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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Dec 12. 2019

점집을 찾는 이유

탈현실화

점집을 찾는 이유

'큰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점집을 즐겨 찾는다 합니다. 물론, '작은 사람들' 중에도 점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많이 점집을 찾습니다. 심지어는 종교는 종교대로, '점집 순례'는 또 그것대로, 일말의 갈등도 없이 양립시키고 사는 이들도 꽤 있습니다. 왜 그렇게 근거없는 '예정조화설'에 사람들은 의지하거나 광분(?)하는 것일까요? 타고난 신비주의적 성향도 한 몫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공짜(?)를 바라는 심리도 한몫 하겠지요. 불안 제거용도 되겠고요. 하지만 '속고 속이는 세상'(김수희 <서울여자>)에서 점복술이 그렇게 악역만 담당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점복술의 긍정적 사연을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현실은 종종 ‘믿기에는 너무 참혹한’ 사실들을 전달합니다.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한다든지, 자신만만했던 시험에서 낙방한다든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갑자기 붕괴하는 상황이 도래하거나,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데올로기가 하루아침에 몰락한다든지 했을 때 우리는 '홀로 절벽 앞에 선 느낌'을 받습니다. 그 ‘현실’에서 멀리 도피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낍니다. 운이 없으면, 때로 제어하기 힘든 어떤 힘에 의해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채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라는 감정이, 즉 <탈현실화의 감정Enfremdungsgefühl>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통으로 자기를 부정하며 삶을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살다가 가장 불행할 때가 그런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에 대한 프로이트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이 탈현실화는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아직 그 정체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감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특수한 정신 내용에 부착되어 있고 그 내용에 대한 결정과 결부되어 있는 복잡한 과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현상은 정신병에서 자주 발생하지만 정상인들 사이에서도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따금씩 환상이 건강한 사람들에게서도 발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상은 확실히 어떤 기능의 마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꿈이 건강인들에게 정규적으로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질환의 모델로 사용되듯이, 그것은 비정상적인 구조를 나타냅니다. …<중략>…
여기서 잠시 멈추고 이런 종류의 방어 기제 중 작은 것을 당신에게 상기시켜 드릴까요? 당신은 스페인계 무어인들의 그 유명한 탄식, <슬프도다, 나의 알하마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보압딜 왕이 그의 도시, 알하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어떻게 접하고 있나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러한 상실이 그의 통치 기반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사실이도록 내버려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소식을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에게 편지가 당도했다네,
알하마 시가 함락되었다는.
그는 편지를 불 속에 집어던지고,
사신(使臣)을 살해했도다.


왕의 이러한 행위를 더욱 결정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무력감과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편지를 태우고 사신을 살해함으로써 그는 아직도 절대적 권력을 쥐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프로이트(박찬부), 『쾌락 원칙을 넘어서』, 열린책들, 215~219쪽]


환상을 만들어내는 ‘탈현실화 감정’을 위무(慰撫)하는 사회적 제도 중의 하나가 점(占)이 아닌가 싶습니다. 용하다고 소문난 점집을 찾아가든 주역을 펼쳐놓고 스스로 동전을 던지든(六爻), 점을 본다는 것은 지극한 탈현실화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효과를 자아냅니다. 점괘가 어떤 것이든 환상이 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만(제 경험입니다만, ‘물을 건너면 죽는다’를 ‘위험하지만 지금 건너지 않으면 영영 죽는다’로 해석합니다), 점이라는 완충지대를 설정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해쳐서라도(소식을 전한 자가 자신이므로) ‘소식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로 되돌리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려서 유명한 점집 골목에서 잠시 살았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억울한 일로 호된 추궁을 받는 일이 생긴다면(자기 자신의 자책감까지 포함해서) 반드시 점집을 찾아보시는 것도 한 좋은 방편이 될 것 같습니다. 사회적인 체면 관계로 그런 행차가 불편하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주역』 강의를 한 번 들어보시거나요(주역은 주 문왕이 옥에 갇혔을 때 스스로 현실을 견디는 한 방편으로 저술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것도 어려우시면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여러 인문 점복술사들의 말에 귀기울이시거나요. 효과는 제가 장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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