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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06. 2019

대동강 어머니

사모곡


오랜만에 TV에서 참 좋은 걸 봤다. 인천의 박정희 여사가 사는 모습이 밤늦게 TV로 방영되었다(수신료는 꼬박꼬박 잘 내어야겠다). 나만 몰랐지 이미 할머니는 꽤나 유명하신 분이었다. 어딘가에 실린 소개글을 한 번 보자. “『나의 수채화 인생』의 저자이기도 한 수채화가 박할머니는 한글점자 창안자인 송암 박두성 선생의 딸이다. 그녀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태어나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인천 제2공립 학교에서 3년간 교사로 근무한 뒤, 외과 소아과 의사와 결혼해 평양에서 신혼시절을 보냈다. 그 이후 인천에 거주하며 4녀 1남의 어머니로서 사랑 가득한 교육을 행한 한국적 어머니 상의 아름다운 하나의 전범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삶의 전범은 한 개인과 가정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이웃과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감동의 사회적 모델로 확장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수십 년 동안 사랑과 정성, 그리고 풍부한 감성과 예술적 상상력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아이들과 이웃들에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나의 수채화 인생』 저자 소개, 일부 내용 첨가)


정말이지 좋은 모범을 보여주시는 어른이셨다. 사람마다 받아서 쓰는 것이 다 다른 게 인생이다. 여사는 받은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세상에 돌려주고 계셨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연세도 두분이 비슷하셔서 시청 중에 문득 문득 어머니의 잔상(殘像)들이 화면 위에서 캡쳐되곤 했다. 옛날 어머니들은 왜 그렇게 턱없이 명랑하고 본 데 없이 다 화가였을까? 아흔의 나이에 현역 화가로 활동하시는 박할머니의 삶과 그림을 보면서 난데없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조증이 의심될 정도로, 어머니는 늘 유쾌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의 환경미화에 필요한 그림도 거의 다 어머니 손으로 그려졌다. 말투나 화풍이나 두 분은 너무 닮았다.


곧 시집갈 큰아이가 이제 서른두 살이니, 막내인 나를 낳을 때의 어머니 나이보다 두 살이나 많다. 어머니가 나를 낳은 건 제주도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였다. 사굴로 유명한 구좌읍 김녕리에서 나를 낳았다. 7,8년을 거기서 살았다. 어머니는 늘 ‘그때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라는 말로 나의 출생과 관련된 제주도에서의 삶, 낯설기만 했던 그 이국적인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했다. 제주도는 그렇게 내게 신화가 되었다. 모든 홀로 남겨진 아들들의 신화가 그렇듯, 문맥상 나는 죄 많은 아들이었다. 어머니의 몸이 결정적으로 쇠약해지는 동기를 제공한 나는 그 원죄를 짊어지고 어머니의 강적들, 그 불패의 세속에 대항하여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 했다. 적어도 어머니와 나 사이에서는 그렇게 통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여태 내 분노와 슬픔의 최종적인 배후로 존재한다. 내 신화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연관된 기표는 늘 눈물을 자아내고 노여움의 씨앗을 뿌린다. 그래서 내게 어머니라는 단어는 내내 습기찬 그 무엇이다.

그러나 눈물과 분노의 기표 어머니에게도 황금기가 있었다. 어머니의 황금기는 대동강과 함께였다. 어머니가 가끔 평양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할 때는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평양(‘피양’이라고 어머니는 발음했다)에서는 관사(官舍)에서 살았지. 김일성대학하고는 담장을 같이 썼더랬는데.....”

그렇게 시작하는, 어머니가 들려준 말 중 기억에 남아 있는 그림은 다 끌어모아도 몇 점 되지 않는다. 휴일이면 맏형(이 형은 이북에 남겨두고 월남했다)을 데리고 모란봉에 놀러가곤 했다는 것. 옆 관사에 살던 누구에게 부탁해(아마 교육장쯤 되는 이였을 것이다) 나발이나 불면서 빈둥거리며 놀고 있던 외삼촌을 평양 시내의 한 소학교 교사로 취직을 시켰다는 것. 동란 통에는 끔직한 것도 많이 보았는데, 한번은 일요일 날 B29가 대학 운동장을 때려서 탁구대회 중이던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고, 피를 철철 흘리며, 트럭에 실려 나갔다는 것. 그 후 외삼촌이 징집되어서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었다는 것(출정식 때 외삼촌은 맨 앞에서 나발을 불며 나갔다고 했다. 그 슬픈 이야기도 어머니는 동화 구연하듯이 했다) 등이 전부다. 아마 더 있었을 것인데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 정도다. 아버지가 평양에 간 것은 김일성 정부가 들어선 직후였다. 일본인들이 빠지고 난 뒤의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해주 시멘트 공장의 임시 지배인으로 있던 아버지를 평양 산업성으로 불러올렸다. 어머니에게는 평양 생활이 꽤 만족스러웠던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성분 좋은 노무자 출신 당간부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눈칫밥을 먹고 지내던 해주 관사보다는 훨씬 나았으리라 짐작이 된다. 나이도 젊었고, 나이에 비해 아버지가 받던 대접도 괜찮은 것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거기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짧았던 대동강 가의 황금기가 어머니에게 요구했던 대가는 너무 가혹했다. 스물 다섯살의 어머니는 그 짧은 인생의 황금기를 뒤로 하고 차마 삭힐 수 없었던 모진 이별들을 한꺼번에 다 겪어야 했다. 삶의 안락한 근거와, 부모와, 동생과, 자식을 모두 잃어야 했다.

출신 성분이 나빴던 아버지는 매일같이 자아비판에 시달리다 요양을 핑계로 장수산으로 들어가고, 친정에 내려가 있던 어머니는 어느날 갑자기 월남을 결심한 아버지에게 인편으로 연락을 받았다. 인천으로 갈 것이니 언제까지 어디로 오라는 것이었다(아버지는 인천상업 출신이다).


“눈발도 어지간한데 큰아이는 두고 가려무나. 길어도 한두 달이면 돌아올텐데...”


사정을 모르던 외할머니는 새벽을 기다려 집을 나서는 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데리고 가야죠.”


어머니는 큰아이의 손을 잡고 동구 밖까지 나왔다. 작은아이는 등에 업었다. 살을 에는 바람이 눈발을 모래알처럼 흩뿌렸다. 앞이 캄캄했다. 머리에 인 보따리는 무겁기만 한데 날은 어둡고 갈 길은 멀었다.


“나, 할머니한테 갈래!”


그때 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따라오던 외할머니 쪽으로 달려갔다. 달려 들어온 아이를 치마폭에 감싼 외할머니는 멀리서 어여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게 끝이었다. 왜 그렇게 허무하게 아들과 헤어졌는지 어머니는 더 이상 설명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을 끔찍하게 여겼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나한테만 소곤거리듯 말했다. 너라면 어떡켔니? 설마하니 그런 생이별이 있을 줄 어떢케 알았갔니? 


“그게 다 니 아버지 탓이란다. 좀 찐득하게 참고 지냈으면 될 일이었는데, 그렇게 싫은 소리 듣는 게 싫어설랑은.....”


그렇게 아버지도 죄인이 되었다. 어머니도 그것만이 진심은 아니었다. 그런 말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어서였다. 자식을 버리고 온 어미가 무슨 할 말이 따로 있었겠는가. 그건 나중에 알았다. 외할아버지는 왜정 때 수원고농을 나온 인테리였고 해방 직전에 돌아가셨다. 학창시절 사상운동을 했던 친구들이 여러 명 평양에 있었다. 외삼촌이 아무런 자격도 없으면서 하루아침에 교사로 발령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어머니에게는 생의 양극단을 다 보여준 것이 바로 대동강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원망, 자기혐오를 가리기 위한 명랑(明朗)을 보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어머니는 마흔이라는 이른 나이에 부모와 첫아들과 하나뿐인 동생과 그리고 그 나머지 것들과도 완전히 헤어졌다. 나와는 10년 남짓 이 세상을 같이 했을 뿐이다. 생각하면 어머니는 나에게 많은 짐을 넘기고 가셨다. 너무 일찍 어린 아들에게 당신의 짐을 부리셨다. 


10년 남짓, 그 짧은 사이, 어머니가 내게 들려준 말 중에서는 그래도 대동강이 가장 볼 만했다(어제 박정희 여사가 평양 시절을 회고할 때 어머니가 잠시 내려오셨다). 대동강, 어머니의 황금기, 그 볼 만했던 청춘이 그나마 나에게는 위안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길거리마다 널려있는 대동강이란 반점 상호를 볼 때마다, 그 춘장 냄새 요동치는 간판을 볼 때마다, 출처를 알 수 없었던 불같은 용심(用心)이 불쑥불쑥 돋곤 하던 것이...


<201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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