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Mar 05. 2019

당신의 품삯

공평이란 무엇인가?

당신의 품삯


살다 보면 불공평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최소한, 하나 주면 하나 되받고, 둘 주면 둘 되받아야 할 터인데 그렇게 공평하게 일이 처리될 때가 흔치 않습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아도 시원찮을 텐데 말로 주고 되로 받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가장 억울한 것은 ‘날로 먹는 자’들을 두 눈 멀쩡히 뜨고 볼 수밖에 없을 때입니다. 하루 종일 땀흘려 일한 사람과 마칠 때쯤 나타나서 슬쩍 한 발 끼어든 자가 똑같은 대접을 받을 때는 누구나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조직이나 단체가 불협화음을 내게 되는 데에는 대체로 그런 일들이 사단(事端)이 될 때가 많습니다.


...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하고 일렀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돈을 받아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하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김근수, 『행동하는 예수』(메디치, 2014) 중에서]


본문 단락은 믿음으로만 구원된다는 바울의 주장과 아주 가까운 것으로 흔히 해석되어 개신교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겨진다. Julicher, Bornkamm, Jeremias, Jungel 등 쟁쟁한 개신교 학자들은 본문 단락을 ‘복음의 핵심’Evangelium in nuce이라 주장한다. 반면 카톨릭은 “여기 있는 형제자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최후심판 이야기(「마태오」25,31~46)을 「마태오복음」의 핵심으로 본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본문은 주로 비유적으로 해설되었다. 루터는 신부와 수도자를 이른 아침에 일한 사람으로, 가장 늦게 일한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해설하였다. 그 후 개신교는 이른 아침에 일한 사람을 행업(行業)으로 구원을 노리는 사람, 마지막에 일하러 온 사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으로 대비시켰다. 아담에서 예수 이전까지의 유다인을 이른 아침에 일한 사람, 예수 이후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을 마지막에 일한 사람으로 여기는 반 유다적 해설도 있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일한 사람을 유다인, 정오에서 오후까지 일한 사람을 그리스도인, 오후에서 해질 무렵까지 일한 사람을 이슬람교도라고 보는 해설이 이슬람교 문헌에 있다. 모두 성서 본문의 뜻과 거리가 먼 해설이다. 성서를 제대로 모르는 신자들은 엉터리 설교에 놀아나기 쉽다.
본문 단락은 믿음이냐 행업이냐를 따지는 단락인가. 그렇게 보기 어렵다.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인은 품삯을 주지 않았다. 일한 사람들은 모두 일당을 받았다. 주인은 일꾼들의 일한 시간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너그럽게 대우했다. 주인이신 하느님의 너그러움을 강조한 단락이지 일한 사람을 무시하는 단락이 아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는 단락이 아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촉구한다. [김근수, 『행동하는 예수』(메디치, 2014)]


문자(文字)에 현혹되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신념이 조장될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행업도 중요하고 믿음도 중요한 것이 종교의 세계입니다. 그 둘은 같이 가는 것이지 따로 가거나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할 뿐이고 ‘품삯’을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의 몫입니다. 그 ‘기본’을 모르면 이미 그는 ‘종교인’의 자리를 박차고 나간 속인입니다. ‘무엇이 가장 핵심이다, 무엇이 본질이다, 무엇이 없으면 무엇이 안 된다’라는 것들은 모두 속세의 계산법입니다. 그저 인간들이 바라는 ‘품삯’일 뿐입니다.

저는 이 ‘포도원의 비유’가 ‘인간들끼리의 화목’을 강조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득권을 내세우지 말고,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해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로를 어여삐 여기라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앞서 시작한 이들은 ‘주인과 맺은 계약’만 생각하고, 뒤에 끼어든 자들은 ‘앞선 자’들이 지닐 인간의 계산법이 무시된 데 대한 ‘불평지기’를 항상 생각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글쓰기 인문학 10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