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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02. 2019

가재미와 뿔 달린 뱀

상징이란 무엇인가?

가재미와 뿔 달린 뱀


인간은 상징(象徵, symbol)을 즐겨 사용합니다. 상징 없이는 인류문화가 아예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상징적 동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호학에서는 상징을 기호의 세 유형 중의 하나로 이해합니다. 상징은 도상(icon), 지표(index)와 함께 기호를 이루는 한 요소입니다. 기호학에서 말하는 상징은 가장 추상적인 기호입니다. 언어적 기호가 그 대표적인 것이지요. 상징은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관념이나 기호에 속하기 때문에 그 상징을 사용하는 집단 안에는 반드시 어떤 약속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사용하는 ‘집단의 약속’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상징’이라는 말은 그렇게 정의되지 않습니다. 특히 시에서 말하는 그것은 ‘추상적인 관념(딱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을 환기시키는 어떤 구체적인 것’을 이를 때가 많습니다. 비유적 이미지든 서술적 이미지든, 은유든 환유든, 구체적인 어떤 것이 사용되어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이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은 모두 상징(상징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들은 그런 상징을 만들어내는 타고난 기술자들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 기술을 구사합니다. 그래서 시에서 만나는 좋은 상징들은 대개는 자유 연상의 결과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의식적인, 지적인 조작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장석남의 시 「수묵 정원 9」나 문태준의 시 「가재미」 같은 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습니다. 시인의 ‘상징적인 이해와 표현’이 독자들에게 상당한 문학적 쾌를 선사하는 드물게 좋은 시들입니다.


문학 수업을 하다 보면 상징과 비유의 차이에 대해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상징주의’라는 말도 나오고, ‘비유어’, ‘상징어’라는 말도 나옵니다. 무엇이든 다 구별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입시 준비생들은 ‘말들의 책임과 경계’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 입시용 질문을 받을 때는 좀 단순무식하게 말을 해줘야 합니다. “상징은 그 자체의 문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의도하는 다른 관념을 환기하고(더블), 비유는 오로지 보조관념이 지시하는 의미로만 존재한다(싱글)”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요즘은 대학에서 문학 수업을 하니 그런 부담이 없습니다. ‘비유어’나 ‘상징어’ 같은 말을 되도록 쓰지 말라고, 명사적 이해보다는 동사적 이해를 많이 하라고 당부합니다. 비유는 은유와 환유만 알고, 상징은 그것이 환기해 내는 과정이나 효과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문태준, '가재미')라는 상징적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안으로 ‘가재미’를 데려가야 한다는 것, 자연산이든 양식이든, 한 마리씩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모든 텍스트는 내 콘텍스트 안에서 재구성된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가재미’는 병환으로 바짝 마른 어머니의 신체를 보고 떠올린 이미지, 생각, 감정(연민의 정, 분노, 안타까움, 후회) 같은 것들이 일제히 달려 나와 만들어낸(찾아낸?) ‘세상에서 하나뿐인’, 가재미입니다. 그것 하나로 이미 한 편의 시가 탄생합니다. 하나이면서 여러 가지를, 모든 것을, 제 한 몸에 품어내는 그 가재미 한 마리로 시인의 ‘상징적 상상력’은 모든 다른 가재미들을 일망타진합니다. (그 과정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매우 친절한 절차를 밟습니다.) 시인은 우선 독자들의 수준을 고려합니다. 상징이 나올 환경을 먼저 조성합니다. 앞에서 ‘가재미처럼’이라는 비유법을 써서 독자들에게 일종의 ‘도상적 상상력’을 발휘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가재미’를 통해 감각적으로, 구체적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그렇게 순차적으로 독자들의 공감과 호응을 불러냅니다. 그런 과정을 ‘앞에서는 직유법을 뒤에서는 은유법을 쓰고 있다’라고 가르치면 얼마나 삭막한 시 수업이 되겠습니까? ‘비둘기가 찾아왔다’는 상징(상징법?)이고 ‘비둘기처럼 평화가 찾아왔다’는 비유(직유법)라고 가르치는 책들이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단순무식을 보면 자나 깨나 문학의 본령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문학교사의 책무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제가 처음 융의 이론을 접했을 때 그가 사용하는 ‘상징’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척 생소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원형적 표상’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저 깊은 무의식의 심연에 또아리 틀고 앉아 있는 아키타이프가 이미지의 형태로 자신을 쏘아 올린 것이 심볼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문학 수업을 받아오면서 알아 온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순전히 집단적인 어떤 것이며 개인의 경험이 오염시키지 않은 상태의 그 무엇을 그것이 담아낸다는 것입니다. 좀 황당하기도 했습니다. 신비주의 느낌도 들었고요.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렇게 되면 ‘상징’이라는 단어가 또 하나의 혼란을 야기할 것 같아서 좀 싫었습니다. 한 가지 실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융학파의 ‘상징 해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먼저 텍스트부터 소개합니다. 여덟 살짜리 소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자신의 아버지에게 준 꿈 이야기입니다. 이 소녀는 1년 뒤 성홍열로 죽었고요. 그녀가 ‘나쁜 동물의 꿈’으로 이름 붙인 것인데(그 소녀는 여러 가지 꿈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융이 ‘어린이 꿈에 관한 세미나’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한 번은 꿈에서 수많은 뿔을 가진 동물을 보았다. 그것은 다른 작은 동물들을 뿔로 마구 들이받았다. 그것은 뱀처럼 꿈틀거렸고 그것이 그 동물의 사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푸른 안개가 사방에서 뿜어져 나왔고, 그러자 그 동물이 먹이 먹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하느(하나)님이 내려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방에(네 모서리에) 네 명의 신이 있었다. 그러자 그 동물은 죽었다. 그리고 그것이 집어삼켰던 작은 동물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욜란 야코비, 유기룡․ 양선규 공역, 『콤플렉스, 원형, 상징』, 경북대출판부, 1986, 143쪽)


제가 보기에는 이 소녀가 비교적 풍부한 독서 경험(이야기 경험)을 가지고 있는, 감성적인 병약한 어린이였던 것 같습니다. 꿈을 기록하는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남다릅니다. 그리고 또, 표현이 아주 정교하면서도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교육받은 자들’의 표현 방식이 느껴집니다. 다만, ‘수많은 뿔’이 ‘한 개의 큰 뿔’로 묘사되지 않은 것이 좀 아쉽습니다.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이 꿈은 전형적인, 책을 보거나 이야기를 듣고서 만들어낸, 배워서 알게 된 ‘원형적 꿈’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화적 전승이 한 인간의 내면에 어떤 식의 ‘상징적인 것’들을 새겨 넣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제 생각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수준일 것입니다.

그러나, 융과 그의 제자들은 이 소녀의 꿈을 ‘문화적 전승’의 ‘결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의 ‘원인’으로 취급합니다. 이른바 ‘큰꿈(big dream)’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이 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사건, 배경들을 무의식을 이해할 때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확장’합니다. 다음과 같은 방식입니다.


....꿈속에서의 그 동물은 이름이 없다. 그리고 어떠한 정확성으로도 묘사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많은 뿔’을 가지며 그것으로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기 위해 ‘작은 동물들을 들이받는다’, 그리고 ‘뱀처럼 꿈틀거린다’라는 것만 듣는다. 우리에게 충격적인 것은 우선 그 동물 자체가 – 꿈 전체뿐만 아니라 – 반대적인 성격체를 결합한 것 같다는 것이다. 꿈틀거리고 뱀처럼 생긴 형체로 보아 그것은 의심 없이 축축하고 찬 요소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불은 불과 정열, 즉 뚫는 힘이 있는 뜨거운 요소에 연관된다. 그 동물의 몸은 뱀처럼 꿈틀거리지만 능동적인 남성적 양상에 의해 보충을 받는다. 어두운 지하의 여성적 수동성, 게걸스런 땅의 상징이 남성적인 능동성을 겸비한다. 그래서 이 동물은 양성적으로 표현되는 원초적인 우주진화적 괴물, 즉 프리마 마테리아(prima materia)의 상징으로 보인다. 융에 따르면 최초 물질이 상반적 속성을 내함하고 있는 것은 거의 우주적 관념이다.(욜란 야코비, 유기룡․ 양선규 공역, 『콤플렉스, 원형, 상징』, 경북대출판부, 1986, 148쪽)


위와 같은 방식으로 ‘확장’을 꾀하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하나하나 연역적으로 얻어냅니다. 뿔 달린 뱀의 양성적 속성, 하나와 넷의 상징성, 원과 사각형의 의미, 푸른색과 안개의 상징성, 큰 동물과 작은 동물들의 관계, 죽음과 재생의 문제 등등을 설명합니다. 이를테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서 자기들 방식의 한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젊어서 이런 분석과 해석을 접했을 때는 상당히 신기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공부해 보면 재미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제 ‘해석’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세계는 저의 해석과는 전혀 관계없이 홀로(멋대로?) 존재합니다. 무엇이든 ‘확장’해서 ‘아는 것’에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을 조금 더 안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능하면 ‘꿈 없는’ 잠을 원합니다. ‘뿔 달린 용’ 한 마리보다는 가지런히 누운 ‘가재미’ 두 마리가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다만, ‘상징’을 무의식의 심연에 가라앉아 있는 그 무엇(아키타이프)이 해면 위로 쏘아 올리는 자기 이미지로, 마치 어디서부터 오는지는 모르지만 흐믈흐믈 바다 위를 진창으로 떠다니는 해파리 같은 것으로, 다이내믹하게 파악한 융의 생각은 좀 존중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꿈’과 ‘작은꿈(개꿈?)’의 구별도 유용하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큰꿈’의 존재를, 비전을 보는 인간의 능력을 믿습니다. 인간이 ‘영원히 이해 못할 어떤 원천’을 안고 사는 존재라고 파악하는 것이 현재까지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 설명 모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대여섯 살까지의 짧은 기간에 형성된 ‘상처’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좌지우지한다는 생각은 아무래도 좀 ‘실전에 약한 화무(花武)’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면, 논리의 ‘풀 장’에서만 배운 수영 솜씨와 같은 것이어서 나이 들어 경험하는 ‘인생의 바다’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물론, 확실한 건 없습니다. 그냥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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