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는 이제 그만
배는 안 고프니, 신데렐라 언니
《신데렐라 언니》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2010년도에 방영된 드라마다. 《신데렐라》를 조금 비틀었다. 주인공을 계모의 딸, '신데렐라 언니'로 잡았다. 큰 틀은 같다. 주인공이 자기 동일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형 서사구조를 보여준다. 끝에 가서 왕자를 만나는지는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김갑수와 이미숙, 문근영과 서우 등의 배우가 인상적인 연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데렐라 언니》를 보면 송강숙(이미숙 분)은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사람 좋은 구대성(김갑수 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 안방을 차지하고 구효선(서우 분)의 계모가 된다. 그렇게 ‘배고픔’을 벗어나고 나서는 예의 ‘계모의 악행’을 저지른다. 거기까지는 《신데렐라》다. 그러나 한 가족이 된 구은조(본명 송은조, 문근영 분)와 구효선의 역할이 뒤바뀌면서 드라마는 《신데렐라 언니》로 진입한다. 일반적으로, 필수 모티프는 그대로 두고 자유 모티프에 변화를 주는 이야기 가지치기의 한 전형이다. 《신데렐라 언니》에서는 ‘배고픔’의 주제가 뒤로 밀린다. ‘갈등’과 ‘성취’의 주제가 전경화 된다. 계모와의 갈등(형제 갈등)과 구은조의 정체성 찾기가 전면으로 부각된다. 그런 변화는 전 세계적으로 《신데렐라》형 이야기들이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역사적 변천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 ‘변천과정’에 대해 불만을 가진 역사학자들은 그런 것은 이야기의 도용(盜用)이라고, 그렇게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고양이대학살』(로버트 단턴/조한욱)이라는 책에 소개된 내용이다.
...「엄지소년」은 프랑스판 「헨젤과 그레텔」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 나무꾼과 그 부인이 살았는데 그들에게는 일곱 명의 자식이 있었고 모두 아들이었다. (…) 그들은 대단히 가난했고 일곱 명의 자식들은 하나도 자신을 돌볼 만큼 크지 않아서 큰 골칫거리였다. (…) 흉년이 왔고 기근이 심해서 그 불쌍한 부부는 아이들을 내다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이러한 사실적인 어조는 어린이의 죽음이 근세 초의 프랑스에서 얼마나 통상적인 일이었는지를 암시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1690년 중반, 인구상의 최악의 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채록된다. 그 시기는 흑사병과 기근이 북부 프랑스의 인구를 격감시켰고, 가죽쟁이가 길에 버린 쓰다 남은 썩은 고기를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고, 입 속에 풀이 가득 찬 시체가 발견되었고, 먹일 수 없는 아기가 병에 걸려 죽도록 어머니가 아기를 집 밖에 내다 놓았던 때였다. 아이들을 숲 속에 버림으로써 엄지 소년의 부모는 17세기와 18세기에 수차례 농민들을 압도하였던 문제, 즉 인구상의 재앙기에 살아남는다는 문제에 대처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먹는가 못 먹는가, 그것이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민담에서도 농민들이 당면하던 문제였다. 이것은 많은 이야기 속에서 ‘사악한 계모’라는 주제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러한 모티프는 그 당시 (사람들이 모이는) 화롯가에서 특수한 반향을 울렸을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인구 통계상 계모는 촌락사회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태어난 프랑스 사람들의 45% 정도는 10세가 되기 이전에 죽었다. 최소한 양친 중 한 명이 죽기 이전에 성년에 도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죽음이 방해하였기 때문에 생식력이 끝날 때까지 같이 도달했던 부부도 거의 없었다. 이혼이 아닌 죽음 때문에 결혼은 평균적으로 15년 정도 지속되었다. 다섯 명의 남편 중 한 명은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하였다. 계모는 모든 곳에서 급증했고, 과부의 재혼율이 열 명 중 하나였으므로 계부보다는 계모가 월등히 많았다. 전실 자식 모두가 신데렐라처럼 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나 이복형제들 사이의 관계는 거칠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신데렐라」에서 계모의 주제는 비교적 잘 다루어지고 있지만 ‘영양실조’라는 주제가 현격하게 홀대받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것은 실제 농민들이 유지해 온 한 판본과 비교해 볼 때 잘 드러난다. 신데렐라 판본의 하나인 「작은 아네트」에 따르면 사악한 계모는 불쌍한 아네트에게 매일같이 빵 껍질만 주고 양을 치게 하는데 살찌고 게으른 이복 자매들은 집 주위에서 빈둥거리며 양고기를 먹고는 아네트가 들에서 돌아오자마자 자신들이 먹은 그릇을 설거지시킨다. 아네트는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나 이때 동정녀 마리아가 나타나 요술 막대기를 주는데 아네트가 그것을 검은 양에 대기만 하면 훌륭한 정찬이 차려진다. 곧 그 소녀는 이복 자매들보다 더 통통해진다. 많은 원시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체제에서도 살찐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 통용되었는데 그녀의 새로운 아름다움은 계모의 의심을 일으킨다. 흉계를 꾸며 계모는 마법의 양을 발견하여 그것을 죽이고는 그 간을 아네트에게 먹이려 한다. 아네트는 가까스로 그 간을 몰래 묻어주는데 그것은 나무로 자라난다. 그 나무는 너무도 높아서 아네트 외에는 누구도 그 열매를 따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다가갈 때마다 나무는 가지를 굽혀 내려놓기 때문이다. (나라 안의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식탐이 있던) 지나가던 왕자가 그 열매를 너무도 원해서 그는 그 열매를 따오는 처녀와 결혼을 할 것이라는 약속을 한다. 딸 하나와 짝을 지어주려는 소망에서 계모는 높은 사다리를 만든다. 그러나 사다리를 타다가 계모는 떨어져 목이 부러진다. 그 뒤 아네트는 열매를 따고 왕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영양실조와 부모의 무관심이라는 주제는 많은 이야기 속에서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음식에 대한 욕심은 거의 모든 이야기에 나타난다. 농민들의 이야기에서 소원은 보통 음식의 형태로 나타나며 그것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럴듯한 식사’를, ‘흰 빵과 닭고기’를, ‘빵과 마실 수 있을 만큼의 포도주’를, ‘담배와 언젠가 여인숙에서 보았던 음식’을, 아니면 ‘언제나 빵 껍질을 먹을 수 있기를’ 원한다. 요술막대기, 반지, 혹은 초자연적인 은인이 생겼을 때 농민 주인공에게 처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언제나 음식이다. 그는 음식 앞에서는 어떤 상상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소의 변화, 이를테면 ‘케이크, 튀긴 빵, 치즈 조각’처럼 지역에 따라 약간의 세련된 가공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음식을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식도락이란 그들에게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식탁에서 부릴 수 있는 멋이 있다면 고작 이런 정도일 것이다. “…, 그리고 냅킨까지도 있었다.” (로버트 단턴/조한욱, 『고양이대학살』, 문학과지성사)
누가 뭐래도, 「신데렐라」는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전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이야기다. 가히 ‘만국 공통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악독한 계모와 착한 전실 자식 간의 갈등, 수없는 고난을 극복하고 마침내 행복을 쟁취하는 어리고 불쌍한 주인공, 때때마다 주인공을 돕는 환상적인 마술적 힘들, 그 이야기와 함께 할 때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행복감, 언젠가는 나에게도 지금까지의 모든 불운과 고난을 한 순간에 떨쳐버리는, 엄청 행복한 나날이 찾아올 것 같은 예감, 「신데렐라」의 이 모든 요소들은 빠짐없이 모든 나라, 모든 민족에게 공유되어 있다.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전형적인 상황 속에서 고유의 사건 ․ 사물적 요소로 완벽하게 개별화된 이야기는 아마 「신데렐라」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현전(現傳)하는 「신데렐라」에서 ‘배고픔의 주제’가 지나치게 축소되어 있다는 인용문의 주장은 문자(文字)의 기록적 사명을 중시하는 문헌사학자의 관점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야기의 원형은 그 발생 동기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모든 변형된 이야기들은 그 또한 사회상의 반영이며, 인류의 무의식적 소원 충족의 한 방편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인용문의 주장은 다소 고지식해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의 ‘바라는 것’들이 이미 바뀐 상태인데 그 발생 동기만 고집하면 뭣하겠느냐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가 인간의 서사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강력한 매개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 정도의 고언(苦言)은 충분히 가납되어야 할 수준이라는 생각도 든다. 무엇이든 규범적인 것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말이 나온 김에 전승되는 이야기들의 역할과 가치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다음은 「말과 나귀」라는 우화다.
말과 나귀가 주인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내 목숨을 구해 주려면 내 짐을 나누어 져 주게.”
하고 나귀가 말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은 마다하였지요. 피로로 탈진한 나귀는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짐 전부를 말에게 지웠습니다. 게다가 나귀의 가죽까지 얹었지요. 말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처량하게 탄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나 자신을 이런 참담한 지경으로 빠뜨리다니! 가벼운 짐을 마다했는데 이제 이 꼴이 뭐람. 나귀 가죽이고 뭐고 온통 전부를 지고 가야 하다니.”(이솝 우화 「말과 나귀」)
이솝 우화 「말과 나귀」를 제시한 것은, 앞에서 살펴본 「신데렐라」와 같은 전래동화와 우화와의 차이점을 부각하고 싶어서다. 이 두 양식은 서로 다른 것이어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역사적 변천과정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같아질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제시된 것이다. 우화(寓話)는 알레고리다. 알레고리는 보다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 전적으로 복속되어 있다.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문학적인 울림, 구성과 반(反)구성의 은밀한 충돌이라든지, 아이러니컬한 삶의 이면적 주제라든지, 존재에 대한 조건 없는 연민이라든지(휴머니즘), 언어 그 자체의 즐거운 용법 등이 개입 ․ 공존할 여지가 없는 장르다. 그러므로 우화가 복잡한 구성을 가지면 이미 우화가 아니다. 원 서사에서의 캐릭터의 역할이 도치되거나 필수 모티프가 흔들리면 더더욱 안 된다. 우화는 우화대로 전래동화는 동화대로 다 그 나름의 존재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양자가 하는 역할이 서로 상반되는 면이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화를 패러디하는 일이 지나치면(지나치게 동화로 몰고 가면) 오히려 교육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일례로 「토끼와 거북이」를 패러디해서 ‘거북이는 잠자는 토끼를 깨워 다정한 모습으로 같이 손잡고 정상까지 올라갔습니다’는 식의 재구성은 삼가야겠다는 것이다. 그 뜻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줄거리 고치기’는 엉뚱하게도 ‘인간들이 이렇게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것은 바로 이런 (경쟁을 부추기는) 이야기들 때문이다’는 식의 좋지 못한 편견을 조장할 수도 있다. 문제의 본질이 호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진짜 범인은 찾지 않고, 엉뚱한 곳에 와서 몽둥이질을 해대고 있는 꼴이다. 그것은 결국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는 꼴이 되고 만다. ‘심청이의 효(孝)’에 관한 누수(漏水)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인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앞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한 바 있다)
그나저나, 그와 같은 이야기를 놓고 보면 어쩔 수 없이 만감이 교차한다. 이제 ‘배고픔’의 주제는 우리의 주제가 아니다. 그것이 우리를 떠난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아이들에게는 더 하다. 마찬가지로 우화의 용도도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손을 많이 탄다는 것(패러디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