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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Dec 14. 2019

개나 한 마리

개흘레꾼-김소진

개나 한 마리 키우면서


TV 프로 중에서 부담없이 자주 보는 게 <동물농장>, <세상에 이런 일이> 등입니다. 남자들은 나이 들면 누구나 뉴스 프로나 동물 프로를 좋아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저는 개 이야기나 고양이 이야기가 나오면 만사를 젖혀놓고 그저 TV 앞에 죽을 치고 앉아 있습니다. 어제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동료들과 퇴직 후의 삶에 대해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조만간 정년을 맞이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갔습니다. 저는 그저 ‘개나 한 마리 키우면서’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퇴직 후에도 ‘남의 말 안 듣는’ 인간들과 굳이 상종하느니 말 잘 듣는 짐승 한 마리와 여생을 함께 하는 것이 훨씬 나아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모두들 ‘일리 있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렇게 ‘개 이야기’를 하고 나니 개를 그렇게 좋아했던 사촌 형 생각이 났습니다. 참 ‘사람 좋은’ 사촌형이었습니다. 술 좋아하고 말 없던 그 형에게서 저는 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개에 대한 애정도 아마 그때 생긴 것 같습니다. 그 형과의 기억은 제게 늘 좋은 것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저의 소년 시절의 발고 명랑한 한 자락은 늘 그 형과 함께 합니다. 그러나 그 형은 아쉽게도 일찍 세상을 떴습니다. 인간들과 떨어져서 말 없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라 생각합니다. 개와 관련해서는 또 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소설가 김소진이었습니다. 그의 「개흘레꾼」이라는 소설이 생각이 났습니다.

「개흘레꾼」은 그 흔한 ‘아버지 소설’ 중의 하나이지만 그리 흔치 않은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소설입니다. 아버지는 6.25때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됩니다. 포로수용소에서 동지들의 돈을 맡아두는 금고 역할을 하다가 봉변을 당합니다. 인간 조직이라면 어디든 있는 ‘개 같은 놈’들로부터 그 돈을 지키려다가 ‘남자의 물건’을 성난 개에게 물어뜯기는 린치를 당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버지는 반공포로로 세상에 나온 뒤 그저 남루하게 살면서 개흘레꾼을 자임하게 됩니다. 그것이 개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해 내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못된 개에게 물려서 세상을 뜹니다(사실은 참살떡을 먹다가 체해서 죽은 것이 직접적인 사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흔치 않은 ‘아버지 소설’인 것은 우리 역사가 만든 ‘아버지의 곡절 많은 인생’ 때문이 아닙니다. 소설가의 아비치고 그 정도의 곡절이 없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김소진의 소설이 유별난 것은 ‘아버지와 함께 부대낀 세월’에 대한 묘사가 곡진하다는 부분에 있습니다. 그 속내가 어떤지는 소설의 결미를 직접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날 나는 아버지가 개흘레꾼이었다는 얘기를 명숙이에게 다 해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내가 받아야 했던 마음의 상처와 콤플렉스에 대해서도 털어놨다. 그러나 그 다음 얘기는 그예 하지 않았다. 그토록 뻗치는 취기 속에서도. 아버지가 결국은 개에 물려 죽은 것 말이다. 그 개는 아랫마을에서 족방(수제 구둣방)을 하는 이차랑씨네 셰퍼드였다. 족방 일꾼들이 먹다 남긴 짬밥을 얻어먹어서 그런지 뒤룩뒤룩 살이 찐 데다 묶어놔 길러서 성질마저 포악한 놈한테 아버지가 왜 접근했는지 몰랐다. 아무튼 아버지는 정강이뼈가 허옇게 드러날 만큼 된통 물려서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인수약국에서 약까지 지어 먹었다. 그러나 그 뒤로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는 기미를 보였다. 상처보다는 마음이 더 놀란 탓이었다. 물론 돌아가신 당일에 입맛이 당긴다며 잘못 먹은 찹쌀떡이 얹혀 급체 증세로 갑자기 숨을 거두긴 했으나 난 왠지 아버지의 운명이 개에 물려 죽을 팔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실까지 다 까발리면 난 기운이 죽 빠져버리고 말 것 같았다.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사실 나도 이제는 이런 명제로 뭔가 얘기 좀 해보고 싶었던 거다. 이런 명제로……
아비는 개흘레꾼이었다. 오늘도 밤늦도록 개들이 짖었다. [김소진, 「개흘레꾼」 중에서]


결말 부분의 고백처럼, 김소진은 과연 「개흘레꾼」의 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최대한 소상히 밝힙니다.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가 어떤 부끄러움이었는지 하나 남김없이 다 까발깁니다. 그렇게 이 땅의 모든 아들과 아버지들의 ‘원죄(原罪)’에 대해서 낱낱이 토해냅니다. 더불어 아버지가 ‘개흘레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소이도 차근차근 이야기합니다. 아버지의 ‘개 사랑’이 결국은 ‘개 같은 세월’에 대한 자기 방식으로서의 ‘처방과 치유’였음을 그려냅니다.
김소진 소설이 아니더라도 아비는 아들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정체성 서사를 화제로 삼는 모든 소설에서 부자유친(父子有親)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아비 없는 자식’은 그 무엇으로도 행세(行勢)할 수 없는 것이 이 땅에서의 삶입니다. 자기 이름을 지니고 세상을 살고 싶은 자들은 <아버지는 나에게 무엇이었던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디서든 ‘행세하고 남 앞에 서고 싶은 자’들은 반드시 그 문제의 해답을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내야만 합니다.

「개흘레꾼」이 보여주는 김소진의 ‘부자유친’이 흔치 않은 아버지 이야기가 되는 것은 소설 속의 화자가 소설가, 그것도 스스로 운동권 출신의 작가라고 밝히는 대목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테제 아니면 안티테제가 되는 아버지가 있어야 ‘행세가 되는’ 속류 운동권을 비판하면서, 스스로 ‘개흘레꾼 아버지’의 아들임을 밝히는 그 대목에서도 이 소설은 ‘흔치 않은 아버지 이야기’로서의 위상을 획득합니다. 자신의 뿌리를 털어내는 그 진정성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개 이야기’ 중에서는 김소진의 「개흘레꾼」이 그중 진정성이 있어 보이는 것도 바로 그 까닭에서입니다.

사족 한 마디. 어디든 깊은 연못이 있는 곳이라면 ‘용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옵니다. 이른바 용담(龍潭)이라는 것이 하나씩은 다 있습니다. 모든 깊은 물에는 용이 살아야 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런 ‘용 이야기’에는 일반적으로 개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개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그 점이 좀 섭섭합니다. ‘개 이야기’와 ‘용 이야기’는 서로 몸을 섞지 않는 것이 원칙인 모양입니다.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개흘레꾼」의 작가 김소진도 본인의 ‘아버지’나 저의 사촌 형처럼 개를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었는지, 그의 소설에서 자기 자신의 ‘개 이야기’를 보지 못한 저로서는 그 점이 문득 궁금해져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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