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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Dec 13. 2019

말을 하는 까닭을 알아야

고전작품의 이해

말을 하는 까닭을 알아야


하루는 공자님이 제자들을 품평(品評)하셨습니다. 스승이 제자들의 자질을 평가할 때는 대체로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는 그들 현(現) 제자들의 분발을 촉구할 때입니다. 부족한 점을 가르쳐서 앞으로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둘째는 이미 자신의 곁을 떠나간 옛 제자를 회고할 때입니다. 그런 회고 행위는 꼭 평가를 겸합니다. 그런 식으로, 지금 있는 제자들 앞에서 옛날 제자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선생들이 늘상 하는 일입니다. 제자들과의 옛정을 되새기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것이 선생된 자들의 한 존재 방식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남는 것이 제자뿐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자님의 다음 말씀은 아마도 후자의 경우인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에서 따르던 자들이 (지금) 모두 문하(門下)에 있지 않구나. 덕행에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요 언어엔 재아 자공이요 정사엔 염유 계로요 문학엔 자유 자하였다.” (子曰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 德行 顔淵閔子蹇冉伯牛仲弓 言語 宰我子貢 政事 冉有季路 文學子游子夏) [『논어』 「선진」]

후세 사람들이 공자님의 이 말씀을 중히 여겨 여기서 거론된 제자들을 십철(十哲)으로 존숭하고, 아울러 그 소장(所長)을 지목하여 사과(四科, 유학의 네 학과)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두고 후일 정자(程子)가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4과에 지목된 사람들은 바로 부자(夫子, 선생님)를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따르던 자들일 뿐이다. 문인 중에 어진 자가 진실로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증자(曾子)는 공자의 도를 전수했는데도 여기에 참예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십철(十哲)은 세속의 말임을 알 수 있다.”[성백효 역주, 『논어집주』, 선진 제십일]


정자는 공자님의 발화 동기에 주목한 것입니다.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고락을 같이 했던 옛 제자들을 회고한 선생님의 심중을 읽었던 것입니다. 아마 스스로도 타고난 ‘선생님’이었기에 그런 유추가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어쨌거나, 『논어』 「선진」편은 그 ‘십철(十哲)’들의 일거수일투족, 주목할 만한 언행들에 관한 기록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말을 하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습니다(물론 저 혼자 생각이니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자기에게 득(得)이 되는 것, 남을 욕하는 것, 그냥 (울적하거나 심심하거나 아무런 생각없이) 해보는 것이 그것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 동기(動機)는 상호침투적이어서 교묘하게 서로를 위장합니다. 보통의 상거래에서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가장 이문이 많이 남는 일이기 때문에, ‘세속의 말’에서는 당연히 위장(僞裝)과 기생(寄生)이 기승을 부립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세간에서 나도는 이야기들의 동기(動機)’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위해서 이 자리에서 동원될 개념들은 인식 관심 세 가지(기술적, 실천적, 해방적)와 코드 세 가지(논리적, 사회적, 심미적)입니다. 그것들은 철학하는 하버마스와 기호학 하는 퀴로드가 말한 것인데 지금은 거의 상식(常識)적인 용어가 된 것들입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기술적/논리적’, ‘실천적/사회적’, ‘해방적/심미적’으로 묶여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개념들로 우리 주변의 이야기들의 본색(本色)에 대해 한 번 ‘스토리텔링’을 해 보겠습니다.

어떤 이야기라도 그것을 이야기하는 이의 ‘목적(목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글쓰기는 언제나(戰場에서는) 뜻을 먼저 세우고(將帥가) 글자나 구절을 나열하는(兵士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적(목표)을 제대로 구현하는 글쓰기인가 아닌가(적국-제목-을 이기는 전쟁인가 아닌가)는 그 다음 문제이겠지요. 일단 제대로 된 장수와 병사라는 판단이 든다면 그들이 전개하는 전술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움직이는 전략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심청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심청전(심청가)>은 해방적 인식관심에 의해서 심미적 코드에 입각한 글쓰기(노래하기)가 이루어진 예가 되겠습니다. 이른바 예술적 장르 인식에 따른 창작이 먼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념적인 프로파겐다는 그 다음입니다. 말하자면 기생충이 끼어든 모양새입니다. <심청전>에서 강조되는 유교적 효의 주제는 예술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기생충인 것입니다. 실천적 인식관심이 자신의 숙주로 해방적 인식관심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그 시대에 가장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문제(의식, 무의식적으로), 혹은 트라우마가 되고 있는 인신매매나 인신공희(人身供犧)를 중심 소재로 차용한 <심청전>은 실천적 인식관심이 기생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이야기였습니다. 효(孝)라는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그 모든 상처의 치유책이 될 것이라는 그럴듯한 ‘이야기의 결말’을 만들어낼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교 사회였던 당시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심미적 코드에 사회적 코드가 기생하게 됩니다. 물론 독자들은 심미적 코드에 기생하는 사회적 코드의 극단화된 모습(가난 탓으로 죽은 심청이가 효를 통해서 다시 살아 최고도의 신분상승을 이룬다는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는 이중적 태도를 취합니다. 믿지도 않거니와 덮어놓고 배제하지도 않습니다(사람들이 익숙한 권위에 반응하는 태도와도 일치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이야기의 동기(動機)가 ‘위로’에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심청전>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전개되는 사건들에 대해서 기술적(記述的) 인식 관심이나 논리적 코드로 접근하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 접근, 독서행위는 ‘이야기의 동기’을 아예 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오독이 됩니다. 학생들에게 ‘심청이가 홀로된 아버지를 두고 인당수에 뛰어든 행위에 대하여, 그것이 진정한 효인가 아닌가에 대하여 논해보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러므로 넌센스 퀴즈를 내고 웃기는 답을 내어보라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애초에 논리적 코드가 무시된 이야기에서, 그 이야기 속의 한 이벤트를 두고 논리적으로 가치판단을 해보라는 요구이기 때문에 답은 항상 간단합니다.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주인공의 행위는 틀렸다”가 답이 됩니다. 보다 정확한 답은 “틀려도 너무 틀렸다”일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을 비논리적(초논리적)으로 풀어 본 것이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사회적 코드(실천적 인식관심)가 심미적 코드(해방적 인식관심)에 기생할 때는 그 양상이 아주 극단화되기 때문에 그 비논리성은 더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돌아다니는 이야기들의 본색(本色)을 한 번 들여다보면 꽤 재미가 있을 듯합니다. 인기 있는 소설이나 영화, 신문지상이나 TV에서 전경화되는 사건 사고(기사화하는 스토리텔링), 인터넷을 떠도는 괴담, 카카오톡을 달구는 음담패설,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사회가 관심하는 주된 인식관심과 코드를 반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무엇이 무엇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과장과 왜곡이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이야기 속을 누비고 다닙니다. 그런 이야기의 횡행에는 믿지도 않으면서 배척하지도 않는, 이른바 ‘백성 근성’의 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태반이 누구를 욕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는 의도에서거나 심심한 척하면서 자기의 이득을 취하려는 이야기들 일색입니다. 백성들은 늘 그런 취지로 삽니다. 그게 ‘작은 사람들’이 ‘큰 사람들’의 등쌀을 견뎌내는 한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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