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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0. 2019

걸으면서 빛나는 여자, 그라디바

타짜가 되는 법

걸으면서 빛나는 여자그라디바

     

한때 프로이트에 심취한 적이 있다. 직업의식에서, 소설 분석의 도구로 정신분석을 차용해 볼까 해서 시작한 것이었는데. 엉겁결에 빠졌다. 프로이트는 처세술(處世術)의 대가다. 노자나 장자에 버금간다. 세상을 원망하지 말고 무조건 이해하라고 가르친다. 누구와도 싸우지 말란다. 심지어 내 안의 질병과도 함께 잘 지내라고 타이른다. 그러면서 자기를 지킬 울타리를 만드는 법을 가르친다. 그가 친 울타리 안에서는 그의 말이 곧 법이다. 그는 교주다. 스스로를 구세주라 칭하지 않을 뿐 그가 만든 것은 종교다. 인간에게 고통과 상처를 면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자신이 만든 종교를 지키기 위해 '말씀을 지키는' 사제도 만든다. 거칠게 말하면 자기를 이을 타짜들을 양성한다. 사제와 타짜의 차이점은 지키는 것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누구는 신을 지키고 누구는 기술을 지킨다. 공통점은 하나다. 좌중을 압도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면 스스로 게임의 룰을 만들어 그 안으로 상대를 불러들이는 것이 타짜가 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프로이트가 만든 종교도 그렇다. 그가 만든 게임의 룰 안에서만 게임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그가 타짜를 만드는 방법이다. 그가 가르치는 도박 게임은 비교적 룰이 간단하고 승부가 분명하기 때문에 승부욕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덤빈다. 그러나, 모두 타짜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대개는 승부를 내지 못하고 손을 빼고 만다. 막판에 거는 판돈이 너무 커서인데,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프로이트는 꼭 마지막에 자신의 전부를 걸라고 요구한다. 전부를 거는 일은 누구에게나 불안한 일이다. 특히나, 이기는 게임만을 해야 된다고 배워온 사람들에게는 부담이 많이 가는 일이다. 

    

청년기 때 잠시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옛날 경북도청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주인집 아저씨가 자식 같은 나를 보고 꼭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존칭을 썼다. 다 좋은데 한 가지 불편한 게 있었다. 밤마다 찾아와서는 마작(麻雀)을 권했다. 룰을 모른다고 하니까, 자기가 가르쳐 줄 거니까 염려 말라는 거였다. “선생님 같은 분들은 두어 판만 해 보면 금방 재미있게 놀 수 있다”라고 꾀었다. 4 명이 한 조가 되어야 하는데 자리가 마침 하나 비었다며 나중에는 거의 강권하다시피 했다. 퇴직 공무원이었던 아저씨는 낮에는 빨래나 설거지 등으로 아주머니를 도왔고, 밤에는 그 마작판에서 본인의 잡비를 벌어 썼다. 끝내 그 강요에 견디다 못해 두어 달 있다가 하숙집을 옮겼다. 그런데 요즘 가끔씩 영화에서 마작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때 좀 배워둘 걸’하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사는 데에는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때’에 달린 것이었을 뿐, 내 의지나 선택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자주 있다. 첫사랑의 때가 왔을 때 나는 내 곁의 한 소녀를 좋아했고, 결혼할 때가 와서 그때 만난 여인과 결혼했다. 취직할 때가 왔는데, 마침 그때 자리가 빈 곳이 하나 있어서 그곳이 내 첫 직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그런 식이었다. 일종의 팔자론인 셈인데, 사실 그런 모든 것들이 약간의 예감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더 그런 확신의 느낌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예감인지 예측인지는 잘 모르겠다. 소위 내게 앞으로 닥칠 ‘때’에 대해서 그 몇 년 전이나 몇 달 전에 미리 어떤 예감이 주어진다. 큰 것들만 들어도, 결혼과 첫 직장, 그리고 지금의 직장이 그랬다. 일이 닥치기 수년 전에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 사실이 미리 감지되었다.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거나(결혼), 가까운 사람에게 뜬금없이 그 사실을 말로 전한 적이 있다(첫 직장). 물론, 그런 현상을 신경과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측두엽 관련 발작의 일환(데자뷔?)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일 것이고, 이성적 사유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의 현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토대로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해 충분히 예측하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내 처지(페이스북에 몰두하는)도 충분히 예감되던 일이었다(직장 동료에게 발설). 어떻든 상관없다. 나는 이미 한바탕 살아본 처지기 때문이다. 예감이면 어떻고 예측이면 또 어떻겠는가, 결과는 이미 다 나와 있는 걸. 어쨌든, 젊어서 ‘마작’을 배우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모르는 척 몇 푼 잃고 그 룰을 배워둘 걸, 너무 야박하게 살았다는 후회가 든다. 언제든 기회만 닿으면, 몇 푼 그냥 날리더라도, 그 놀이를 제대로 한 번 배우고 싶다.   

  

프로이트의 『옌젠의 「그라디바」에 나타난 정신착란과 꿈』(1906)은 명작(名作)이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프로이트의 해설이 더 재미있다. 여러 사람이 인정했다. 내가 본 ‘인증서’ 만도 서너 편이 된다. ‘예술의 신비’를 말로 표현한 것 중에서는 아마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글이 아닌가 싶다.   

  

... 노르베르트 하놀트는 로마에서 어느 고미술품 콜렉션을 둘러보다가 어떤 얕은 돋을새김을 발견하고는 이례적으로 강한 인상을 받는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강한 인상을 받았던 문제의 얕은 돋을새김의 훌륭한 복제품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몹시 기뻐했다. 몇 년 전부터 그것은 사방의 벽이 선반의 책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그의 연구실 한쪽에 얌전히 걸려 있었다. 햇빛이 이 얕은 돋을새김을 비추었으며 석양빛이 거기에 잠시 머무르기도 했다. 이 조각품은 걷고 있는 여인의 전신상을 표현한 것으로서, 실물 크기의 삼분의 일쯤 되었다. 그녀는 젊었다. 어린 소녀도 아니었으며 물론 성숙한 여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스무 살가량의 로마 처녀였다. 그녀는 비너스나 다이아나를 비롯한 올림푸스의 다른 여신들 또는 프시케나 님프가 표현된 그토록 흔한 다른 돋을새김을 전혀 상기시키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결코 적의를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보통 사람의 어떤 것, ‘실제의’ 어떤 것이 있었다. 이를테면 마치 예술가가 오늘날처럼 종이에 대강 스케치를 하는 대신에 거리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옆을 급히 지나가면서 모델을 점토로 본을 떠서 만들어놓은 듯했다.[『프로이트와 문학의 이해』(4장) 참조] 

    

옌젠의 중편소설 「그라디바」의 서두 부분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노르베르트 하놀트는 고고학자이다. 그래서 그의 진술이 지닌 고고학적 내포는 텍스트성이 있다. 그는 싸우러 나가는 마르스라는 듯의 로마 신 마르스 그라디부스(Mars Gradivus)의 이름을 따서 그 모델에게 ‘그라디바’라는 별칭을 붙인다(-부스의 us가 남성형 접미사라면 -바의 a는 여성형 접미사다).

그는 이 젊은 여자의 얼굴 모습과 거동이 우아하고 세련된 점으로 미루어 그녀는 서민의 딸일 리가 없고 분명히 귀족 집안의 아가씨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추론을 통해 그녀가 폼페이의 거리를 ‘비가 내린 날 신발이 물에 젖지 않도록 드문드문 놓인 포석(鋪石)만을 밟고 걸어가는’ 모습이 예술가에게 포착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부조의 여인 그라디바를 찾아 꿈속과 거리, 나아가서 폼페이까지 떠나는 주인공은 조에 베르트강이란 여인을 만난다. 사실은 그 여인과 주인공은 어린 시절 한 때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단지 그라디바를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 그녀가 사람인지 유령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한다. 주인공은 고고학에 몰두한 나머지(혹은 지도교수의 딸이라는 점에서 모종의 억압을 당해) 그녀를 잊은 거였고, 그녀는 주인공의 이웃에 살고 있었지만 주인공 노르베르트 하놀트가 자신을 알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공의 무의식 속에 잊혀졌던 사랑이 그 부조로 인해서 드러나게 되었고, 폼페이에서 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찾던 여인이 그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베르트강이라는 말은 그라디바라는 말과 같은 뜻을 갖고 있는 이라는 뜻이었다.

‘그라디바’가 ‘조에-그라디바’를 거쳐 ‘조에 베르트강(걸으면서 빛나는 여자)’으로 밝혀지는 서사구조가 우선 재미있다. 거기까지는 옌젠의 선물이다. 지척에 두고 있으나 소원하기만 한 옛날 여자 소꿉친구를 ‘그라디바 환상’을 통해 다시 불러내는 과정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다음 그 서사구조를 원용해서 인간의 정신 구조를 하나씩 설명하는 프로이트의 이야기는 한층 더 깊은 재미를 선사한다.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변태나 분열은 병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일탈, 하나의 정도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내가 ‘그라디바’에게 열광한 것은 그러한 옌젠이나 프로이트의 이야기(스토리 텔링?)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열광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래전에도 나와 같이, ‘걸으면서 빛나는 여자의 모습’에 열광한 사내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라디바를 묘사하는 대목을 처음 대했을 때 나는, ‘어쩌면 이렇게 내가 원하는 그림을 제대로 그려 놓았을까’라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일종의 페티시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젊어서 한 때 나는, ‘걸으면서 빛나는 여자’의 그림이나 사진에 매혹된 적이 있었다. 아마 외국 서적을 파는 가게에서 외국계 패션 잡지도 몇 권 샀을 것이다. 늘씬한 키에, 성장(盛裝)을 하고 활달하게 발걸음을 내딛는 여성들의 모습이 언제나 황홀했다. 특히 보일 듯 말 듯, 신체의 윤곽을 살짝 드러내면서 걷는 모습이 더 좋았다(그 시절, 연애가 지상의 과제이던 시절, 청바지가 잘 어울리던 아내가 드물게 치마를 입은 채 활달하게 걷던 모습이 유독 지금도 나의 뇌리 속에 선명하게 저장되어 있다. - 절대 아부 아님). 지금도 수집까지는 하지 않지만, 가끔씩 서점에 들렀을 때는 그때의 생각이 나서 꼭 한 번은 그쪽으로 눈길을 주는 정도의 관심은 가지고 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조금 확대된 추리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염마저 든다. 혹시 ‘걸으면서 빛나는 여자의 모습’은 모든 사내들이 남모르게 가슴속에 품고 있는 불패의 환상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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