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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1.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글쓰기의 전략 - 후회 없는 글쓰기

브레인스토밍 유감


앞서 인용된 세 편의 글들이 ‘후회 없는 글쓰기’라는 이 장의 제목을 ‘후회 없이’ 이기고 있는지 필자인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을 읽는 독자 분들이 평가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예시문 가지고는 미진한 부분이 있을까 싶어서 몇 마디 노파심에서 우러나온 설명을 덧붙인다. 브레인스토밍이라는 말이 글쓰기 공부에도 등장하는 경향과 관련해서 한 마디, 그리고 결말짓기와 관련해서 한 마디, 그렇게 두 가지만 첨언한다. 

무슨 창의성 관련 책이나 글쓰기 지도서 같은 데에서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이나 ‘세렌디피티’(serendipity) 같은 말들을 대할 때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반발심이 많이 든다. 왜 그런 말들이 글쓰기 공부와 관련된 책에서 튀어나오는지 잘 모르겠다. 비즈니스 회의 같은 곳에서라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여러 사람의 지혜와 직관을 모아서 방법을 찾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하는 곳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글쓰기 지도서 등에서 공공연히 그런 용어들이 사용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꼼꼼하게 자료를 챙겨서, 튼실하게 아우트라인을 잡고, 최선을 다해 설명과 묘사를 다 하고, 후회가 없도록 퇴고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될 일에 무슨 그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덧붙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브레인스토밍은 어떤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여러 사람이 생각나는 대로 마구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방법이다.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 꼭 지켜야 할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엉뚱한 아이디어라도 두려움 없이 내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떤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할 때 나의 의견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늘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주저하거나 망설인다.

브레인스토밍은 이런 토론의 방식과 매우 다르다. 브레인스토밍에서는 엉뚱한 주장, 비논리적인 답변, 타당하지 않은 해결책 모두를 환영한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이 브레인스토밍이다. 브레인스토밍은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아이디어를 모아 그 속에서 해결책을 찾는 방법이다. 그래서 질보다 양이 더 중요하다. 사실 창의성이나 아이디어는 남들이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생각 속에서 나오므로, 엉뚱하고 모순적인 아이디어 속에 의외로 쓸 만한 해결책이 숨어 있기도 한다.

우리는 글감 찾기를 위해 이 방법을 사용할 수가 있다. 만약 글의 주제나 글감을 찾지 못했다면 우선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생각이나 자료를 있는 대로 전부 모아보자. 모은 자료나 글감의 양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의 질은 고려하지 않는다. [정희모, 이재성, 『글쓰기의 전략』, 들녘, 2007(28쇄), 86쪽.]     


‘글감 찾기’에 브레인스토밍을 이용한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효용이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글쓰기 공부를 하는 이들은 ①대입 준비생(논술), ②취업 준비생(자소서), ③전문적인 작가(소설가, 시인, 수필가) 지망생이나 ④아마추어 집필가 지망생(자서전) 등이 거의 대부분이다. 학자나 기자 등 직업 자체가 글쓰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직역(職域)에서 요구되는, 체계적인 글쓰기 수련과정이 있다. 

①과 ②의 경우에는 브레인스토밍을 하다가는 큰일 난다. 자기 멋대로 글감을 찾았다가는 백 프로 실패한다. 출제자나 채용자가 원하는 글감으로, 그들을 설득하거나 감복시킬 수 있는 ‘마땅하고 옳은’ 글쓰기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될 사람들이다. ‘엉뚱한 주장, 비논리적인 답변, 타당하지 않은 해결책’과 같은 것들을 끄집어낼 이유도 여유도 없다. ③의 경우는 좀 다르다. 영감이나 계시가 오도록 관심 가는 사물과 경험에 최대한 집중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 터득하지 못하는 부분은 선배들의 글쓰기에서 배우고 빌려올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이때 명심해야 할 일은, 설익은 것들이 내 안에서 날것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자신을 알고, 참고, 백련자득(百鍊自得)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브레인스토밍은 억제 대상이다. ④의 경우는 먼저 자신의 일생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지부터 결정해야 한다. 그게 가장 중하다. 이를테면 ‘거부열전’인지 ‘자객열전’인지 ‘충신열전’인지부터 결정해야 한다. 브레인스토밍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것이 결정되면 그것과 관련된 자료들을 성실하게 수집하고 그 재료가 요구하는 기승전결을 설치하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①②③④ 어디에서도 브레인스토밍으로 글감을 찾아야 할 까닭이 없다. 내가 보기에는 글쓰기 지도서에서 브레인스토밍을 거론한 것은 실수였다. 쓸데없는 무용지식(無用知識) 하나를 과시용으로나 원고 분량 채우기에 사용했을 뿐이다. 인용된 문장의 뒷부분에서 브레인스토밍의 결과라고 예시된 것들도 사실은 ‘스토밍’의 결과가 아니라 ‘단순 수집’이나 ‘표면 채집(발굴이 아닌)’의 결과이다. 그것들을 정리(분류)해서 아웃라인을 작성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글쓰기의 과정일 뿐 두뇌 폭풍(브레인스토밍)의 ‘특별한 결과’는 아닐 것이다.

동업자의 글이나 책을 읽고 소감을 다는 일은 항상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늙어서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후회가 없도록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것’보다 더 중한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글쓰기는 사람이 그 절반을 만들고 글 자체가 또 다른 절반을 만든다. 모든 기예가 다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칼을 쓰는 기예는 칼의 물성(物性)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글을 쓰는 기예는 글의 물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생각’으로, ‘생각의 어떤 방법’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생각일 공산이 크다. 내가 “글은 손으로 쓴다”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마지막으로 ‘후회 없이’ 글을 끝맺는 법에 대해서도 한 마디 덧붙인다. 


글쓰기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역시 시작 부분이다. ‘시작이 절반’이니 다른 부분보다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다. 브레인스토밍이라는 무용지식이 등장한 것도 사실은 ‘시작의 어려움’ 때문이다. 수십 년 글을 써 왔지만 내가 그나마 조금 생각을 하는 것은 오직 시작 부분이다. 그 이하는 그냥 ‘붓 가는 대로’ 쓴다. 그 다음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 결말이다. 앞에서 나에게 ‘결말 강박’이 생긴 이유도 말했지만, 그것 아니더라도 글의 마지막 부분은 누구에게나 부담을 주기 마련이다. 결말에 따라서 글맛이 크게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고려하는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①역지사지(易地思之)는 충분했는가?(이성에 호소하는 글이든 감정에 호소하는 글이든,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글들은 반드시 역지사지를 바탕으로 써져야 한다)     

②강조할 부분은 없는가?(본문 가운데 특별히 더 강조할 점이 있으면 다른 용어를 써서, 가급적이면 독자가 두 번 듣는다는 느낌을 안 가지도록 해서, 한 번 더 반복하되 그것이 주(主)가 되지 않도록 한다)      

③여운(餘韻)을 남겼는가?(본문의 내용을 기계적으로 요약해서 단정적인 어조로 끝을 맺거나 섣부른 전망을 꾀해서 독자 스스로 ‘발견의 진실’을 찾아 나서도록 격려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한다)      

④반전(反轉)이 가능한가?(반전이 가능하다면 미련 없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한 문장’을 찾아서 결론을 뒤집는다. 뒤집어서 더 좋은 결론이 나오면 그것이야말로 십중팔구 명문장이 될 공산이 크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판에 박힌’ 설명은 실제로는 글쓰기 공부에 큰 도움을 주기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결말은 서두와 본문에서 이야기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마무리 짓는 부분이다. 정리하고 마무리 짓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요약’과 ‘전망’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요약’과 ‘전망’을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보여주면 된다. 즉, 서두에서 제기한 문제와 그것에 대한 본문의 논의를 요약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보여주거나 제기된 문제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바탕으로 전망하면서 끝을 맺는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요약을 할 때 서두나 본문에서 썼던 말을 그대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약이므로 본문에서 다룬 내용이어야 하지만 표현은 달라야 한다.

전망을 할 때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다룰 수도 있다. 이를 밝히는 것은 필자의 정직성을 보여주고 독자의 반박을 피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정희모, 이재성, 『글쓰기의 전략』, 들녘, 2007(28쇄), 220~221쪽.]     


인간이 만드는 지상의 모든 것들이 다 그렇지만, 인간의 글쓰기도 미완(未完)의 상태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오직 ‘신의 목소리(필적)’만이 수정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연암이 「소단적치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끝까지 한 명의 적병(敵兵, 賊兵)이라도 더 잡아 죽이려는 노력을 계속 경주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글쓰기는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戰場)터다. 결말이 ‘표현만 다른’, 앞 내용의 동일한 반복이거나 이미 밝힌 것들을 재차 밝혀서 ‘전망’하는 장소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좋은 글쓰기는 마지막 마침표 하나까지 적을 섬멸하는 공격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 기계적인 요약과 섣부른 전망이 절대로 결말을 자기 영토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오늘 페이스북에서 본 내용을 하나 소개한다. 주자학의 대가였던 송나라의 학자 정이는 인생의 3가지 큰 불행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고 한다. 물론 공부깨나 한 선비들의 입장에서 한 말이다..

첫째, 어린 시절에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는 것.

둘째, 권세 좋은 부모 형제를 만나는 것.

셋째, 뛰어난 재주와 문장력을 가지는 것.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정자(程子)의 요약이 정곡에 닿아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소년등과(少年登科) 끝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을 신문 방송에서 자주 본다. 그것 아니더라도 세상에서 일찍부터 ‘결핍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라는 것을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젊어서 출세를 했다가 급전직하, 몰락하고 있는 이들은 항룡유회(亢龍有悔, 높이 올라간 용에게는 반드시 후회가 따른다),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높이 올라가버린 사람들이다. 따지고 보면 소년등과 하지 못해서 섭섭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둘째, 셋째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못한 이들이 생각할 때는 정자의 이 요약이야말로 혜택 받고 사는 이들의 입에서나 나올만한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임에 틀림없다. 무엇이든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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