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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06.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제5강 - 3. 박물관을 짓자


박물관을 짓자     


이제 본격적으로 제목에 이기는 글들을 리뷰할 시간이다. 앞에서는 연암의 전투 이론(글쓰기 원론)과 이성복의 실전(시 작품)을 통해 제목에 지지 않는 글쓰기의 이론과 실제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영화 감상문 두 편을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제목에 이기는 글쓰기 과정’을 검토해 본다. 우선 큰 제목 ‘박물관을 짓자’가 무슨 의미인지 독자들은 궁금할 것이다. 이 제목의 의미와 가치가 본문에서 밝혀져야 한다. 그것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함도 물론이다. 텍스트가 되는 영화는 <최종병기 활>(김한민, 2011)과 <푸른 소금>(이현승, 2011), 그리고 <음식남녀(飮食男女)>(이안, 1994)이다. 앞의 두 편을 묶어서 한 편, <음식남녀>만 다루는 한 편, 그렇게 두 편의 글을 써서 우리의 목적에 맞는 학습 자료로 사용한다. 두 편 다 예전에 썼던 것인데 이번에 조금씩 다시 손을 보았다.   

   

<박물관을 짓자최종 병기 활 >

영화 <최종병기 활>(김한민, 2011)과 <푸른 소금>(이현승, 2011)을 봤다. 인터넷으로 다운을 받아서 두 편 연속으로 봤다. 영화에겐 미안한 일이다. 영화관에 가서 종합예술 대접을 못 한 것에 대해선 사과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서사의 구성 요소로서의 박물(博物)은 필수다. 이야기라면 어떤 식으로든, 정보 공급처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게 이야기의 오래된 사회적 기능이고 효용이다. 물론 지금은 ‘최종 병기’급 대접을 받지는 못한다. 소설이나 영화 말고도 유용한 정보 제공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찾는 사람은 예나 제나 거기서 새로운 정보를 찾는다. 신기한 것일수록 좋다. 그래서 이야기 예술은 체계적으로 한 우물을 파서 독자나 관객이 원하는 그 ‘새로운 정보’나 ‘감추어져 왔던 정보’를 속속들이 알게(느끼게) 해 주려고 노력한다. 생존과도 직결되어 있는 것이라 그것을 외면할 수 없다. 가능만 하다면 작품 안에 작은 박물관 하나쯤은 들어앉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관객이나 독자의 호응을 제대로 얻어내려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그게 서사 장르의 운명이다. 영화라고 해서, 화면 중심이라고 해서, 그 의무가 완전히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자칫, 그 소명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면 감독(제작자)의 행로에 큰 제동이 걸린다. 

두 영화 다 제목만 봐서는, 하나는 활 박물관이고 다른 하나는 소금 박물관이어야 한다. 그런데 <푸른 소금>의 제목이 해석학적 코드가 아니라 상징적 코드 쪽에서 운용되는 바람에(감독의 의욕 과잉이 아닌가 싶다) 박물관 성격이 좀 오락가락했다. 제목을 확실히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주 전시품이 요리였다가 총이었다가 한다. 어쨌든 두 편 다 ‘박물관’ 수준은 기대 이하였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라는, 광고 문구 덕에 더 유명해진 아포리즘적 대사 때문에, 늙은 이야기꾼의 일원으로서 활 박물관에 대한 기대가 컸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무망(無望)이었다. 일단 제목에는 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활이 ‘최종병기’가 되어야 하는 확실한 ‘한 칼’이 없었다. 이를테면, 주된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결정력을 가진 화기(火器)’가 되는 상황이나(<신기전>), 주인공이 ‘인간적 성숙’에 그것이 ‘최종적’으로 기여하는 정황(<와호장룡>의 청명검) 같은 것이 설득적으로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곡사(曲射)나 애깃살 정도의 신기(新奇)로는 많이 부족했다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활 제작 과정이나, 활과 화살의 구성과 상호작용, 인체와 기물(器物) 사이의 상호작용, 숙련도에 따른 활쏘기 능력의 차별성 같은 것을 좀 더 확실하게, 세밀하게, 묘사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남이(박해일)가 자기 혼자(스승도 모르게) 무예를 익힌다는 것(그것도 입신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은 아무래도 리얼리티가 많이 결여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무기를 쓰는 무예는 다 그렇겠지만, 특히 활과 같은 예민한 기물을 쓰는 무예는 고비고비마다 도움을 주는 스승이나 선배의 가르침이 없이는 일이십 년 내에 경지에 이르기 어렵다. 더군다나, 영화에서는 주인공 남이가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의 무공은 더욱더 설득력이 떨어진다. 최종 병기로서의 활은 그야말로 실전 무기다. 주로 집체적 살상을 도모할 때 사용되는 집단 무력(무기)이다. 그게 막강한 개인 전투력으로 전이되는 데에는 좀 더 용의주도한 배려(복선)가 필요했다. 혼자서 곡사 연습을 부단히 했다는 것만으로는 좀 부족했다. 살의(殺意)를 가지고 빠르게 움직이는 적과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것과 고정된 피사체를 두고 매일 같은 장소에서 연습을 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무예 영화를 만들 때에는 감독이 무예에 대한 어느 정도의 소양은 갖추어야 하는 것이 관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할 것이다. 그런 점은 <푸른 소금>도 마찬가지였다. 전직 사격 선수를 등장시켜서 소금 총알이나 개머리판 잘라내기 정도의 신기를 보여주는 것으로는 영화가 재미있는 공부 거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사 장르가 ‘재미있는 공부 거리’를 멀리하고는 성공한 적이 없다.   

  

두 영화가 그래도 좀 볼만했던 것은 악역을 담당한 배우들의 재미있는 연기와 화면을 구성하는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었다. 크게 섭섭할 정도는 아니었다. 짜임새 있는 플롯이라든지, 소설을 방불하는 인과성과 전체성 같은 것은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실망 거리도 없었다(만약 그런 것이 있다는 입소문이 돌았으면, 이번처럼 집에서 다운받아서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모르겠다. 이 영화들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까이서 보니까 더 시원찮게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영화는 가까이서 보면 안 된다. <미션 임파서블4>(브레드 버드, 2011)를 1열 좌석에서 보다가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스토리도 안 잡혔고, 액션도 안 살았고, 서스펜스는 아예 없었다. 눈만 아팠다. 30분만 기다렸으면 다음 영화를 기다려 중간 열에서 볼 수 있었는데 그걸 못 참고 입장한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그 영화도 역시 영화 속 ‘박물관’은 별로였다.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편들을 모두 본 사람이라면 오히려 감독에게 이런저런 훈수를 두고 싶을 지경이었다. 전작(前作)들에 반드시 등장하던 ‘불패의 강적’도 이번에는 실감 나게 등장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여주인공의 육체미 빼고는, 전혀 알 수 없도록 하는 영화였다. 그것도 나는 영화를 너무 가까이 놓고 본 까닭으로 여긴다. 그래야 덜 억울하다.     

너무 비판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영화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깎아먹은 것이 아닌가 싶어 반성도 된다. 영화는 엄연한 인문학이다. 아껴야 한다.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환상’이 왜 우리에게 ‘최종 병기’가 되는 것이고, ‘소금’처럼 인체 구성에 필수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까 한다. 이야기가 전적으로 철학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으니 그쪽에 악감정이 있으신 독자는 더 이상 읽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덜 억울하다.

본디 내 손 가까이 있는 것에는, 뻗으면 닿는 것들에는 욕심이 덜 나는 법이다. 사람도 그렇고 물질도 그렇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도 일단 내 손안에 들어오면 한풀 꺾인다. 탐이 덜 난다. 음식도 앉은(선) 자리에서 먹으면 꿀맛인데 포장해서 집에다 놓고 보면 영 맛이 떨어질 때가 많다. 옷도 그렇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과 내 옷장에 들어있는 옷은 같은 옷이라도 전혀 다른 옷이다. 무엇이든, 내 안에 들어올 때는 다 싱거운 모양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의 관계도 그런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항상 박대당한다.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대접받는다. 멀리 있기 때문이다. 그것 이외의 다른 이유는 없다. 그래서 물질보다 정신이 늘 중한 대접을 받아온 것이라면 지나친 망상일까?


눈에 보이는 것을 박대하는 전통은 동서를 막론하고 그 역사가 깊다. 희랍 시대의 아낙사고라스는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기 때문에 세계는 정돈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의 모든 서양식 관념론적 세계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은, 모두 그의 아바타에 불과하다. 이왕주 교수의 『철학풀이, 철학살이』라는 책에서 그런 내용이 알기 쉽게 잘 설명되고 있다. 그 내용에 몇 마디만 첨가해서 그대로 옮긴다.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에서 라이프니츠,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철학자들은 결국 이러한 세계관의 소유자들이었다. 비록 그들이 아낙사고라스의 누스(정신)를 여러 기발한 명칭들로 바꿔 부르기는 했지만 아무도 그의 관념론에서 이탈해 본 적은 없었다. 이를테면 이데아, 부동의 원동자, 단자, 이성, 자아, 세계정신, 절대자 등 아무리 거창한 용어를 동원하는 경우에도 그 세계관의 차이는 모두 오십 보 백보 안에 있었다. 그들 모두,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기 때문에 세계는 정돈되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물론 동양 철학의 주자학, 노장 철학, 양명학 등도 관념론의 또 다른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세계를 지배하는 정신적 원리, 즉 태극이나 도, 이와 기 등은 어떠한 이론의 틀 안에서 전개되든지 결국 동양의 누스들이다(물론 표현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아낙사고라스의 누스는 어쨌든 서양의 태극이다>). 양의 동서가 다르고 시의 고금이 나누어지기는 하나 이 세계관이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은 대동소이하다. 물질은 정신 뒤에 있거나 그림자로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이 보여주는 대담함은 철학이라는 이름을 빌미로 겨우 용서받을 만한 것이다. 이를테면 빤히 보이는 이 책상이나 볼펜, 꽃병, 스탠드 등은 <사유의 눈>으로 바라보니, 있는 게 아니라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연구실이나 세미나 장에서가 아니라 시장 바닥이나 운동장에서라면 그런 말들이 결코 제정신을 갖고 하는 소리로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왕주, 『철학풀이, 철학살이』 중에서]     


그런데, 살다 보면, ‘체험, 삶의 현장’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혀 정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연구실이나 세미나장에서 만들어진 것들을 교실에서 배우고, 어른이 되어 삶의 현장에 비로소 나섰을 때, 우리는 잔인한 그 ‘삶의 진실’ 앞에서 속절없이 당황하고 무기력해진다. 진리는 너무 멀리 있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것을 알고 좌절한다. 그래서 유물론을 찾는다. 인간 기계론과 실존주의가 나오고, 행동만이 내 존재를 보장한다고 믿는 이들이 속출한다. 인간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예수의 말도 어느 유물론자에게는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빵이 아닌 다른 것이라는 게 결국 다른 종류의 빵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빵은 신이니 영혼이니 의식이니 하는 수상한 이름이 붙어 있어 마치 빵과는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그것도 빵이라는 것이다. 가장 세련된 형태의 유물론인 마르크스주의도 결국 이러한 세계관에서 더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로 소설가들이 그쪽 전도사로 많이 활동한다.  

   

... 오늘날 육체는 더 이상 생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것이 심장이고, 코는 허파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육체에서 밖으로 돌출한 호스의 끝이라는 것을. 사람의 얼굴은 소화시키고, 보고 듣고 숨 쉬고 생각하는 육체의 모든 기능이 집결되어 있는 일종의 계기판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 자기 육체에 붙어 있는 모든 것을 명명할 수 있게 된 이래 육체는 인간을 덜 불안케 한다. 또한 우리는 영혼이란 것이 회색빛 덩어리의 뇌 활동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은 학문적 개념으로 감싸이게 되었다. 오늘날 이러한 이원성은 시효를 잃은 선입관으로서 우리는 흔쾌히 그것을 조소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위의 책에서 재인용]   

  

그러나, 그것도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의 일생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깨닫게 된다. 그래서, 또다시 ‘생물(生物)’을 찾는다. 오랜 전통이다. 자연(自然)과 생태(生態)에 귀의하고, 노장(老莊)을 찾고, 생명사상이라는 누스를 또 만든다. 당연히 생물학적 인간관이, 진화론이 다시 활개를 친다. 인간의 이타심도 이기적 유전자 때문이라고 강변을 한다. 그게 종횡 구분의 오류에 기반한 역설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그것들로도 역부족이다. 인생은 ‘설명’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보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내장(內藏)한다. “왜 사느냐?”는 물음이 본체가 만들어질 때부터 내장 하드에 이미 식재(植栽)되어 있다. 모니터와 본체도 하나로 붙어있다. 인생에서는, 그것들이 각각 따로 노는 것들이라면, 무슨 설명을 통해 연결되어야 하는 것들이라면, 이미 순정 부품이 아니라고 보면 된다. 간혹 버그가 끼어드는 경우가 있긴 해도 그것(삶의 목적) 없이 태어나는 인간 본체는 없다. 본체와 분리되지 않는 그 내장 하드를 진화론 같은 외장 하드로 대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본디 외장용에는 추동력이 없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외부적인 것들로는 그 물음(왜 사는가)에 답을 낼 수 없다. 외장 하드는 항상 보충용이거나 비상용일 뿐이다. 본체가 없으면 그것 자체로는 운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 역시 만족할 수 없는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다.

그래서 생각한다. 현재까지 우리가 윈도우(窓)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본체의 추동력은 ‘환상’밖에는 없다. 인간에게는 환상을 보는(꿈꾸는) 능력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본 환상으로 삶을 설계해 왔다. 당연히 환상 없이는 현실도 없다. 윈도우 자체가 환상이다. 그것 없이는 어떤 그림도 우리에게 보여질 수 없다. 그래서 종교가 있고, 윤리가 있다. 그러한 불패의 환상만이 오직 구원이다. 이야기는 그것들을 실어 나르는 최종적인 수레다. 환상을 거역하는 자들과 싸우는 최종병기다. 환상은 늘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지만 그래서 포기할 수 없다. [양선규, 페이스북, 2019. 3.5]     


인용된 글, <박물관을 짓자, 최종 병기 外>는 시작부터 이야기 속에 왜 ‘박물관’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역설한다. 서사 예술 장르의 숙명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각 영화가 마련한 ‘박물관’을 평가한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두 영화 모두 박물관의 소장품이 미약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는 어조다. 

그러나 필자의 속셈은 따로 있다. “인간에게는 ‘불패의 환상’이 꼭 필요하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두 편의 영화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공연히 ‘박물관’을 끌어들여서 두 영화를 흠잡고 자기 이야기를 생뚱맞게 내어놓는다. ‘제목을 깨뜨리고 다시 묶어주는 일’을 다소 거칠게 한 셈이다. 어쨌든 이 글은 제목에는 지지 않는 글이다. 심지어 제목을 희롱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남자의 자격음식남녀>     

<음식남녀(飮食男女)>(이안, 1994)라는 영화를 보면서 생각(선입견) 보다 재미있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과연 사계(斯界)에서는 이미 이름이 나 있는 영화였다. 음식(조리)과 관련된 인간의 제 욕망과 그것의 존재론적 가치를 탐구하면서 인간사의 디테일(주로 남녀 관계)을 세필(細筆)로 꼼꼼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홀아비로 늙고 있는, 사람 좋은 특급 요리사 주 선생과 어머니 없이 다 자라 버린 방년(芳年)의 세 딸, 그리고 주 선생 주변의 ‘사랑을 기다리는’ 여인들. 인물 구성만 보더라도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거기다가 주 선생은 점차 미각을 잃어간다. 누군가 주변(가족)의 도움 없이는 그의 천상지기(天上之技)도 더 이상 빛을 볼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별 일 없으면 그들이 사람이 아니다. 화려한 요리 기술과 먹음직한 음식들,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는 미녀들의 사랑, 가족을 회복하고 유지하려는 눈물겨운 노력들, 다양한 사건과 사물이 등장하면서 만족스런 극적 결말을 향해 영화는 한 걸음 한 걸은 나아간다. 도대체가 급한 게 없다. 어쨌든 영화를 보다 보면, 사람이 산다는 게 결국은 음식남녀(eat, drink, man, woman)의 네 가지 귀퉁이에 어쩔 수 없이 매여 지내는 일일 뿐이라는 걸 실감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와 함께 ‘음식남녀’라는 말이 본디 인간의 식욕(食慾)과 색욕(色慾)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飮食男女 人之大慾存焉)도 저절로 독자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다. 옛 성인들은 음식남녀에 사로잡히지 말고, 문화(文化)를 추구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야 인간이 된다고 가르쳤다. 출발은 그랬지만, 이제 우리는 다시 음식남녀로 돌아간다.

     

그건 그렇고, 그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의 알짜 소감은 좀 달랐다. 한 마디로, <남자는 역시 요리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느닷없이 웬 비문(非文)이냐?", 남자 동지들에게 그런 타박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절 수 없다. 잘 생각해 보면 그건 당연한 이치다. 먹을 것을 공급하는 일(음식)은 고래로 남자들의 몫이었다. 예나제나 여자들의 주 임무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남녀)이다. 물론 일부의 예외도 있긴 하겠지만, 남자가 식량을 공급하고 여자들이 그것을 조리하는 식의 역할 분담은 그 원초적인 역할론에 비견하면 오히려 부수적인 일이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식량을 공급하는 일이 남자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여자들도 얼마든지 바깥에서 식량을 조달한다. 식량 구하기도 예전보다는 수월하다. 이제 그것을 가져오는 것만으로는 남자가 그 역할을 충분하게 인정받을 수 없는 세상이 왔다. 이제 <음식>을 조리해서 갖다 바쳐야 제대로 그 역할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오고 말았다. 결국 여자에게 맡겼던 조리(調理)의 영역, 그 역사적인 여자의 역할도 남자가 다시 찾아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건 어쩌면 무의식이다. 달리 생각해 볼 방도가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판단할 일은 아니다. "그래서 요즘 들어 그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남자들이 TV에 자주 나오는구나." "그들이 사람들(특히 여자들)의 환심을 사는 일이 그래서 당연한 일이었구나." "의사고 교수고 지휘자고 백수고 할 것 없이 남자들이 요리책을 내는 일이 잦은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그래서 결론이 났다. "나도 요리를 배워야겠다(그래서 뭐 하겠다고?)." 그런 생각, 어떻게 보면 다소 엉뚱한 상상이,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우선 쉬운 것부터, 유명한 요리책인 『나물이네 밥상』부터, 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물론 그런 교훈적인(?) 생각들만 주입하는 것은 아니다. 본디 우리 인간 세상은 ‘보기에 아름답다’라는 말을 제일 큰 찬사로 여긴다. 옛날 어른들에게는 ‘모양 나쁘다’라는 말처럼 큰 욕이 없었다. 모양을 생각지 않는 것, ‘모양 빠지는 일’은 체면 없는 것들이나 할 일이라고 여겼다. (요즘 들어 여기저기서 ‘모양내는 일’이 자주 눈에 띈다. 자세한 속내야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가 다시 옛날로, 동방예의지국으로, 돌아갈 모양이다). 그건 라캉 같은 이들이 입에 침을 튀기며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그냥 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일이다(이론가들이 치는 건 늘 뒷북이다). 이 영화에서는, 주 선생이 보여주는 현란한 조리 과정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 중의 하나다. 모양과 색과 냄새, 그 삼위일체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요리는 제대로 된 맛을 뽐낼 수 있는 법, 그 맛있는 요리를 보여주는 것, 혹은 조리 과정 일체를 맛있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그 소임의 대부분을 이미 달성한다. 

    

“타이페이 시내 풍경이 보입니다. 신호등이 바뀌자 오토바이들이 벌떼들처럼 앞으로 달려 나옵니다. 이 복잡한 사거리 풍경은 영화 내내 간헐적으로 반복됩니다. 오래된 가옥의 전경을 보여준 후 카메라는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일요일 만찬. 아버지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고 세 딸은 앉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 선생은 살아있는 민물고기 한 마리를 건진 후 나무젓가락을 끼워서 한방에 놈의 숨통을 끊습니다. 비늘을 벗기고, 포를 뜨고, 밀가루를 묻히고, 기름을 부어 튀깁니다. 흥겹게 요리합니다. 오징어에 칼집을 내고, 고추를 썰고, 돼지고기를 자르고, 무채를 썰고 다 익은 돼지고기를 얼음물에 담급니다. 마당에는 장독대가 있고 처마 밑에는 마늘과 고추를 말리고 있습니다. 주 선생은 닭장으로 가서 닭 한 마리를 잡아옵니다. 요리용인지 개구리도 몇 마리 기어 다니고 있습니다. 접시에는 청경채로 예쁘게 장식을 해놓고, 고기를 굽고 소스를 붓습니다. 닭을 집어넣은 자기 냄비에는 얇은 천을 덮습니다. 주 선생이 즐거운 표정으로 도마 위에 재료를 올려놓고 칼로 다질 때 그 사이로 수십 종의 칼이 보입니다. 요리사 주 선생의 삶이 그렇게 요약적으로 제시됩니다. 그는 숙달된 솜씨로 만두를 빚습니다. 화면에는 감독 리안이라는 자막이 뜹니다. <음식남녀>의 오프닝 씬은 이렇게 화려한 조리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됩니다.” [1994년 칸 영화제에서 본 리안 감독의 맛있는 영화 <음식남녀>(작성자 조르바) 내용 중 인용자 일부 수정]

     

인척 중에 영화의 주 선생에 필적할 만한 솜씨를 지닌 요리사가 한 사람 있다. 외국에서 사는 그 양반이 오랜만에 고국 여행을 와서 우리 집에서 장기 투숙하고 갔다. 영화에서도 비슷한 대사(“음식을 할 때처럼 재료가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가 나오지만, 별 재료도 없는 부엌에 들어가서 임기응변(臨機應變), 쾌도난마(快刀亂麻), 큰 어려움 없이 제법 먹을 만한 것들을 척척 만들어내는 것이 신통했다. 요리 전문가의 손기술을 가까이서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TV 화면으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힘들이지 않고 반죽을 만들고, 썰고, 튀겨내는 것이 과연 능수능란(能手能爛), 보기에 좋았다. 시쳇말로 모양이 났다. 공부든 운동이든 요리든, 어디서든 전문가들은 늘 그렇게 쉽게, 보기 좋게, 모양을 낸다. 저 정도 보여주려면 얼마나 힘들게 익혔을까, 그런 염도 들었다(내가 평생 해 온 글쓰기와 칼쓰기에서 그 정도의 모양이 나는지 반성이 좀 되었다). 그걸 보니 욕심이 나서 두어 종목은 설명을 자세히 내려받아 적어놓고 차차 숙달시키기로 했다.      

육체노동, 특히 손으로 하는 일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유리하다. 체력이 일단 남자 쪽이 더 강하다. ‘만드는 일-작업’에서 일관성 있는 주제가 관철되려면 일단 체력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만지는 감각도 남자 쪽이 조금 더 발달되어 있는 것 같다(이건 주관적 판단이다). 재료 간의 궁합이나 배합비율에도 남자 쪽이 좀 더 분석적인 접근을 하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여자는 전체적인 것을, 한꺼번에 잘 파악하는데 능하다. 남자가 만지는 것에서 우위에 선다면 여자는 보는 것에서 우위를 점한다. 무엇이든 논리로 설명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그걸 우뇌와 좌뇌의 차이로 설명할지도 모르겠다. 요리도 예술이다. 예술을 하려면 일단 우뇌적 감각(감성) 기능이 발달되어 있어야 하겠지만, 좌뇌 없이 되는 ‘작품’은 없다. 모든 ‘만드는 일’의 기획자는 좌뇌다. 결국 양자가 고루 발달해야 좋은 요리사가 된다. 

각설하고, 이제 대세는 요리다. 언젠가 소설가 황석영 선생이 TV에 나와서(고정 패널이다) “나도 작은 양식당을 하나 하고 싶은 게 꿈이다”라고 말했다.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 잡은 작고 소박한 양식당을 하나 내고 싶다고 했다(연세 생각은 안 하신다). 그래서 지금도 어디 가서 좋은 음식을 맛보면 화가 막 난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자기가 꼭 해야 할 일을 남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용심(用心)이 나는 거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조만간에 소설가(전직)들이 내는 요리책도 몇 권 나오고, 여성 소설가가 아닌 남성 소설가가 내는 식당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길 것 같다. 문화(文化)의 시작과 끝이 결국 음식남녀니까. [양선규, 페이스북, 2019. 3.6]     


영화가 음식(조리)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는 것이 필자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음식남녀>라는 영화를 보는 필자의 눈이 많이 부드럽다. <최종병기 활>과 <푸른 소금>을 보는 눈과 많이 다르다. “남자들이 요리를 잘해야 한다”라는 제목의 취지를 온갖 역사적 근거를 다 동원해서 강변하고 있다. 그런 억지 주장으로 영화를 칭송한다. ‘제목을 깨뜨리고 다시 묶어주는 일’에 애꿎은 소설가 동업자들도 끌어들인다.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제목에 지지 않으려는 노력 하나는 가상한 글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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