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빈 케이크(2)
적두병 망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쳇말로 '현타'라고나 할까? 네이버(naver)에 ‘적두병’을 쳐 넣는 순간 그동안의 모든 망상들이 일거에 소탕되고 말았다. '장난감 도시'(이동하 소설)의 명소, 대구의 맛집 토성공원 적두병, 빵쟁이 형님 이 아무개, 빵보다 커피 맛이 더 일품인 적두병 가게, 토성공원까지 가서 적두병 맛을 못 보면 3년 재수없다... 그리고 전통 혼례로 올린 최근의 가게 주인 결혼식 장면까지, '적두병'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총 망라되어 있었다.
가게 주인이 미혼이었을 것이라는 나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우연히 엿들은, 살갑게 주고받는 연인과의 통화를 두고 그렇게 추리한 것인데 미처 그것이 신혼의 달콤함이라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막연했던 실패의 예감이 현실로 막상 그 얼굴을 드러내자 내 안에서 '이상한 가역반응'이 일어났다. 오히려 더 홀가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적두병을 가지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적두병을 이용해, 모종의 서사적 정체성 복원을 도모해 보겠다는 섣부른 의식, 무의식적 망동들이 사라지고 난 뒤의 평안인 듯했다. 흑심을 접으니 돌연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교묘한 트릭도 복잡한 플롯도 어거지 합리화도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내 성격에는 오히려 큰 원조자가 되는 것이었다.
자라오면서 좋든 싫든 나에게 고통을 준 모든 불쾌했던 경험들을 탈색시키는 자기방어적 습관이 내겐 있다. 불쾌한 모든 것들을 ‘사건 그 자체’로 여겨버리는 것이다. 기억 속에서 그것들을 대할 때는 그 원인과 결과를 일체 생각하지 않는다. 후회도 복수도 실망도 원망도 자리잡지 못하게 안간 힘을 쓴다. 아마 어릴 때 토성을 떠나 본격적으로 '세계 이주'를 경험하면서, 그 냉혹하고 무정했던 세월을 견뎌야 했던 내 어린 자아의 자기보호책이었지 싶다. 어린 나이에 견디기 힘든 세계와의 불협화음을 그렇게 해서라도 무마해 보려고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 덕분에 소년 시절의 대부분을 소시오패스로 보냈던 것 같다). 나름대로 터득한 불가피한 생존전략이었다. 상처가 더 이상 번지게 하지 않으려는 꼬리 자르기 전술이었다. ‘사건 그 자체’는, 앞뒤를 제거하고 보면, 늘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무엇이 된다. 사건은 어디서고 일어난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다.
이번에 만난 적두병 역시 이제부터 ‘사건 그 자체’였다. 더 이상 적두병에 매달리지 말고 이리저리 유유자적하게 내 마음을 방목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단 바다부터 생각한다. 바다 곁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 제주도 태생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당 앞까지 바닷물이 철썩거리는 아주 궁벽한 어촌에서 나는 태어났다. 인천에서 미군이 제공한 LST(landing ship tank)를 타고 제주도까지 내려간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기서 나를 낳았다. 그것은 일단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원체험이다. 그래서 그 자체로 무의식이다. 바다 다음이 적두병인데 적두병은 의식이다. 기억의 잔해가 뚜렷하다. 어쨌든 그 둘은 내게 원초적 장면이다.
인터넷 검색 이후로 최근 몇 년간의 ‘빵쟁이 형님’의 활약상을 알게 된 지금, 적두병에서 근사한 ‘원초적 장면’을 재현해 보겠다는 나의 최초의 의도는 이제 좌초할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적두병 가게의 주인에게도 적두병에 얽힌 어떤 원초적 장면이 있었고, 그것이 내 원초적 장면과 절묘하게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쓰기는 이제 글러버렸다. 소설 쓰기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 발상을 했어야 했는지 그것도 참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내게 적두병이 원초적 장면으로 기능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사실 분명치가 않았다. 팥을 좋아하는 것은 그저 '사건 그 자체'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경험이나 상처나 핏줄이나 역사나 하는 그런 잡동사니들과 어울리지 않는 단독 사건 그 자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저 우연의 소치일 수도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적두병에 대한 내 최초의 경험은 일종의 ‘격리 체험’과 함께 내 기억의 저장고에 안치되어 있다. 그 기억의 저장고 안으로 먼저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다.
소설가 이동하가 ‘장난감 도시’라고 불렀던 이 도시에 처음 내려왔을 때 우리 가족이 머물렀던 곳은 듬성듬성 초가와 판잣집이 산재해 있던 도시 주변부 야산의 한 기슭이었다. 아마 장난감 도시에서 가장 월세가 싼 곳이었지 싶다(『장난감 도시』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판잣집 동네는 그곳에 비하면 훨씬 윗길의 주거 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우리 가족은 1년쯤 뒤에야 그 근처로 이사를 갈 수가 있었다. 그곳을 거쳐 토성 앞에서 제대로 된 가게를 열고 정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후로 또 몇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초가 한 칸을 빌려서 네 식구가 둥지를 틀었다. 옆방에는 가까운 곳에 있던 빵공장에 나가는 청년이 혼자 살고 있었다. 반대 쪽 언덕에는 애락원이라는 음성나환자 수용시설이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쪽으로는 잘 다니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의 나는 그런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쪽을 두고 수군거리는 어른들의 대화가 그리 밝은 내용이 아니었다는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시 학교를 쉬고 있는 형과 아직 취학 연령이 되지 않았던 나를 집에 두고 장사를 나갔다. 리어카에 풀빵틀을 싣고 다녔는데 아침 일찍 나서서 시간 반 정도 걸어가야 하는 꽤 먼 길이었다. 장사터는 토성공원 앞이었다(어린 나이임에도 그 당시의 나는 부모님들의 대화를 십분 이해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서야 모든 아이들이 어른들의 대화를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는 전혀 몰랐다. 그때까지는 한 번도 따라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밤새 다음날 장사를 위한 준비에 몰두하였다. 팥을 삶아 팥소를 내고 적당한 점도의 밀가루 반죽(풀반죽)을 하는 일이 매일 반복했다. 그 일이 간단치가 않았는지 이런저런 의논이 많았다. 집에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쉴 틈 없이 분주하게 일했다. 팥소 재료 준비는 주로 어머니의 몫이었다. 찔 것은 찌고 묵힐 것은 묵히느라 방안은 온통 재료를 담은 대야와 알싸한 냄새로 넘쳐났다. 행여나 그것들에 가까이 가기라도 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밤새 부산을 떨어 재료가 준비되면 이른 아침 리어카에다 그것들을 싣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총총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렀다. 형이 친구집에 놀러가면 나 혼자 집에 있는 일이 많아졌다. 옆 방의 아저씨가 한 번씩 말동무가 되어주곤 했지만 그 아저씨도 곧 일자리를 찾아서(인근의 빵공장이라고 했다) 집을 비우게 되었다. 그런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무슨 마음에서인지 나는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토성공원을 찾아가겠다고 마음먹고 나온 것이다. 그 때 무슨 생각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지금 자세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어린 영혼이었지만, 세상과 격리된 것이 야기하는 어떤 숨 막히는 공포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만 해 볼 뿐이다. 대전에서 살 때는 고모님댁이 인근에 있었다.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서는 엄마가 없을 때 달려가곤 했던 이웃의 고모님도 없었다(고모부는 학교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쳤다). “조근놈 오니, 배고파서 왔어?” 하며 끌어안아 주던 고모님만 있었더라면 그런 식의 무단가출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집 밖으로 나온 뒤의 기억들은 파편적으로 남아있다. 집 앞 골목길을 나오면 야산이 있고 그 야산에 허물어진 무덤 몇 기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참을 걸어 신작로까지 나왔을 때 밭 울타리로 심겨진 울창한 탱자나무들이 있었다는 게 기억난다. 신작로를 따라 먼지에 뒤덮인 탱자나무 울타리가 길게 늘어서 있는 풍경이 어린 마음에도 참 을씨년스러웠다. 간혹 합승버스가 지나가며 일으키는 흙먼지가 온몸을 뒤덮었고 날은 몹시 더웠다. 그것이 전부다. 어떻게, 어떤 경로로 걸어갔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큰고개길이니 큰장 네거리니 하는, 지금은 10차선으로 넓혀진 대로들이지만, 당시로는 차 한두 대 겨우 지나갈 좁은 신작로였다. 두어 시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이리저리 갈라지던 그 많은 꼬부랑길들을 어떻게 헤치고 나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통할 뿐이다. 오르고 내리는 고개로 점철된 난코스를 서너 살짜리의 아장걸음으로 어떻게 무사히 답파할 수 있었는지 아무리 재구성해 보려 해도 요령부득, 그 전모를 다 기억해 낼 수 없다. 비라도 오면 온통 흙탕물로 신작로가 범벅이 되던 시절이었는데 그 흙먼지를 몽땅 뒤집어 쓴 채 어린 아이가 혼자서, 길도 모르면서, 스스로 행선지를 정해 찾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 당사자인 내가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마치 꼬마 유령처럼 하얗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막내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먼저 내 주위를 살폈다. 누가 데려왔나 싶었던 것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어머니는 놀란 표정으로 어린 아들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아버지는 하늘만 쳐다보며 종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다만, 적두병의 팥소, 그 황홀한 맛만 기억날 뿐이다. 어머니는 크게 한 숟가락 적두병 안에 들어갈 팥소를 떠서 내 입에 넣어줬다. 평소에는 아예 근처에도 못 가게 하던 바로 그 금단의 열매였다. 세상의 모든 열락이 내 입 안으로 한 가득 들어왔다. 천국의 맛이었다. 입 안 가득히 향기로운 팥소의 향미가 흘러 넘쳤다. 먹어라, 아가야. 아마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가야, 먹어라. 이건 엄마의 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아가야.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없단다. 어떤 엄마도 자식을 버리지는 않는단다…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이제 로렌 아이슬리가 어머니의 묘비를 어루만지며 했던 것처럼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래요, 엄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죠. 그냥 쉬세요, 엄마….
이제 적두병 환상에 대해서는 그만 쓸 때가 온 것 같다. 적두병(赤豆餠)이 적두병(赤豆病-팥에 얽힌 병), 혹은 적두병(赤頭病-어릴 때 생긴 병)이었다는 것이 속속들이 남김없이 다 드러난 이상 적두병을 핑계로 중언부언, 징징거리는 투정들을 일일이 더 쓸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아쉬운 것 한 가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아버지가 노상(路上)의 적두병 장사로 돈을 모아 공원상회라는 버젓한 간판을 내걸고 주류도매상으로 창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성공이었다(물론 어머니의 고모 없는 고모부의 덕이 컸다. 이 할아버지는 혼자서 월남해서 다른 여자분과 살고 있었는데 시내 쪽에서 ‘향촌상회’라는 제법 큰 주류도매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창업은 명목상으로는 자수성가였지만 내막적으로는 어머니에 대한 이 할아버지의 연민의 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어머니가 밤새 만든 팥소로 만들어지는 아버지의 적두병은 공원 앞에서는 호가 난 명품 간식거리였다. 가격도 주변의 다른 풀빵들과는 비할 수 없이 고가(高價)였다. 그 앞에서 돌아서는 가난한 엄마들도 많았고 그런 엄마 앞에서 떼를 쓰며 울던 내 또래의 아이들도 많이 보았다(가출 사건 이후로 나는 리어카에 실려 동반 출퇴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겉과 속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거의 환상적인, 꿈에도 잊지 못할, 아버지의 적두병을 비로소 맛볼 수 있었다). 아버지의 빵맛을 성인이 된 뒤에도 한 번 먹어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아버지가 주류도매업으로 업종을 바꾸지 않고, 지금의 토성공원 앞 ‘빵쟁이님’처럼 버젓이 적두병이라는 간판을 달고 토성공원 앞의 명소로 가게를 키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아마 그 업을 물려받은 나는 지금 그 가게 안에서 느긋한 표정으로 “굽는 데 20분, 식히는 데 10분”이라며 줄서서 보채는 손님들을 달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참조 : "아가야, 먹어라. 이건 엄마의 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아가야.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없단다. 어떤 엄마도 자식을 버리지는 않는단다… "는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이재룡역, 민음사, 2012)에서 일부 차용한 표현이다. 원 표현은 다음과 같다.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살아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처럼 될 수 없었을 거야.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니. 아기를 갖고 동시에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 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