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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Dec 19. 2019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산 자와 죽은 자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젊어서 이런저런 검도시합에 출전한 경험이 있습니다. 재미도 있었지만 속상했던 일도 많았습니다. 가장 억울한 것이 제 의지와 관계없이 ‘억울한 죽음’을 당할 때였습니다. 심판이 제 칼은 보지 않고 상대의 칼만을 보는 것입니다. 그저 살짝 건든 것도 득점으로 인정해서 저를 ‘죽은 자’로 만든 심판들이 꽤나 있었습니다. 물론 자타가 공인하는 멋진 칼을 쓰지 못한 제 탓이 큽니다. 그러나 실력이 백중한 상태에서는 그렇게 멋진 기술이 나오기 힘듭니다. 이제 주로 심판을 보러다니는 입장이 되니 그때의 억울했던 심정이 '지나친 승부욕'에서 나왔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 완전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죽고 사는 게 제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인간의 판정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오심(誤審)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재심, 삼심제도도 있는 거겠지요. 제 경우를 볼 것 같으면, 제 자신이 그런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은 좀 참을 만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경기에서 오심이 발생하여 아이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생겼을 때는 참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관련해서 최근에 빈발하는 '억울한 아들의 죽음'에 오열하는 부모들을 볼 때면 제 가슴도 함께 미어집니다. 사람도 하나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나라가 무슨 나라인가라는 원망까지 솟구칩니다.

나라 사정과는 관계없이 일반론적인 '죽음'에 대한 관심이 여기저기서 눈에 띕니다. ‘죽음 교육’, ‘웰 다잉(well-dying)’ 같은 말들이 자주 귓전을 두드립니다. 어쩌면 제가 그것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에는 그런 이야기에 도통 관심이 없었습니다. 한쪽 귀로 들으면 즉각 다른 한쪽 귀로 흘려보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금씩 그것들과, 잠시 동안이나마,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닌 모양입니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지인(知人) 중 한 사람은 어느새 그쪽에서 전문성을 확보해서 작으나마 책도 한 권 내고 평생교육원 강좌 같은 데서도 짬짬이 특강도 하는 눈치입니다. 공부의 관심도 결국은 ‘생노병사’의 틀을 벗어나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멀리 하라셨지만, 공자님도 ‘죽음 교육’에 관해서는 명언(名言) 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계로(季路, 자로)가 귀신 섬김을 묻자, 공자께서 “사람을 잘 섬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는가?” 하셨다. (계로가) “감히 죽음을 묻겠습니다.” 하자, 공자께서 “삶을 모른다면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 하셨다.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논어』 「선진」]
귀신 섬김을 물음은 제사를 받드는 바의 뜻을 물은 것이요, 죽음은 사람에게 반드시 있는 것이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모두 절실한 질문이다. 그러나 정성과 공경심이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자가 아니면 반드시 귀신을 섬기지 못할 것이요, 시초를 근원해 보아 생(生)을 알지 못하면 반드시 종(終)으로 돌아가 죽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대개 유(幽, 저승)와 명(明, 이승), 생과 사는 애당초 두 이치가 없으나, 다만 배움에는 순서가 있어 등급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夫子)께서 이와 같이 말씀해 주신 것이다.
● 정자(程子)가 말씀하셨다. “낮과 밤은 死와 生의 道이다. 生의 道를 알면 死의 道를 알 것이요, 사람 섬기는 도리를 다하면 귀신 섬기는 도리를 다할 것이다. 死와 生, 人과 鬼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혹자들은 말하기를 부자(夫子)께서 자로에게 말씀해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깊이 일러준 것임을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問事鬼神 蓋求所以奉祭祀之意. 而死者人之所必有 不可不知 皆切問也. 然非誠敬足以事人 則必不能事神. 非原始而知所以生 則必不能反終而知所以死. 蓋幽明始終 初無二理 但學之有序 不可躐等 故夫子告之如此. ○程子曰 晝夜者 死生之道也. 知生之道 則知死之道. 盡事人之道 則盡事鬼之道. 死生人鬼 一而二 二而一者也. 或言夫子不告 子路 不知此乃所以深告之也.) [성백효 역주, 『논어집주』, 「선진」 第十一]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아직 삶도 모르면서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대답한 것을 두고 한때 "‘그건 궤변이거나, 아니면 일종의 회피 전략이 아닌가?"라고 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정자의 주석에 그 말씀이 “깊이 알려준 것이다”라는 언급이 있었지만 그 말조차 일종의 감정의 오류(affective fallacy, 비평의 기준을 시 작품 자체에 두지 않고 그 시가 독자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에 두려고 하는 데서 생기는 잘못)로 받아들여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공자의 ‘죽음 교육’이 문제를 회피한 것이 결코 아니라 성실하게 그 문제에 즉(卽)한 것, 다시 말해 제가 여기저기서 말하는 ‘견물생심(見物生心)’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해설을 오늘 대했습니다. 간략하였지만 핵심을 짚어내는 통찰이었습니다. 조금이나마 젊은 시절의 몽매(蒙昧)를 씻어내는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텍스트는 <余英時(김병환 역), 『동양적 가치의 재발견』>입니다.


...공자의 “아직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아직 삶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말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일찍이 자크 쇼롱(Jacques Choron) 같은 서구학자에 의해 ‘문제를 회피하는’ 태도로 오해되어 왔다. 사실 공자는 문제를 회피한 것이 결코 아니라 성실하게 죽음의 문제에 임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후(死後)가 어떤 모습인지 하는 문제는 본래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까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생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또 죽음은 생의 완성이다. 공자는 생의 의의를 사람들에게 이해시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하이데거와 매우 흡사하다. 공자만 이러했던 것이 아니라 ‘생과 사를 하나로 여겨 만물을 동일시’했던 장자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나의 생을 잘 영위하는 것이 바로 죽음을 잘 맞이하는 것이다(夫大塊載我以形 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死 故善吾生者 乃所以善吾死.. 『장자』 「대종사」)” 장자는 또한 ‘기(氣)’의 취산설(聚散說)을 사용하여 생사를 논하였다. 이는 혼백(魂魄, 혼은 하늘에서 오는 양기이고 백은 땅에서 오는 음기이다)의 이합설(離合說)과 상응될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는 여전히 견고하여 파괴되지 않는 ‘인간과 천지만물이 일체’라는 관점이 놓여있다.
불교의 도전(道傳) 뒤 생사에 관한 송대(宋代) 유가의 견해는 중국 사상의 주류적 견해로 복귀하였다. 장재(張載, 1020~1078)는 ‘생’이 ‘기의 취합’이며, ‘죽음’은 ‘기의 흩어짐’이라고 강조하였는데, 이는 장자의 견해를 흡수한 것이다. 소아(小我)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의 취합 역시 나의 몸이여, 기의 흩어짐 역시 나의 몸이니’ 자연히 죽음 때문에 두려워 불안에 떨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아(大我)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주와 인류의 삶은 모두 ‘생명창생이 끊임없는 과정(生生不已)’이니 죽음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주희는 불교가 생사로 인간을 두렵게 하여 비로소 오랫동안 유행할 수 있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우리가 ‘사사로운’ 일념을 초월하여 우리의 몸을 과도하게 중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바로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161~162 쪽)


열심히 일하며 살고, 편안히 늙고, 죽음에서 안식을 찾는다는 장자의 초연한 삶의 자세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자세’가 나올 것이라 막연한 희망을 가져봅니다만 아직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어쨌든, ‘사후(死後)가 어떤 모습인지 하는 문제는 본래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공자가 ‘미지생 언지사(未知生 焉知死)’라고 말했을 뿐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일에 ‘알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깨치고 있는 중이기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종교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추겨서 자신의 ‘입신양명 부귀영화(?)’를 추구한다는 인용문 필자의 관점(주희의 견해를 빌어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에는 다소간 불만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본디 생물체에게 자생적으로 주어진 것이지 따로 종교가 만들어 붙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종교가 사후세계를 강조하는 것은 그 ‘죽음의 공포’를 선한 삶의 의지로 치환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자님의 “사람을 잘 섬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는가?”라는 말씀도 제게는 그렇게 이해됩니다. ‘사람을 잘 섬기기를 궁리하라’라는 말씀 속에 이미 “그러면 죽음의 문제도 자연 해결되게 되어 있다”라는 말씀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선한 의지’를 강조하시면서도 굳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언급하지 않으신 것이야말로 사랑하는 제자에게 ‘깊이 일러준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그 차원에서 설득력을 지니게 되는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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