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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02.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논술의 실제 4 - 주워 온 자식, 데려 온 자식

4. 주워온 자식데려온 자식  

   

[제시문 1]     

자공(子貢)은 『논어(論語)』의 실제적 주인공이다. 안회(顔回)는 너무 완벽하게 이상화되어있고, 자로(子路)는 최다 출연자이기는 하지만 항상 조연의 역할에 머물고 있다. 자공은 자로를 제외하면 『논어』의 최다 출연자이다. 그리고 그는 항상 스승 공자(孔子)와 맞대결하면서 깨달음을 축적해가는 주인공적 캐릭터로서 등장한다. 자공이 없으면 『논어』도 무너진다.

공자의 삶이 자로와의 만남과 더불어 시작했고 자로의 죽음과 더불어 끝이 난 것이라면, 공자의 자공과의 만남은 공자의 삶의 크나큰 행운이었다. 공자는 자로와 더불어 죽었지만, 자공과 더불어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대하다! 자공이여!

자공의 성이 단목(端木)이라는 사실은 아마도 그의 집안이 목재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게 한다. 사(賜)라는 명(名)과 공(貢)이라는 자(字)의 연관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원래 위(衛)나라의 조정에 물자를 납품하는 어용상인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자공을 가리켜, “재화를 늘리는 데 있어서는 도사! 억측을 해도 번번이 들어맞는다(「선진」편).”라고 매우 정확하게 세속적인 기술을 하고 있다. 자공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증권가의 큰 손”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교단은 실제적으로 자공에 의해서 그 재정이 확보되었던 것이다. 자공이 없었더라면 공자 교단의 형성은 어려웠을 것이다. 자공이라는 젊고 영민하며 항상 배움에 게으름이 없는 물주(物主)의 사심 없는 헌신 때문에 공자 교단이 유지된 것이다. 그런데 ②공자는 자공에 대한 평가에 매우 인색하였다. 그러면서도 결코 자공을 천대하지는 않았다.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원칙에 비교하면 공자가 자공을 평가하여 “너는 한 그릇에 불과하다”(女 , 器也. 「공야장」)라고 한 것은 매우 인색한 평가다. 그러나 어떤 그릇이냐고 묻자, “호련(瑚璉)”이라는 찬란한 옥그릇에 비유한 것은 자공의 역할을 충분히 인정한 것이었다. [김용옥, 『도올논어 1』 중에서]     

[제시문 2]     

공자와 중요 제자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추가 가능하다. 먼저 자로와의 관계다. 공자가 자로를 냉대한 까닭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공자에게 자로는 하나의 그림자 인격이었다. 그는 공자의 물리적 힘(force)이기도 했고, 욕망의 대리 분출 자이기도 했다. 그의 여전한 위정지도(爲政之道)에 대한 집착이 공자를 양가감정으로 몰아넣는 측면이 있었다. 자로가 공자의 ‘이념의 사생아(데려온 자식)’로 자리매김될 수도 있다는 유추는 그런 면에서 가능하다(이때 안회는 ‘주워 온 자식’이 된다). ‘주유천하(周遊天下)’로 대변되는 공자의 정치적 야심을 자로가 물려받고 있다는 것이다. 실패한 야심가로서 공자는 그러한 자로와의 정신적인 혈연관계에 대해 애증병존의 양가감정을 드러낸다. 그림자 인격은 언제나 냉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만큼 무의식적인 집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공자는 자로를 아끼며 냉대한다. 다른 하나는 제자를 보다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교사로서의 방법적 선택(교수법)이다. 자로는 기질이 과격하고 하나 들으면 하나만 알아서 늘 앞서 나가는 성격이 있었으므로 공자는 언제나 그를 말리는 입장에 선다. 하나를 알면 그것에만 매진하는 성격이었으므로 늘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의 문법으로 그를 가르친다.

자공의 경우는 ‘자공의 자질(資質)’ 자체가, 공자의 교육관으로 볼 때, 이미 고평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객관적 측면과 공자의 콤플렉스(잘난 제자에 대한 스승의 견제 심리)라는 측면, 양 방향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안빈낙도(安貧樂道)로 일관하는 공자 말년의 교단(敎團) 목표를 두고 볼 때 그런 맥락 안에서는 자공(자공의 성공)은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집이 부유해도 거만해지는 일이 없고, 가난해도 비굴해지는 일이 없으면 어떻습니까?”라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던 것은 자신에 대한 스승의 평가가 지나치게 인색한 것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그건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난이니 부니 하는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다. 빈부 같은 것을 초월해서, 가난해도 도를 즐기고 부유해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겨낼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면서 자공에게 지족안분(知足安分, 제 분수를 알아서 편안하게 살 것)을 권한다(이때 ‘공자의 콤플렉스’가 거론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공은 공자 교단의 실제적인 물주(物主)였다. 공자도 인간이었던 만큼 스스로 제자에게 업혀 지내야 하는 상황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이라는 심리학적인 유추도 가능하다.

안회와의 관계에서 공자가 보여주는 칭찬 일변도의 몰입적인 인정 태도는 안회야말로 공자가 주장한 안빈낙도의 화신이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공자가 말년에 안빈낙도를 하나의 이념으로 승격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과연 그것이 인간에게 가능이나 한 일인지는 안회가 나타나기까지는 증명할 길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안회의 역할은 공자의 가르침을 ‘황금의 언어’로 만드는 것이었다. 안회가 있음으로 인해서 공자의 말은 지상에서 실현 가능한 가르침이 될 수 있었다. 하나의 이상적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속하는 규범적 언명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자가 안회를 그렇게 떠받들었고(자신보다 뛰어난 제자라고 말했다), 그가 죽었을 때, “내가 회를 제자로 삼은 뒤부터는 다른 제자들이 더욱 나와 다정해질 수 있었는데…….”라고 울면서 탄식하였던 것도 모두 그러한 맥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양선규, 『풀어서 쓴 문학 이야기』 중에서]  

        

* [제시문 1]의 밑줄 친 ①의 이유를 [제시문 2]의 내용을 참조하여 설명하시오. (400자 내외)

* [제시문 1]의 밑줄 친 ②의 이류를 [제시문 2]의 내용을 참조하여 설명하시오. (400자 내외)

* [제시문 2]를 읽고 안회와 자로를 ‘주워온 자식, 데려온 자식’으로 비유하는 [제시문 2]의 필자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논하시오. (900자 내외)  

      

[출제 의도 및 논점 분석]     

* 이번 문제는 이른바 독서 논술에 해당한다. 작은 문제 두 개는 학생(수험자)의 기초 독해력(수학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고, 마지막 문제가 창의적 사고를 평가하는 진짜 논술 문제다.  ①은 공자의 위정지도(爲政之道)를 마지막까지 실행에 옮긴 이가 자로였다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자로는 공자가 자신의 이상을 지상에 구현하는데 필수적인 완력(물리적 힘)을 제공한 제자였다. 출사한 자로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과 동시에 공자의 삶(교육자, 정치가)도 끝난 것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제시문 2]에서 그 내용을 잘 간추리면 된다.

* 공자가 자공에 대한 평가를 인색하게 했다는 것은 첫째는 그의 자질이 그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둘째는 부자 제자에게 얹혀살아야 했던 가난한 스승의 자격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게 [제시문 2]의 필자의 추측이다. ‘자공의 자질(資質)’이라는 측면과 ‘공자의 콤플렉스’라는 측면, 양 방향에서 설명을 하면 된다. 자공 자신이 ‘2% 모자라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공자가 ‘제자에게 업혀 지내야 하는 상황’을 불편하게 여겼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출제자가 원하는 대로 내용을 간추려서 대답하면 된다.

* ‘주워온 자식, 데려온 자식’으로 안회와 자로를 대비시키는 주장은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살피면 그 전제 자체가 허점이 많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단 안회는 스승보다 나은 제자로서 ‘자식’이라는 비유가 적절치 않다. 안회는 배워서 아는 이(학이지지)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아는 이(생이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치는 안회를 아둔하기까지 한 자로와 ‘자식’이라는 평면적인 개념으로 대비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두 사람이 공히 공자의 제자라는 것 때문에 한 사람은 주워온 자식으로, 다른 사람은 데려온 자식으로 규정된다는 것이 그렇게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밝히면 된다. 이런 경우를 두고 “하나를 취하기 위해서 만 가지를 버린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라고 호되게 비판해도 될 것이다. 조금 더 비판의 심도를 깊게 한다면, 공자의 젊어서의 ‘위정지도’와 늙어서의 ‘안빈낙도’의 관계를 상호대립적인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확대, 승화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도 있다는 점을 덧붙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첫 줄은 어떻게?]     

“‘하나를 얻기 위해 만 가지를 버린다’라는 말이 있다. ‘주워 온 자식, 데려 온 자식’이라는 필자의 관점이 바로 그런 경우가 된다.”, “공자의 사상은 수 천 년을 이어오면서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필자의 ‘주워 온 자식, 데려 온 자식’이라는 관점도 그러한 생각거리 중의 하나다.”, “공자에게는 72명의 유명한 제자가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안회와 자로이다. 그 두 사람을 ‘주워 온 자식, 데려 온 자식’으로 비유하는 필자의 주장이 일견 신선하다. 그러나...”, 등으로 서두를 삼고 차근차근 자신의 생각을 이어나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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