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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02. 2019

교언영색 하는 자들에게

회개와 사랑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은 항상 지나친 요구를 한다”라고 한 페친이 적어놓은 것을 봤습니다. 동감입니다(동병상련입니다). 그래서 한 때, 못된 행동강령을 하나 세워둔 적이 있었습니다(거의 습관적으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웃는 낯에 침 뱉어라”였습니다. 악인을 가장하고 모질게 대하는 거였습니다. 그래 보면 진짠지 가짠지 금방 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사람의 일인지라 실수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작(自作) 의도를 가지고(혹은 본성적으로) 가짜 웃음을 보이며 접근하는 사람을 차단하는데에는 그만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 실수로 쫓아보낸다고 죽을 일도 없어 보였습니다.

살아보니 그렇습니다. 그만한 일에 토라져 가는 사람이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정말 크게 실수해서 그들의 ‘친절’에 속아 잘못 발을 한 발 내디디면 정말이지 크게 낭패(狼狽, 바라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기대에 어긋나 딱하게 됨)를 겪습니다.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 영영 복구가 불가능할 때도 생깁니다(인생 중반기에 그런 친구 한 사람을 잘못 만나서 크게 고초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에 방향타를 잃고 좌충우돌한 적이 있었습니다.). 친절한 이를 만나면 반드시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얼굴을 꾸미는 이들 중에는 인한 이가 드물다)’이라는 공자님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을 그때 도 한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예수께서 이적을 가장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그 동네들을 꾸짖으셨다. “코라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이적을 티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너 가파르나움, 네가 하늘에 오를 성싶으냐? 저승에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행해진 이적을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오히려 더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오복음, 김근수, 『행동하는 예수』(메디치, 2014) 중에서]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 같은 곳들이 아마 ‘교언영색’, '배은망덕'한 땅들인 것 같습니다. ‘가파르나움’은 예수가 몸을 담고 사는 고장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그곳에서 많은 이적을 베풀었지만 그땅들은 ‘회개’를 모릅니다. 예수는 그곳 사람들을 사랑했지만 그들은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땅들 전체를 들어 저주를 내립니다. 비단 ‘예수의 땅’만 그랬던 것은 아닐 겁니다. ‘하는 일 없이 사랑받은 자’들은 대체로 ‘회개’를 모릅니다. 그래서 자멸(自滅)을 도모합니다.


‘회개’와 ‘사랑’은 구원의 최종병기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가진 유일한 해결의 수단입니다. 불공평할 때도 있고 일방적일 때도 있지만, 과정상의 그 모든 불협화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그것의 가치는 그 행위(회개와 사랑) 안에 무엇인가를 해결해 보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 안에서 어떻게든 끝을 보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해결의 의지’가 결국은 인류의 삶을 발전시켜 온 근본적인 동력입니다. 우리가 소돔처럼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유일한 비책이었습니다. ‘회개’와 ‘사랑’을 모르는 ‘교언영색파’들이 모여서 힘을 가지게 되면 세상은 거꾸로 갑니다. ‘해결의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거꾸로 간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할 때 이 ‘힘센 어중이떠중이’들은 그들 ‘선의의 해결사’들의 약점을 들추어내어 저항합니다. “너도 별 수 있느냐?”, 뻔뻔스러운 그들의 선동은 죄에 물든 대중을 쉽게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늘 세월 앞에 무력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회개’와 ‘사랑’이라는 인간의 타고난 유전자가 제 힘을 발휘합니다. 옷장 속 깊이 숨겨둔 ‘베옷’을 다시 꺼내 입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 ‘모르는 자들’은 그 앞에서 반드시 꺼꾸러집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해결’을 기다리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많아도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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