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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06. 2019

벌레 같은 사랑, 소나기

소설의 심리학적 이해

벌레 같은 사랑, 소나기


"인간은 벌레다", 생물학적 인간관에서는 그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유전자가 자신의 존속을 위해서 시키는 것이고, 우리 인간은 오직 그 명령을 이행하는 기계적인 존재, 이를테면 숙주(宿主)에 불과하다고 하니 우리 신세가 벌레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엉뚱한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여러 고급 종교의 ‘말씀들’도 따지고 보면 그것(‘인간은 벌레다’)을 에둘러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상(我相)은 본디 없는 것이고, 인간은 한갓 절대자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과, 생물학적 인간관의, 인간은 그저 유전자의 숙주에 불과하다는 것이 결국 같은 말이겠기 때문이다. 두 말씀 다 인간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정되고 있는 존재일 뿐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동아시아의 해방담론, 『장자(莊子)』에서도 그 비슷한 취지를 볼 수 있다.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 나오는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 이야기다.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절름발이에 꼽추에 언청이인 사람)이 위나라의 영공(靈公)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했다. 지혜가 깊고 사리에 분별이 명확해 영공은 그의 말에 아주 흡족해 했다. 그 뒤로는 영공이 보기에 온전한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들의 목이 야위고 가냘프게 보였다(而視全人 其脰肩肩). 인간의 감각적 판단이 자립(自立)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종속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무엇에 홀린듯이 온전한 신체를 불완전한 것으로 보게 된다는 것, 사람의 인식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라는 것, 우리의 생각을 좌우하는 것은 눈 앞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 뒤의 어느 곳에 있다는 말이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엇을 쓰든 그것을 조정하는 것은 언제나 ‘뒤’에 있다. 앞에 둔 것은 그저 ‘벌레’일 뿐이다. 그런 입장에서 「소나기」를 한 번 살펴보자. 황순원의 「소나기」는 많은 이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첫사랑 이야기다. 초등학교 때 형의 국어 교과서에서 처음 그것을 훔쳐보고 감동을 받았다. 두어 번 연속으로 읽었다. 나중에 교사가 되어서 그 작품을 어떻게 가르쳐야 되나, 교사용 지도서나 참고서 같은 것을 봤더니, ‘소년기의 청순한 사랑’이라고 가르치라고 되어 있었다. 작가(3인칭) 관찰자 시점. 길가다 만난 농부의 ‘소나기가 오겠다’는 말은 복선. 대층 그런 것들이 눈에 띄었다. 마음에 차지 않아서 나중에 박사 논문을 쓸 때 소재로 삼았다.


「소나기」를 만들고 조정하는 유전자는 모성(母性) 콤플렉스다. 황순원 선생은 소설 「소나기」로 어머니를 이야기한다. 어머니가 있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 특히 남자들에게는 평생 강하게 작용하는 것, 어떤 예술가들에게는 창작의 동력을 제공하는 것, 그 모성 콤플렉스가 「소나기」의 유전자다. 먼저, ‘콤플렉스(complex)’라는 말에 대해 의견 조절을 좀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말이 질병과 관련되어 있다는 편견부터 버려야 한다. 콤플렉스는 마음 상태가 좀 복합적이라는 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 안에서 어떤 에너지가 흐를 때(심리라고 총칭할 수도 있지만 그 표현으로 포괄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것이 한 부분에 가서 좀 복잡한 반응을 야기할하는 경우 우리는 그곳(공간적인 비유다)을 심리 에너지의 복합적인 결절점(매듭),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반도체와 흡사한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에너지 흐름의 왜곡이 일어나고 강도에도 변화가 오는 부분이다. 모든 작가들이 다 그렇듯이, 황순원 선생에게도 그것이 창작의 원동력을 제공한다. 그 지점이 어디냐는 것은 물론 추측이다. 소설을 보고 유추한다. 소설은 전해 내려오는 콤플렉스의 보고다. 그것을 읽고, 그것을 쓰면서, 우리는 우리 안의 콤플렉스와 경쟁도 하고 화해도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그런 것이 필요 없으면 물론 해탈의 경지다).


「소나기」가 모성 콤플렉스의 소산, 내 안의 작은 인간, 아들 연인(son-lover)의 사모곡이었다는 것은 ① ‘소녀’가 ‘높은 물’에서 스스로 내려온 존재라는 것(선녀), ② ‘소년’이 수동적인 성(性) 파트너라는 것(어린 연인), ③ ‘소녀’가 죽는다는 것(희생의 연인), ④ ‘소녀’가 죽으면서 ‘소년’의 체취가 묻어있는 스웨터를 같이 묻어달라고 부탁하는 것(불멸의 연인), 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무시간성 위에서 전개된다는 것(심리소설),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소녀는 소년에게 스스로 와서, 그에게 삶의 지극한 즐거움을 주고, 죽어서 불멸의 연인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언제 어디서 일어난 일인지 몰라도 상관없다. 다 아는 일이지만, 그런 줄거리, 그런 사랑은 당연히 지상(地上)의 연애에서는 없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스토리텔링이다. 그런데 모두 언젠가 있었던 일인 양 받아들인다. 어떤 이는 작가의 실제 소년 경험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래서 그건 공동환상의 영역에 속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무의식적 원망(願望)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나기」의 사랑은 지상에는 없다. 다만 우리의 숨겨둔 욕망 안에서나 있을 뿐이다. 있다면, 오직 아들 연인의 사모곡, 그런 연인(어머니 같은)을 만나고 싶은 무의식적 충동의 예술적 표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황순원 소설은 언제나 에로티즘을 그 한 가운데에 둔다. 그가 다루는 사랑 이야기는 다종다양하다.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격동기의 사랑, 육체적 사랑, 심정의 사랑, 신성의 사랑, 소년기 사랑, 청춘의 사랑, 파멸의 사랑, 구원의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름 붙이기 힘들 정도의 사랑, 정말이지 사랑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그 중에서도 소년기 사랑에 대한 선생의 특별한 관심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아마 선생은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 꼭꼭 감춰둘 수도 있었던 ‘아들 연인’을 기꺼이 무대 위로 올려보내신 것 같다. 그 덕에 여태껏 내게도 선생이 내리신 지상의 선물이 귀에 생생하다.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라는 소설 속의 한 대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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