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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0.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제8강 마부작침, 후회 없는 글쓰기

8. 마부작침(磨斧作針), 후회 없는 글쓰기     

후회 없는 글쓰기는 없다, 평소에 자주 되뇌는 말이다. 젊어서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입문한 이래로 단 한 번도 후회 없는 글쓰기를 해 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동화를 한 편 썼다. 학교에서 쓰라고 해서 쓴 것인데 훗딱 써서 낸 것이 교내 백일장에 입선을 했다. 나중에 교지에 실린 것을 보니 후반부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선생님이 가필을 한 모양이었다. 필통 안에서 연필과 지우개와 칼이 서로 주인의 사랑을 두고 싸우는 내용인데 종내에는 화해하고 다 함께 사랑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시간도 없기도 했고, 역량도 따르지 않기도 했고, 또 어린 마음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서로 싸우는 것으로 끝낸 이야기였는데 선생님이 그 끝을 해피엔딩으로 바꾸어 마무리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고친 다음에 상을 받은 것이니 그 끝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그때 든 생각이 “아, 이야기는 이렇게 매듭을 지어야 하는 거구나!”였다. 아마 그때 이후로 내게 ‘결말 강박’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젊어서 쓴 소설들을 보면 하나 없이 다 그 끝이 쌈빡하다. 그만큼 여운이 없다. 앞장의 제목인 ‘여운을 남기는 글쓰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요즘은 그런 젊은 날의 글쓰기가 전체적으로 후회가 된다.

고치고 또 고쳐서 후회 없는 글쓰기를 해 보자는 제안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후회스런 개인적 체험이 없어도 퇴고(推敲)는 글쓰기의 필수 과정이다. 물론 지나치면 안 하느니보다 못한 일이지만 애초부터 초고를 그냥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권할 일이 절대 아니다. 최소한 두세 번은 고쳐서 내보내야 한다. 주제나 구성은 덩치가 커서 바꾸기가 쉽지 않다. 우선 만만한 것부터 어떻게 손을 봐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글쓰기 문체를 선택하는 것은 기본적이고 또 중요한 일이다. 문체에 따라서 글의 힘이 많이 달라진다. 내용에 맞는 문체가 글의 힘을 배가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어체(올림말)로 할 것인가 평어체(내림말)로 할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고, ‘나’를 어느 정도 노출할 것인지도 조심스럽게 판단해야 한다. 표현에서 ‘파격의 미’를 어느 정도 추구해야 할지도 정해야 하고, 글의 내용과 협화(協和)할 수 있는 문장의 길이도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한다. 신작로로 갈 건지 골목길로 갈 건지, 걸어갈 건지 차를 타고 갈 건지도 미리 구상해야 한다. 단문과 장문의 비율, 한 단락의 크기(몇 개의 문장으로 구축할 것인가), 간결체로 할 것인지 만연체로 할 것인지, 비유는 어느 정도 쓸 것인지 등 정격(定格)을 미리 정해 두는 것이 좋다. 최소한의 기본 방향은 설정하고 글쓰기에 나서는 것이 유리하다. 그만큼 나중에 손볼 일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것이  평어체이지만 때로는 경어체가 효과적일 때가 있다. 편지(서간문)나 설교, 담화문 같은 것들은 경어체를 많이 쓴다. 보통 많이 가르치거나 많이 깨우쳐주고 싶을 때는 경어체를 쓰는 경향이 있다.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서 드러내 놓고 독자를 무시한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되므로 가르쳐 설명하는 글(敎說)에서는 문체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독자 쪽에서도 호오(好惡)가 갈리는데, 결정 장애가 있거나 외향성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경어체 문장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경어체 문장으로 된 글들은 대체로 독자를 텍스트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독자들은 그런 글을 앞에 두고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안의 호응을 불러내야 하는데 그것이 그들, 결정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심려가 깊고 사리 판단이 정확한 이로 보일지라도 내적으로는 누군가 결정력을 가진 사람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강한 사람들도 꽤 많다. 그들은 경어체 문장으로 된 글들을 읽는 것을 상당히 거북해하는 경향이 있다.  

주관이 강하고 내성적이면서 결단력과 실행력을 구비한 이들은 경어체 문장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경어체가 요구하는 그때그때의 호응에 잘 응한다. 글이나 책을 읽을 때에도 ‘뼈 하나는 내어주는’ 솔직한 태도로 임하기 때문에 경어체 작가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우군들이다. 

평어체가 요긴할 때도 있다. 감정보다는 이성의 작용이 승해야 하는 글에는 평어체가 월등히 유리하다. 윤리를 구하는 내용이 경어체를 애용한다면 진리를 구하는 내용은 평어체를 애용한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둘 사이를 부단히 왕래하면서 종횡무진하는 글들도 많다. 경어체와 평어체 글쓰기를 하나씩 예로 들어 문체의 작용에 대해서 한 번 숙고해 보자.   

  

<초필언(草必偃풀은 반드시 눕는다)>     

김수영의 시 「풀」에 보면, 시도 때도 없이 눕는 것들이 나옵니다. 시의 제목이 되고 있는 풀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 전체 중에서 ‘풀은 반드시 눕는다’와 관련된 내용이 9회 나옵니다. 그렇게 보면 시 「풀」은 온통 ‘눕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풀이 눕는 행태는 아주 다양합니다. 바람이 불면 당연히 눕고, 누운 김에(울다가) 또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일어나기도 더 빨리 일어나고), 날만 흐려도 눕습니다. 마치 풀들은 시도 때도 없이 ‘눕기에 좋은 상황’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시에서는 ‘눕는 것’이 절대적인 ‘풀’의 본질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읽어야 정상입니다.       

우리는 「풀」이라는 시가 서민(민중)을 대변하고, 서민의 어떤 속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풀이 서민(민중)의 한 속성을 드러내는 단어로 사용된 것은 그 역사가 깊습니다. 김수영의 그의 시 「풀」에서 사용하기 훨씬 이전에도 ‘초필언(草必偃, 풀은 반드시 눕는다)’이라는 말은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풀과 바람은 계급(봉건)사회의 주요한 메타포였습니다. 『논어』 안연(顔淵) 편에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군자의 덕(통치 행위)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삶)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바람의 방향을 따라) 눕는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정사(政)에 대해 물으면서, “만일 무도(無道)한 사람을 죽여 (나머지 다른 백성을) 도(道) 있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사형(死刑)의 방법으로 정사를 도모하는가? 그대가 선하게 행하면 백성도 선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뒤에다 부연한 말이 바로 이 ‘초상지풍(草上之風)’ 대목입니다.     

페이스북에 실린 글 중에서도 그 메타포에 대한 소개가 있었습니다(김민호 페이스북). 신영복 선생의 『강의』라는 책에서 읽은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시 계급사회에서 보는 인간관계의 한 단면입니다.

모시(毛詩)에서는 “위정자(爲政者)는 이로써 백성을 풍화(風化)하고 백성은 위정자를 풍자(諷刺)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초상지풍 초필언’(草上之風草必偃),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것을 위정자는 정치의 수단으로 삼고 백성들은 풍자의 빌미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민요의 수집과 『시경』의 편찬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래로 교화하겠다는 것이지요. 한편 백성들 편에서는 노래로써 위정자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초상지풍 초필언’ 구절 다음에 ‘수지풍중 초부립’(誰知風中草復立)을 대구(對句)로 넣어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이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시경』에는 이와 같은 서민들의 비판과 저항의 의지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큰 쥐」(碩鼠)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보리 먹지 마라. 

... 오랫동안 너를 섬겼건만 너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나라로 가리라. 

착취가 없는 행복한 나라로. 이제 우리의 정의를 찾으리라. [신영복, 『강의』 중에서]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풀」은 이런저런 관점, 이런저런 방법론으로 다양한 해석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가 일방통행적인 해석을 매우 못 마땅히 여기는 탓에 이것저것 다양한 해석 거리를 제공합니다. 시에서 전달하고 있는 스토리도 단선적인 ‘선형적 서사구조’와는 거리가 멉니다. 서민의 삶에 대한 두 생각, 두 감정이, 애증병존, 서로 교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일단 시를 한 번 읽어 볼까요?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전문      

이 시에 대한 풀이들을 소개합니다. 널리 알려진 것들이라 누구의 것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 ‘죽음’과 ‘그 죽음의 의식’으로부터 우러나온 ‘사랑’이 <풀>에 드러난 김수영 시 정신의 기본구조다. 김수영에 있어서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끝남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살아 있는 존재를 더욱 참되고 살찌게 하는 어떤 것이다.

 * 풀의 생리와 운명이 일체의 군더더기가 배제된 거의 완벽한 언어 경제에 의하여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풀이 상징하는 것은 「거대한 뿌리」에 등장하는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無識)쟁이 등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풀을 반드시 버림받은 존재로 번역하여 읽을 필요는 없다. 

 * 풀은 식물군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비천한 미물에 지나지 않지만, 또한 모든 삶을 누리는 존재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의존하는 기초이다.

 * ‘더 빨리’나 ‘먼저’라는 표현은 행위하는 주체자의 자유로운 의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풀이 상징하는 존재의 자유를 노래한 시이다.

 * 이 모든 것은 하찮은 목숨 하나라도 결코 무시되지 않고 소홀히 되지 않게 지키고 돌보려는 시인의 깊은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 김수영이 「풀」과 같은 극히 상징적인 수준에서 표현한 작품에서는 거의 유감없이 시적 성취에 이르고 있는 반면, 역사적인 현실에의 관심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자리에서 부분적인 모호함이나 추상적인 진술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때에, 그가 처했던 어떤 상황이 그의 시작(詩作)에 대하여 일정하게 제한하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런 책임은 자신의 책임인지, 다른 어떤 책임인지 엄밀히 따져 볼 일인지 모른다. [김종철, 「시적 진리와 시적 성취」 참조]     

「풀」은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이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기 바로 전에 발표했던 작품입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보는 이에 따라서 다양한 시적 감흥을 일으키게 하는 수작(秀作)입니다. 나약한 민중을 풀로 지칭하고 거친 세파(世波)를 바람으로 묘사하면서, 역설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눕는 것들(눕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의 주체의식과 생생력(生生力)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미물(微物)로서의 풀과 미력(微力)으로서의 서민의 삶을, 서로 마주 세워진 상태로(어느 한 쪽으로 수렴되게 하지 않고), 공감각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는 시로 여겨집니다. 음악성도 상당합니다. 마치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그 클라이맥스에서, 듣고 있는 느낌을 줍니다. 보다 전문적이고 본격적인 시 해석은 인터넷 검색을 해 보기만 해도 상세하게 접할 수 있으니 주제넘은 설명은 여기서 그치기로 하겠습니다. 간단하게, 오늘 우리의 주제인 ‘초필언(草必偃, 눕는 것들)’에 대해서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김수영의 시 「풀」은 ‘모시(毛詩)’의 전통을 이어받은 시입니다. 논어의 ‘초상지풍(草上之風)’을 패러디하고 있습니다. 김수영은 ‘공자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눕는 것들’은 항상 위에서 ‘누르(고 얼르)는 것들’에게 복속(服屬)해야 한다는 ‘공자주의’에 배알이 틀어진 것입니다. 자신의 신세도 결국 그 ‘눕는 것들’의 처량, 비참함에 여지없이 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기 안에 있는 비굴에 대해 성찰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비굴의 실체’인 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빨리’나 ‘먼저’는 이중적인 뉘앙스를 지니는 말이 됩니다. 용기도 되고 비굴도 됩니다. 그것 이상의 뜻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시인 자신이고 민초들이기 때문입니다. 시가 단선적인 서사구조를 가지지 않는 것은 시인이 본디 거짓을 고(告)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비를 몰아오는 동풍(東風)’은 오직 ‘눕는 것들’을 눕게 하는 힘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양풍(洋風)이 동쪽에서 왔다는 설명도 구차합니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도 그저 이중성일 뿐, ‘눕는 것들’로 산다는 것일 뿐, 다른 그 무엇도 아닙니다. 시인은 ‘초상지풍(草上之風)’의 실상(實狀)에서 자기 자신과 민초들의 실상(實像)을 연상했을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김수영은 역사도 실존도 모두 그렇게, 오직 적나라한 삶의 구체(具體)로, 살다 갔습니다. 

사족 한 마디. 김수영의 시 「풀」은 풀의 입장에서 읽어야 하는 시입니다. 그러면 시도 때도 없이 ‘눕는 것들’의 기분이 이해됩니다. 그 기분을 제대로 느끼는 자만이 통일시대의 ‘민주시민’일 것입니다. 한갓 풀인 주제에(조그만 힘만 가지면), 못된 바람이 들어, 시도 때도 없이 ‘초상지풍(草上之風)’의 ‘풍(風)’인 것처럼 노는 자들도 있습니다. 서민 출신으로서는 오갈 데 없는 자기기만입니다. 좁쌀로 태어난 자들이 마치 태산인 듯 행세합니다. 영락없는 ‘우주의 먼지’인 주제에, 그야말로 꼴불견입니다. ‘풀’은 지역이나 세대, 처지나 지위를 초월해서 공감할 수 있는 하나의 연대감입니다. 그 모든 차별 위에 존재하는 것이 ‘풀’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눕는 것들’인 것입니다. 그걸 모르면 설혹 겉모습이 다 같은 ‘풀’이라도 다른 풀들은 못 살게 구는 못된 잡초이거나 더 나쁘면 독초일 뿐입니다.<양선규, 페이스북, 2014. 6. 6>  

   

인용된 <초필언(풀은 반드시 눕는다)>이라는 글은 비록 경어체로 되어 있지만 어조는 꽤 신랄한 편이다. 기존의 시 해석들을 일괄 부정한다. 필자는 마치 자신이 김수영 시인에 빙의된 것처럼 단정적인 어조로 말한다. 요점은 ‘풀’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확연이대공 물래이순응’해서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구속받지 말고 제대로 된 맥락적 이해를 하자고 주장한다. 그 주장에 필요한 전장고사(논거)도 적절하게 인용하고 있다. 다음에 인용되는 글은 영화 감상문이다. 텍스트가 대중적인 소재라 친근감이 있고 문체도 평어체 문장을 쓰고 있다. 브런치 글쓰기에서 수백 건의 조회를 기록하기도 한 것이다. 쉽고 짧은 문장으로 된 글이지만 여운이 있는 글쓰기의 한 전형으로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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