예외적 인간 취급을 했습니다. 저는 본다고 봤는데 친구들 사이에서는 안 그런 것으로 간주되었던 모양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처음 하는 것입니다만 누가 알면 좀 서운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제 눈을 믿었습니다. 며칠 전에도 또 다른 친구 부부와 저녁을 같이 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그 친구가 여자 인물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누구 엄마는 갈수록 예뻐지시네요.”라고요. 제 집사람을 보고 하는 소리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도 흘깃 곁눈질을 해 보니 그 말이 딱히 100% 공치사인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때서야 옛날 친구들의 험담에 제가 정색하고 반발했던 것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했거든요.
“나도 여자 인물 많이 본다.”
그 말이 공연한 반발심에서만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 요즘 들어 증명이 되고 있는 셈입니다(팔불출이라 죄송합니다).


광무제에게는 ‘호양’이라는 과부누이가 있었습니다. 일찍 과부가 된 호양공주는 광무제가 아끼는 신하 ‘송홍’에게 몸이 달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송홍에게는 엄연히 처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호양공주는 광무제를 졸랐습니다. 송홍이 부인과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동생에게 압력을 넣은 것이지요. 그래서 광무제가 송홍에게 넌지시 말했습니다.
“남자란 본디, 돈을 벌면 친구를 바꾸고, 지위를 높이면 마누라를 바꾸는 법이다. 니가 개천에서 나서 지금 용이 되었으니 늦었으나마 지금이라도 마누라를 바꾸는 것이 어떠냐?”
그러자 송홍이 대답했습니다.
"빈천지교는 불가망이고 조강지처는 불하당(貧賤之交 不可忘 糟糠之妻 不下堂)입니다." (가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어선 안 되고 젊어서 고생을 같이 한 아내는 버려선 안 됩니다).
그 한 줄 대답으로 광무제의 압력 행사를 가볍게 물리쳤답니다. 우리가 많이 쓰는 ‘조강지처’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답니다.

조강지처 말씀은 이미 드렸고, 제 빈천지교 중에는, 앞서 든 친구들 말고도, 몇 편의 ‘홍콩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들은 지금 봐도 늘 반갑습니다. 양조위, 왕정문, 임청하, 주윤발, 양자경, 장국영, 유덕화, 장만옥... 결혼해서 신혼을 보낼 때부터 최근까지 제가 좋아했던 배우들입니다. 저희 때는 홍콩이나 대만의 영화배우들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재미있게 본 영화, 인상적이었던 다른 배우도 많았습니다만 결정적으로 영화 속으로 저를 끌어당긴 사람들은 위에 열거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취생몽사(醉生夢死), 거의 저를 그들과 함께 영화 속에서 살게 했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쓰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저의 팔대천왕(八代天王)들입니다. 양조위와 왕정문은 중경삼림에서, 임청하는 동방불패, 주윤발은 영웅본색, 장국영은 동사서독, 장만옥은 화양연화, 유덕화는 천장지구, 양자경은 검우강호, 대충 그런 식으로 저와 막역하게 교우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영웅본색, 동방불패, 중경삼림, 검우강호는 좀더 특별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빈천지교들은 제 인생의 곡절(曲折)과 함께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빈천지교를 한 번 되짚어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영웅본색(英雄本色, 1986) : 의리 없는 놈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웅본색은 삼국지의 1980년대식 버전입니다. 더도 덜도 아닌 그저 삼국지입니다. 의리보다 ‘나’를 먼저 앞세운 놈들은 당연히 응징을 받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 동아시아의 민초들은 쌓인 게 많습니다. 그래서 늘 그런 빈천지교의 승리에서 혹은 ‘의리’에서, 구원을 찾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복수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당시 ‘복수’할 일이 많았던 저에게도 영웅본색의 시원스러운 결말은 도저한 위안을 주었습니다. 의리담론과 오자서의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의 탄식’은 결국은 이음동의어라고 누군가가 말했지만(의리를 찾는 사람들은 주로 현실에서 대세를 잃은 사람들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상처투성이의 삼십대에 저를 위무한 건 바로 그 ‘의리’였습니다. 그것과 함께 제 나름의 ‘젊은 날의 초상’을 그려 나갔습니다. 삼십의 나이는 제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온전한 ‘내 것’들을 ‘내 손’으로 만들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가족이라는 것, 사회적 위상이라는 것, 물질적인 기초라는 것들을 모두 제 손으로 만들어갔습니다. 더 나이를 먹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하며 나가려 했을 때 드디어 세상의 상처가, ‘영웅의 본색’이, 제게도 찾아왔습니다. 생각보다 세상에는 ‘상처’들이 많았습니다. 함부로 자신의 ‘상처’를 건드리면 가차없는 복수가 날아왔습니다. 주윤발이 후배 이자성의 상처를 건드리고 후일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듯이 저도 그 비슷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했습니다. ‘영웅본색’ 시절에는 여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의리를 말하는 데에는 여자가 필요 없었습니다. 제가 닮고 싶었던 주윤발의 ‘마초’만이 빛났습니다. 단정 온순한 그의 원(原) 페이스이미지가 마초적 이미지로 바뀌고(총을 들고 성냥개비를 씹습니다), 그가 성(聖)스러운 폭력을 폭발적으로 불러낼 때(그의 권총에서는 총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무진장의 쾌를 느꼈습니다. 저도 그처럼 그냥(대책없이?) 쏘고 부수고 없애고(복수하고?) 싶었습니다. 오래 동안 그를 가까이 두고 살았습니다.


동방불패(東方不敗, 1992) : 여러 가지를 알게 해 준 영화였습니다. ‘여자는 옷을 보고 남자는 얼굴을 본다’는 것도 이 영화를 통해 알았습니다. 명작 <동방불패>를 두고 웬 뜬금없는 소리냐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불패(不敗)의 비너스 임청하의 중성미, 이제 중년을 바라보는, 세상에 지친 한 남자의 물 오른 아니마(anima),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완벽한 공존, 천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황금률의 양성적(兩性的) 페이스(face), 그런 것이 먼저 이야기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런 것에서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대는 그 이상 저를 위무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거의 하루에 한 번씩, 수 백 번 동방불패를 보는 남편이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저희 집의 동방불패인 아내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재미있어요?” 그래서 같이 보자고 했습니다. 한참을 같이 본 후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어때?”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그 여자 입은 옷이 멋있네!” 그뿐이었습니다. 대단하다까지는 아니더라도, 괜찮은 영화네요, 볼 만한데요, 정도는 기대했었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동방불패의 옷이었습니다. 이거 영 남자를 모르는구먼, 속으로 그런 빈정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그 얼마 뒤 반전이 찾아왔습니다. 어디선가(미용실?) 차례를 기다리던 중 영화잡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 특집으로 실린 임청하와의 인터뷰 기사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영화 『동방불패』에 대한 질문이 많이 던져지고 있었습니다. 거의 한물 간(?) 임청하라는 배우를 세계적인(?) 배우로 만든 것이 바로 그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임청하 본인은 ‘동방불패 캐릭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기자가 물었습니다.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동방불패는 촬영할 때 힘이 많이 들었던 영화예요. 그리고 그 옷이 참 멋있었잖아요?” 기자도 더 이상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남자는 얼굴을 보지만 여자는 옷을 본다는 것을요.


중경삼림(重慶森林, 1994) : 인생은 짧은 한 편의 연애담입니다. 오직 한 편의 멜로드라마일 분입니다. “인생 뭐 별 것 있어요?(영화배우 김희애가 <꽃보다 누나>에서 한 말입니다)”, 그것 빼고는 다 헛것입니다. 그것을 빼면, 그냥 식어버린 우거지국입니다. 따근한 맛 없이 미지근하게 목구멍을 넘어가는 국물일 분입니다. 그것이 머무르던 때야말로 진짜 인생이었습니다. 제가 중경삼림을 본 것은 영화 개봉 후 한 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런 영화가 있다는 걸 애초에는 몰랐었습니다. 아마 5, 6 년은 족히 지났을 때였습니다. 철 지난 한 문예지에서 그 영화를 두고 누가 죽는 소리(?)를 해대는 걸 보았습니다. 여성작가(펑론가?)였는데 386 운운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고절감(孤絶感)을 그 영화 이야기(실은 양조위 이야기)를 하면서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로는 이 영화가 ‘아주 그냥 죽여줘요’라는 거였습니다. 마치 제가 <동방불패>를 열독했듯이 그녀도 <중경삼림>을 열독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 정돈가? 그래서 DVD를 구해서 봤습니다. 과연 좋았습니다. 영화로 봤으면 더 좋을 뻔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쉬운 대로 질릴 때까지 책상 위에서 틈날 때마다 봤습니다. 『중경삼림』에서는 왕정문(왕비(王菲),Faye Wong)이 압권이었습니다(누구 젊을 때와 아주 비슷한 이미지였습니다). 여자가 어떤 때 사랑스럽고 어떤 때 연민을 느끼게 하는지 왕가위 감독은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좋았습니다. 완연히 농염했던 초 중년의 아니마(임청하)는 이제 중(重) 중년으로 들면서 물이 많이 날라 빈티지의 여리고 청순한 모습(왕정문)으로 나타났습니다. 약간의 남성미가 흐릿하게 남아있긴 했지만 왕정문은 가녀린 여성미 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져 있었습니다(거기서 아내의 젊은 시절과 많이 겹쳤습니다). 정작 본인은 흘낏 훔쳐보더니 “너무 말랐잖아?”라고, 자신의 청춘을 그대로 복사한 아비(兒菲)를 한 방에 날려보냈습니다. 노래도 좋았습니다. California dreaming은 그전에도 많이 듣던 노래였는데, 거기서 빵 터졌습니다. 꿈과 음악, 그것을 가운데 둔 두 청춘의 조우, 흑심을 감춘 여자의 도발적인 몸매(춤?)와 가장된 무관심의 깜찍스런 앙상블, 진지하고 외로운 젊은 영혼들의 내면 탐색, 그리고 홍콩의 불투명한 장래, 그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멋진 한 편의 멜로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 ‘떠나는 자들의 로망’인 캘리포니아 드리밍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멜로드라마였던 겁니다. 멜로디가 만들어내는 공명(共鳴)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검우강호(劍雨江湖, 2010) : 『검우강호』는 화려한 수식을 피합니다. 그저 기본에 충실한 무협영화입니다. 중국 시장을 의식한 거북스런 중화주의(中華主義)도 없습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누구나 원하는 보물이 있습니다. 재물도 있고 명예도 있고 권력도 있고 건강도 있습니다. 물론 가족 안에서의 안식도 있겠지요. 그리고 그것을 가졌으니 피가 피를 부르는 강호를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강호에 들어오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 ‘강호의 율법’입니다. 만약 거기까지만 이야기했다면 그 영화는 『와호장룡』입니다. 만약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끝내 악을 응징하고 최후의 승자가 되거나 사랑을 쟁취하거나 가족을 지키면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가 됩니다. 최근의 『무협(武俠, 2011)』이라는 영화는 그래서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의 동생입니다. 어쨌든 그것들은 모두 정통파 무협영화입니다. 『검우강호』는 거기에 종교적 희생과 구원(救援)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첨가합니다. 악의 응징, 최후의 승리, 가족의 보전, 희생과 구원, 그런 필수모티프(leit-motif)를 두루 내함하면서 영화는 종합예술(?)로 내달립니다. 이 영화에는 중성미 넘치는 물오른 여자의 얼굴도, 그녀의 화려한 옷도, 말라깽이 귀여운 여인도, 그녀와 함께 하는 흥겨운 멜로디도 없습니다. 그런데 양자경이 좋습니다. 꼭 지금의 아내와 같습니다(아침부터 너무 아부가 지나친 것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여성미와는 담을 쌓고 지냈던 배우였습니다. <와호장룡>에서도 그녀는 그걸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여성미는 장쯔이에게 양보해야 했습니다. 누이까지는 될 수 있었는데 연인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칼 보여줍니다. 비로소 그녀도 불패(불망?)의 여자가 되고 있었습니다(아내는 어머니의 이미지까지 소유합니다). 액션에서도, 멜로에서도, 확실한 주연 여배우 역할을 감당해 냈습니다. 중년의 양자경이니까 가능했다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때가 있다는 걸 알게 해줍니다. “나는 돌다리가 되겠습니다. 오백년 비에 맞고, 오백년 바람에 쓸리고, 오백년 햇볕에 쬐인 후 그녀가 나를 밟고 건너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양자경의 ‘장졸우교’. 50대 중반, 쓸쓸한 초로(初老)를 맞은 한 시골무사에게는 때 아니게 찾아온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제 빈천지교들, 네 편의 영화가 서른 전후부터 지금까지의 저의 ‘멜로 편력’(?)을 단계적으로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글로 써놓고 보니 더 그렇습니다(팔불출 아내 예찬?). 늙어가면서 아내에 대한 아부의 농도도 한층 더 깊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늙은 남자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 부인, 아내, 마누라, 와이프, 애 엄마 등등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조강지부(糟糠之夫)도 불하당(不下堂)이라는 것을 알아주기만 바랄 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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