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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07. 2019

어떻게 읽고 무엇을 쓸 것인가

사람이 먼저다 

어떻게 읽고, 무엇을 쓸 것인가


내 아이에게 무엇을 읽힐 것인가? 젊은 부모들이 많이 고민하는 주제입니다. 물론, 아이들 본인은 그런 문제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 재미있는 것, 정 안 되면 부모가 골라주는 것을 읽으면 되니까요. 고민은 전적으로 어른들의 몫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런 어른들의 고민은 기우(杞憂, 옛날 기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근심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읽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됩니다. 책보다 사람이 우선입니다. 사람이 되면 좋은 책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어릴 때 집안에 책이 전혀 없었어도 얼마든지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졸작 『감언이설』 「책은 집에 없었다」 참조). 중학생 이후에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책을 접했어도 저 정도의 문식력은 얼마든지 갖출 수 있습니다(저는 중학교 때 독서를 처음 했습니다). 책 속에는 길이 없습니다. 길은 오직 내 안에 있을 뿐입니다. 앞에서 열 편 정도 『행동하는 예수』라는 책을 대본으로 해서 독후감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그 일련의 작업이 이를테면,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왜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읽기(쓰기)의 시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새겨야 할지에 대해서 주로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용 따라 독서를 한 것이 아니라, 제 안에 있는 ‘길’을 따라 독서 여행을 한 기록입니다. 제 독서 여행의 목적지(행선지)는 늘 한 길입니다. ‘윤리를 구하는 독서’입니다.


읽기에 ‘어떻게’가 중요하다면, 쓰기에는 ‘무엇을’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쓸 것인가’가 정해지면 ‘어떻게’는 저절로 정해집니다. 좀더 대담하게(?) 말한다면 아예 ‘어떻게’를 무시해도 좋습니다. ‘무엇을’ 쓸 것인가만 고민하면 됩니다. 글은 자기가 쓰고 싶은 것, 쓸수록 재미있는 것을 쓸 때 좋은 글이 됩니다. 쓰기 싫은 것을 억지로 쓸 때는 좋은 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나서 재미있는 친구와 자주 만나야 합니다. 만날 때마다 심심한 친구와는 만날 때마다 지루합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말하는 친구와는 영화 이야기도 운동 이야기도 재미있게 서로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런 친구는 늘 돈 많이 가진 친구와 놀기를 원하지만 ‘돈 많은 친구’는 또 그런 친구를 싫어합니다. 돈 많은 친구는 영화 이야기, 스포츠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이야기의 궁극적인 결말을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친구는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친구를 만들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친구 사이에서는 돈을 서로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관중과 포숙은 예외입니다). 좋은 친구를 만들려면 스스로 재미있는 친구가 되어야 하듯이 글을 잘 쓰려면 스스로를 ‘무엇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책을 읽고 재미를 느끼는 사람으로 스스로 태어나야 합니다. 제가 해 본 바로는 ‘책을 읽고 윤리적 교훈을 찾아내는 재미’도 꽤나 쏠쏠합니다. 격한 운동을 통해 자기를 넘어서는 극기력을 키우는 것만큼 재미있습니다.


저는 30여 년 간 이런저런 대필(代筆)을 해 왔습니다. 일종의 ‘연설비서관’ 신세를 면한 것이 최근의 일입니다. 가장 힘들었던 때가 20대 시절 군문(軍門)에 있을 때였습니다. 모 사령부에 근무할 땐데 중위가 중장의 연설문(간행사, 축사)을 써야 했습니다. 사령부에서 발간하는 중요한 책의 발간사를 주기적으로 써야 했는데 그때마다 위에서는 ‘지침’도 없이 무조건 써 올리라고 했습니다. 그 해의 국방 강조 사항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전호(前號)의 간행사도 참조하고, 이번 호 특집이 무엇인지도 살피고, 암묵적으로 위에서 인용한 ‘계율’들을 적용해서 초안을 올립니다. 그야말로 암중모색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의 함량이 너무 미달이어서 ‘할 말’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녹음테이프라도 내려 보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밤새 낑낑대며 분량만 겨우 채워서 올리면 그때야 비로소 ‘지침’이 하달됩니다. 사령관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제서야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다시 시작합니다. 완전히 새 글을 다시 씁니다. 올린 것과 내려온 것 사이의 간격을 가늠하며(글쓰기에 있어서의 초인지과정의 역할?), 왜 내가 실패하였는가를 반성하며, 또 밤을 지샙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무지 고통스러웠는데 나중에 뒤돌아보니 공부는 꽤나 된 것 같습니다. 그 ‘간격 메꾸기’ 연습이 어쩌면 제 글쓰기 공부의 한 전환점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고통스럽게’ 대필자 역할을 하던 그 시점에서 소설가로 입신하게 되었으니까요.


대학에 직장을 얻은 후, 50대 초반까지 이런저런 보직 교수 생활을 한 10년 간 했습니다. 물론 그 동안 총장의 연설문이나 기고문(신문, 동창회보 등)은 모두 제 소관이었습니다. 전반기는 마지못해 글을 썼습니다. 고전(古典)에서 몇 마디 인용해서 그냥 적당히, ‘공자 앞에서 요령 흔드는’ 소리 위주로 지면을 채웠습니다. 제가 봐도 별 감동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한다고(비유가 맞나?) 후반기로 가면서 기대하지 않던 글발(?)이 좀 붙기 시작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쓰기 싫은 글을 쓰다 보니 오기가 났습니다. 마음대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습니다. 현실 무시, 감정 충실, 아무렇게나 막 썼습니다. 그렇게 막 써서 올리니 오히려 수정지시가 없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좋은 글 잘 봤다는 전화가 가끔씩 총장실로 걸려온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미친 척하고 마구 써대었더니 오히려 효과가 있었습니다. 아마 어쭙잖게나마 총장 빙의(?)가 좀 되었던 모양입니다. 수 년 전에 그 대필자 생활을 청산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가 그 수고를 떠맡고 있을 것입니다. “자기 글은 자기가 쓰자”, 반평생 무보수 대필자로 살아온 저의(약한 자의 슬픔?) 한 맺힌(?) 절규입니다.

<2014. 3. 7.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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