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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0. 2019

진실은 있는가, 라쇼몽

진실과 현실

과연 진실은 있는가라쇼몽  

   

『라쇼몽(羅生門)』(구로사와 아키라, 1950)이라는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30대 초반의 일이다. 내 20대의 견문은 국내에 한정되어 있었다. 일본이 어떤 나라라는 걸 거의 모르고 지냈다. 일본이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서른 살이 갓 넘어서였다. 서른두 살, 아직 세상 물정을 속속들이 모르던 때 대학교수가 되었다. <문학개론> 과목을 강의하려고 이런저런 책을 보며 교재를 찾던 중이었다. 유종호 선생이 지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실린 <화자와 시점>에 관한 글 안에서 『라쇼몽(羅生門)』을 처음 만났다. 그 글을 통해서 일본문학과 일본영화가 내 관심사 목록에 추가되었다. 비유하자면 그때 비로소, 『라쇼몽(羅生門)』(일본 헤이안 시대, 헤이안쿄(平安京)에 있는 커다란 문이며, "라조몬(羅城門)"이라고도 부른다)이라는 새 문(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 들어가 본 문안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경이로운 법이다. 이 글을 쓰려고 다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꺼내 놓고 보니 여기저기 연필로 줄을 긋고 깨알 같은 메모를 남긴 것이 눈에 띈다. 30년 저쪽에 머물러 있는 자화상이 희미하게 다시 떠오른다. 유종호 선생은 존경받는 당대의 비평가다. 그분의 글에서 가르침을 얻어 이립(而立)의 발판을 마련하는 학인, 문인들이 부지기수다. 나 역시 그중의 한 사람이다. 턱없이 부족한 작품을 너그럽게 용납해서 팔자에 없는(?) 소설가로 입신하게 해 준 두 분 최종 심사위원 중의 한 분이셨고,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좋은 책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훈도(薰陶)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인생의 은사(恩師)가 되신 분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또 십 수년이 흐르고 나서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 등을 위시한 몇 편의 작품을 몰아서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런 글을 쓸 것이라는 생각이 없었다. 그냥, 꽤나 인간 심리의 디테일에 집착하는 감독이구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 묶음에는 『라쇼몽(羅生門)』이 빠져 있었다.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서 그것만 따로 구입했다. DVD에서 먼저 본 것은 본편 영화가 아니라 이 영화를 ‘영화적으로’ 해설하는 부록 섹션이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본편 영화를 먼저 보다가는 이내 실망하고 집중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또, 구로자와 영화가 지니는 일종의 ‘작가주의’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 DVD에 그런 섹션이 있어서 그것부터 먼저 본 것이다. 작품의 원작이 사실은 「라쇼몽」이 아니라 「수풀 속」이며 몇 장면만이 표제작인  「라쇼몽」에서 따온 것이라든지, 감독이 카메라 운용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음영을 두어 어떤 효과를 만들려고 하는지, 각 등장인물들의 시선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가지 사건을 두고 각기 다른 보고를 행하는 각 장면 간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 너무나 일본적인 이 영화가 서구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결국 무엇이었는지 등에 관해서 꽤나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 해설 중에서 단연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영화에서 감독은 <진실>이 아니라 <현실>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설명이었다. 그 말은 <진실>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다는 말이었다. 있는 것은 오로지 당사자들이 당면한 <현실>만이 있을 뿐, 보편적인 설득력을 지닌 <진실>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는 것이라는 작가의 주장, 이를테면 실존주의적 세계관 같은 것이 감독의 관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갔던 정신이 번쩍하고 다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유종호 선생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라쇼몽(羅生門)』과 관련된 부분의 글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두 눈 뜨고 보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말의 실체에 대해서 전혀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진실>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약간의 편차는 있을지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현실>이 <진실>일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궁극적인 역지사지는 사실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감독은 끝내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그런 물음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애써 ‘하나 남은 진실’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저 담담하게 우리네 삶을 바라볼 것을 구로자와는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영화를 보기 전까지 끝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라는 화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칼을 훔친 나무꾼의 말이 그래도 가장 진실에 가까울 거야. 약점이 있는 자의 말은, 그 약점을 제외하고는, 항상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으니까, 죽은 자의 말도 너무 작위적이야. 지나치게 체면을 차리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어, 여성성에 대한 묘사도 그래, 너무 스테레오 타입이잖아, 등등의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애당초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여전히 많이 부족했다는 걸 알게 해 준 일대 사건이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요 등장인물들이 생각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생긴 미녀, 미남형이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나의 뇌리 속에 상상으로 형성되어 있던 영화 『라쇼몽(羅生門)』의 인물 형상들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 왜 그런 차이가 나게 된 것인지는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어쩌면 좀 황당하게 다가온 그 ‘못난 스토리’가 그런 선입견을 조장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못난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생긴 것도 그럴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선입견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못난 인간의 생각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결국 구로자와 아키라가 관심한 부분은 그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본질로 요약될 수 있는 실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그는 전후(戰後) 정체성 위기에 직면해 있던 일본 사회를 제대로 한 번 되짚어보는 차원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원작의 취지도 살리면서, 즉 일본인의 체면 중심 세계관이 빚어낼 수 있는 극단적인 디테일들을 하나의 매개로 이용하면서, 인간에게 과연 <진실>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실존주의적 물음을 제대로 형상화해 내었던 것이다. 그것이 서구 형이상학과의 접점(接點)을 획득함으로써 서구인들의 인정을 받아 이른바 명작(名作)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라쇼몽(羅生門)』의 영화로서의 작품성을 논한다는 것은 약간 시대착오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이 영화는 7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다. 그야말로 고전(古典)이다. 원작이 지닌 서사구조도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할리우드의 잘 짜인 반전(反轉) 영화에 익숙한 지금의 관객이나 독자들이 기대하는 ‘앞뒤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앞뒤가 잘 연결되지 않는’ 부분에 인생의 진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라는 이 영화의 주제는 지금도 역시 ‘현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그렇게 몰입했던 『라쇼몽(羅生門)』을 정작 영화로 대면한 것은 책으로 그것을 처음 만나고 나서부터 십 수년이나 흐른 뒤라는 사실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것이 구축해 놓은 성곽이 워낙에 도도(滔滔)한 것이어서 감히 다른 볼거리(영화)로 그 감격을 희롱하고 싶지가 않아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그때는 일본 영화를 대하기가 쉽지 않았던 때라 실기(失機)하고, 그 뒤로는 세월이 무심히 흘러 지금까지 그 감흥을 되살릴 길이 없었던 탓이었을까? 아마 그런 것들 모두와 내가 알지 못하는(캐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어떤 것이 그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에라도 30여 년의 세월을 한 줄로 다시 꿸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는 것이 즐거울 뿐이다.    

    

 혹시 『라쇼몽(羅生門)』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줄거리에 대한 소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한 편의 글을 소개해 올린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유종호)에서 뽑은 것이다. 내게 ‘라쇼몽(羅生門)’이라는 크고 깊은 문을 보여준 바로 그 대목이다.  

   

...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 : 「수풀 속」은 1922년에 발표된 단편이다. 한 도둑이 남편과 함께 길을 가던 여인에게 남편 면전에서 성적 폭행을 가한다. 숲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이어서 남편 되는 위인이 죽고 여인은 도망을 갔고 도둑은 붙잡힌다. 먼저 시체의 발견자였던 나무꾼, 도둑을 잡은 순검, 여행 중인 부부를 목격하였던 스님, 사위의 시체를 확인한 장모 등 네 사람의 간단한 진술이 전개되어 사건의 윤곽이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이 네 사람은 증인으로서 경찰 간부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이어서 작품의 중심인물인 도둑, 아내, 남편이 각각 모순되는 진술을 들려주고 있다. 시대는 12세기경으로 되어 있으며 남편은 사무라이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네 사람의 증언과 사건 당사자 세 사람의 진술로만 구성되어 있고 지문이나 작가 편의 논평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이 작품의 초점은 사건 당사자 세 사람의 엇갈린 진술에 있다. 도둑은 폭행을 가한 후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여인 쪽에서 미친 듯이 매달리면서 <두 남정네에게 수치를 보이는 것은 죽기보다 괴롭다.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진술한다. <살아남은 사람을 따르겠다>는 여인의 말에 살의를 느꼈고 묶여 있는 남편을 해치는 것이 비겁하다고 생각되어 남편을 풀어 준 뒤 칼을 돌려주고 결투를 해서 23합(合) 째에 치명상을 가했으나 그 사이 여인은 도망쳐 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편은 죽였으나 여인은 살해하지 않았으며 행방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극형을 내려달라면서 말을 맺는다.

한편 절간으로 도망간 아내가 참회하는 자초지종은 전혀 딴판이다. 도둑은 폭행을 끝낸 후 묶여 있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비웃었다. 남편에게로 달려가려는데 도둑에게 걷어차였다. 그때 남편의 시선에서 자기를 비웃는 차가운 눈빛을 발견하였다. 섬찟해서 그 순간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둑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남편과 함께 살기는 틀렸다 생각하고 죽을 작정을 하였다. 그러나 남편도 자신의 봉변을 목격했으니 혼자 남겨 둘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함께 죽어 달라고 하였다. 남편의 입에는 낙엽이 잔뜩 물려 있어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죽여라>고 말했음을 알고 단도로 남편의 가슴을 찔렀다. 그때 다시 정신을 잃었다가 차려 보니 묶인 채 남편은 숨져 있었다. 새끼줄을 풀고 그 자리를 떴다. 목을 찌르기도 하고 연못에 몸을 던져 보기도 했지만 죽지를 못하고 말았으니 관세음보살조차 자기를 버린 게 아니냐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그녀는 흐느껴 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죽은 남편의 혼령이 무당의 입을 통해서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도둑은 아내를 범한 후에 위로의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된 이상 남편과는 원만한 사이를 유지하지 못할 터이니 자기 아내가 되어 달라고 유혹하였다. 이때 아내는 황홀한 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처럼 아내가 예뻐 보인 적은 없었다. 아내는 어디든지 데려가 달라고 하더니 <저이를 죽여주세요. 저이가 살아 있다면 함께 될 수가 없어요>라고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도둑조차 이 말에는 기가 차서 아내를 걷어찼다. 도둑은 <이 여자를 죽일까, 살려 둘까?>라고 물어왔다. 이 말만으로도 도둑의 죄를 용서해 주고 싶었다. 자기가 망설이는 사이 아내는 숲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도둑은 새끼줄을 한 군데 끊어 놓고 그곳을 떴다. 아내가 버리고 달아난 단도로 자기 가슴을 찔렀다. 얼마 후 누군가가 소리 죽인 발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가슴의 단도를 빼었고 자기 자신은 영원히 어둠 속으로 잠겨 버렸다는 게 무당의 입을 통해서 남편의 혼령이 토로한 자초지종이다. 여느 경우와는 다르게 세 사람이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각기 자기가 살해자라고 엇갈리는 진술을 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나고 작자는 지문이나 논평 없이 일곱 사람의 진술만을 전해 주고 있는데 사건의 진상은 모호하다. [중략]

영화가 원작과 크게 다른 것은 아내가 버리고 달아난 단도로 자진했다는 혼령의 말을 나무꾼이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깊이 개입되어 성가시게 될까 봐 경찰에게는 숨겼지만 사자가 일본도로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예의 낯선 평민에게 말하는 것이다. 남편이 묶여 있는 사이 도둑이 여인에게 무엇인가 호소를 하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달려가 새끼줄을 끊고 두 남정네 사이에 몸을 던졌다. 도둑이 칼을 뽑았으나 <말(馬) 잃는 게 훨씬 아깝다>며 싸우기를 거절하였고 도둑은 그곳을 떠나려고 몸을 돌리고 따라오는 여인을 물리쳤다. 그러자 여인은 두 남자를 모두 공격하기 시작했다. 자기를 위해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처지이니 잃어버린 절개를 비웃을 자격이 없다고 남편에게 들이대었다. 그녀의 말에 자극되어 두 사람은 마지못해 싸움을 벌였으나 그것은 결투가 아니라 볼품없이 야단스러운 난투였다. 마침내 남편이 죽고 싶지 않다고 소리치면서 찔린다. 기진맥진하여 비틀거리면서 도둑이 여인에게 근접하지만 거의 황홀경에서 싸움구경을 하던 여인은 그를 물리치고 도망간다. 도둑은 일본도 두 개를 집어 들고 그곳을 떴다는 것이 나무꾼의 얘기다.  [유종호, 『문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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