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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07.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제6강 - 화이부동, 맥락을 살리는 글쓰기1

6. 화이부동(和而不同), 맥락을 살리는 글쓰기       


코드와 맥락 혹은 오해와 편견     


제 5강 서두에서 연암의 ‘소단적치인’을 공부하며 글에는 ‘결’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접했다. 글 전체를 타고 흐르는 어떤 흐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흐름 안에서 각기 다른 요소들이 하나로 뭉친다. 그런 흐름, ‘결’이 있는 글이 좋은 글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 각기 다르면서 큰 흐름 속에서 조화롭게 하나를 지향하는 경지, 그 경지가 보이는 글이 올바르고 멋있는 글이다.  

맥락(脈絡, context)이라는 말이 연암이 말한 ‘결’을 대신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현재로는 그 말밖에 없어서 그 말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글의 ‘결’은 글을 쓰는 이의 기상이나 윤리, 품성이나 의지에 따라서 형성되는 경향이 큰데 맥락이라는 말에는 그런 요소에 대한 고려가 충분치 않다. 그것보다는 글이 탄생하는 상황이나 환경, 글의 표층구조 아래에 놓여 있는 사회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의미 부여가 큰 개념이다. 그런 전제 위에서, 글에는 ‘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맥락을 살리는 글쓰기’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널리 알려진 로만 야콥슨의 의사소통의 도식부터 일별해 보자.     

                                   맥락(context)

                                   접촉(contact)

화자(speaker)-------------메시지(message) ---------------청자(hearer)

                                   코드(cord)        

화자와 청자는 각각의 심리적 주체이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서 전달되는 메시지에는 접촉의 방식이나 공유하는 코드(문법체계), 그리고 두 주체의 사회역사적 환경에 의한 변수 이외에도 불투명한 심리적 요인이 이미 개입해 있다. 동시에 각 요소들의 상호텍스트성은 우리의 언어가 포착해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화자 중심(심리비평), 청자 중심(수용미학), 메시지 중심(형식주의 비평), 코드 중심(신비평), 맥락 중심(사회역사적 비평), 접촉 중심(소통 미학) 등의 나누어서 설명하는 것이 사실상 별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글을 쓸 때 가장, 혹은 유일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 바로 맥락이다. 이때 ‘맥락’은 각 요소의 상호 작용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글 밖의 맥락과 글 안의 맥락을 잘 포착하고 잘 운용해야 한다. 각 소재들의 불화를 다독여서 그것들이 협화(協和)할 수 있도록 수긍되는 논리를 개발하고, 적절한 비유(은유와 환유, 특히 환유)를 제시하여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 주제적 측면에서 대의와 명분을 내세울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예시가 될 수 있는 글을 살펴보도록 하자. 한 종교 서적에 대한 짧은 독후감이다.


<원수와 이웃>  

   

기독교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일 것입니다. 그 말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저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사랑'보다 ‘원수’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 제게는 ‘원수’라 할 만한 존재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나이에 스스로 만든 ‘원수’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저 ‘미운 놈’ 한두 명 정도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해 듣고는 내 ‘원수’가 누군지 곰곰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단 ‘도마렛(서라)!’을 외치는 왜놈 순사들을 꼽았고(당시 즐겨 보던 만화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공산당과 김일성을 꼽았고(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그 다음엔 중공군, 그 다음엔 도둑놈(당시에는 도둑질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그렇게 ‘원수’들을 정해 나갔습니다. 모두 저와는 직접적인 원한이 없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 말이 진정한 호소력을 가지게 되는, 제 개인적인 ‘원수’가 생기게 되는 것은 아주 오랜 뒤였습니다. 10년에 한 명 정도? 그렇게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나이가 드니 다 희미해졌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제게 ‘용서할 수 없는 자’가 존재하는지 저 자신도 궁금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을 애초에 듣지 못했다면 그렇게 희미해질 수 있었을까라는 궁금증도 듭니다. 아니면 그 반대로 ‘원수’ 자체가 안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얼핏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 비슷한 일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말씀에서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이웃’이라는 말이 그렇게 ‘살가운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나서부터는 ‘이웃’은 결코 남이 아닐 것이라는 이상한 신념 같은 것이 제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언젠가 토플러의 말을 빌려서 “네 이웃이 곧 세계다”라는 말을 전한 적도 있습니다만(사고는 글로벌(global)하게 하고 실천은 지역적(local)으로 하자), 기실 토플러의 그런 주장도 그 기원을 찾아가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두 말씀 다 “사랑하라”라는 술부가 중요한 말인데 이상하게도 삐딱하게 그 목적어에 꽂히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마 타고나기를 그렇게 2% 부족하게 타고난 것 같습니다. 

    

...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을까’라는 루터 식 고뇌를 예수는 하지 않은 것 같다. ‘내 삶으로 인해 내 이웃의 삶이, 특히 가난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라고 예수는 고뇌한 것 같다. 이웃 종교인 불교나 도교 역시 이웃사랑을 강조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러나 니체에게 인간의 약함과 위선일 뿐이다. 독일 작가 하이네(Heine)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만일 하느님께서 나를 행복하게 하시려면, 내 원수 예닐곱을 나무에 못 박는 기쁨을 내게 주시기를… 인간은 그 원수를 사랑해야 하지만 원수들이 나무에 못 박히기 전에는 안 된다.” 하이네의 심정이 우리 심정이리라. 원수 사랑이 그리 쉬울까. 원수를 사랑함은 하느님의 완전함에 다가서는 행동이다. 하느님 사랑을 깊이 느끼지 못한 사람은 이웃 개념을 확장하기 어렵다. 하느님 사랑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성 노동자 여성도 세리도 박해하는 사람도 모두 이웃이 된다. 원수 사랑이 어렵다면 우선 이웃 개념을 넓힐 필요가 있겠다.[김근수, 『행동하는 예수』, 메디치, 2014]

      

종교는 인생의 필수 모티프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과 이유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랑’은 물론 ‘자기 사랑’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겠지요. 종교를 아편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종교를 싫어하는 까닭은 사실은 종교 그 자체가 싫어서라기보다는 잘못된 종교적 태도, 즉 빗나간 ‘자기 사랑’이 싫어서입니다. 우리가 기복신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자기 사랑’은 아편이 맞겠죠. 사회 전체로 볼 때는 독버섯과 같은 것이겠고요. 생각해 보니 제 경우는 ‘왔다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 기복신앙에 치우쳐서 죄의식 없는 ‘바람(願望)’과 사랑 없는 ‘기원(祈願)’만을 일삼는 일부 신앙 공동체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마비된 이성’에 동정심이 입니다. 그러나 제 삶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런 태도를 취하곤 했던 저를 생각하면 저라고 떳떳한 신앙인이라고(이었다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고통이 있을 때만 유독 신심(信心)이 돋았습니다. 몸이 지독하게 아플 때, 사회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만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제 이성을 마비시키고 눈물을 돋게 했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그때그때 조금씩 반성적인 태도로 독후감을 써 본다는 것이 도를 넘겨서 주제넘은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보지 마시고, 제 글도 그저 ‘못난 이웃의 하소연’ 정도로 여기시고 부디 내치지 않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참, 이 글을 쓰면서 보는 오늘 <한국인의 밥상>은 사람을 많이 울리네요. 거제와 마산, 해녀 어머니와 해녀 딸, 두 사람을 이어주는 ‘어머니의 바다’와 미더덕 미역국 이야깁니다. 저에게도 그쪽 바다가 어머니의 바다였던 관계로 유독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이제 마산의 오동동도 나오네요. 옛날 제 나와바리였던.... <양선규, 페이스북, 2014. 2. 27. 인용 시 일부 수정>


필자는 “사랑하라, 그 누구라도, 이 세상 끝날까지.”라고 말하고 싶다. 그 말을 하려고 애써 종교를 우회한다. 그래야 자기 말이 ‘믿을 만한 말’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원수’라는 말의 종교적 함의를 설명하는 글 속의 인용문도 마찬가지 효용을 가지고 있다. 인용된 <원수와 이웃>에서 다루지 않는 것은 ‘원수’와 ‘이웃’의 관계다. 그 단어들에 대한 자기 느낌만 이야기하고 그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의 어록 속의 상호텍스트성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아마 그런 이야기가 공연한 ‘이성’의 발동을 부추겨서 ‘사랑’의 비이성적인 속성을 공격하지나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사랑하라”라는 술부가 중요한 말인데 이상하게도 삐딱하게 그 목적어에 꽂히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라는 필자의 말은 반어적으로 읽혀야 한다. 목적어에 신경 쓰지 말고 ‘사랑하라’에만 몰두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 글의 결은 종교적인 그 무엇이다. 사랑의 방법과 이유를 가르치는 종교에 충실한 필자의 신념과 의지가 글의 맥락을 주도한다. 글 속의 모든 화제들이 그 결을 따라서 줄지어 걷는다. 왜 우리는 그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렇게 한 목소리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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