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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Dec 02. 2019

세 번 울었다

소홍귀

세 번 울었다


『1911 신해혁명(辛亥革命)』(장려, 2011)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신해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다. 늘 그렇듯이 ‘혁명’은 어디서고 보는 이의 눈물을 자아낸다. 혁명을 가지고 한 방울의 눈물도 짜내지 못하는 예술가는 예술가도 아니다. 노래든 소설이든 영화든, 어디서나 혁명은 눈물이다. 이 영화에서도 군데군데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과 만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독자의 눈물을 강요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나가수> 같은, 기획된 패자부활전을 보면서도 여즉없이 눈물을 찔끔거려야 유치한 노년(老年)의 센티멘탈을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미완의 혁명을 쿨(cool)하게 조명하겠다는 작가의 의도(영화제작을 지원한 중국당국의 입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손문이나 황흥과 같은 혁명가의 묘사에서 남루한 ‘붓 끝의 과장(誇張)’은 가급적 삼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혁명의 역사를 알자. 선조의 희생은 후손들에게는 살기 좋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우리 중국인은 바른 방향으로 나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로 요약된다. 거기에 몇 자 첨가한다면, 혁명은 희생을 요구하고 희생에는 용기가 필요한데, 그 용기는 언제나 우리의 자식들을 볼 때 생긴다, 나 하나 잘 먹고, 잘 입고, 호사하다 가는 것은 언제나 남루하고 값싼 인생의 목표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항상 개인을 넘어 가족을, 가족을 넘어 전체를 지향할 때 확인된다, 자기를 넘어서는 지도자가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대충 그런 개인적인 소감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나의 공간, 동일한 시간 안에서 살지만, 사람에 따라 서로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세다. 그만큼 인생은 다중(多重) 다층(多層)적이다. 다 같은 인간인데 누구는 구원의 주체가 되고 누구는 구제의 대상이 된다. 누구는 목숨을 바쳐 희생을 하고 누구는 평생을 뺀질이로, 악질로 살아간다. 그래도 되는 것이 인간세다. 소나 돼지 같은 동물들에게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어쩌면 그런 역사성, 사회성이 바로 생물계에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눈물’은 인간을 하나로 묶는다. ‘웃음’은 몰라도 ‘눈물’은 한 가지 원천(源泉)에서 나온다. 그것도 인간만의 특권이다. 언젠가 한 번 발표했던 글의 일부를 소개한다. 제목은 <세 번 울었다>다.


.....국어시간에 조세희의 난쟁이 연작 중 ‘칼날’이라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수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대학을 갓 졸업한 총각 국어선생이 수업을 하다가 낙루를 하였으니 단시간에 학생들에게 소문이 퍼졌다. 티 없이 맑고 양순한 그 학생들은 나를 나약한 정신과 불안정한 감정을 가진 교사로 보지 않고 인간적 연민과 문학적 감성이 풍부한 선생님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그 이후 내게는 눈물을 흘리며 문학수업을 하는 선생님이라는 원광이 드리워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대한민국 아줌마가 되었을 그 학생들에게 축복 있기를!
그 후 대학 강단에 서서도 김종삼의 ‘앞날을 향하여’를 읽다가 눈물을 흘렸고, 박재삼의 ‘추억에서’를 강의하다 목이 메었고, 김사인의 ‘지상의 방 한 칸’을 이야기하다 교실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얼마 전에는 수업 중에 임영조 시인에 대한 추모의 글을 읽다가 울음이 북받쳐 끝을 맺지 못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보여주지 못한 고독의 열정이 시에 대한 애호의 자리에서는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워즈워스는 ‘무지개’에서 하늘의 무지개를 보며 가슴 설레던 어린날의 경이감이 늙을 때까지 지속되기를 염원하였다. 나의 경우 시에 대한 열정이 시에 처음 매혹을 느낀 10대의 사춘기로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다행스럽다. 지금도 좋은 시를 보면 가슴이 설레고 남에게 그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친다. [「가을 에세이, 고독」(이숭원, 교수신문, 334호)]


수업 중에 눈물이 흘러, 혹은 목이 메어, 수업에 지장을 받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보통, 전문가들은 눈물이 없기 때문이다. 우는 것들은 늘 아마츄어들이다. 그러나, 그건 보통의 전문가들 사이에서의 이야기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진짜 달인(達人)들은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아무데서나 가리지 않고 울 수 있는 모양이다. 자기도취가 심한 미숙한 인격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인간에 대한 사랑에 무슨 수치가 있고 무슨 시간과 장소가 따로 있겠는가. 잘났든 못났든 순진무구한 시심(詩心)이 유지된다는 것은 그래서 일단은 축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전에 쓴 『고양이를 부탁해』 감상문 말미에 ‘스무 살은 개꿈이다’라고 초를 친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그저 보통의 전문가’에 불과하다.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것도 또한 나같은 보통의 전문가들이 자주 보이는 행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나도 수업 중에 목이 멘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님을 이참에 고백하여야겠다. 기왕에 '눈물'이 주제로 나왔으니 말이다. 30대 초반 무렵, 소설 강독 시간에 이청준의 「눈길」 읽다가 한 번, 그리고 한 십년쯤 뒤, 문학개론 시간에 무슨 이야기 끝에 『중국의 붉은 별』 제5부「장정」‘대도하의 영웅들’ 부분*을 설명하다 한 번, 그리고 근자에, 정규 수업은 아니지만, 검도교실에서 제자들에게(아들도 포함된) ‘허리 맞을 때 소리 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맨살 위에 시퍼런 줄이 서도록 팔로 막았다던, 돌아가신 아버지 학창시절 검도 배우던 이야기’를 전하며 (분발할 것을 촉구하다가) 한 번, 그렇게 세 번 울었다. <2011. 12. 2>


* 하나뿐인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노정교 전투에서, 외나무 다리 위에서의 총알받이로 나선, 눈앞의 죽음을 보면서도 선봉에 자원한 30명의 어린 홍군(紅軍)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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