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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11.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제9강 - 멋진 글쓰기

9. 용상봉무(龍翔鳳舞), 멋진 글쓰기 

     

를 확장하는 글쓰기    

 

글쓰기가 궤도에 오르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쳐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때로는 넘칠 때도 있지만, 그런 객기(客氣) 없이는 천고의 명문장도 없다. 물론 ‘천고의 명문장’만 바라고 글을 쓸 일은 아니다. 내 손이 닿는 곳부터 하나씩 정복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더 이상 새로운 해석이 나올 여지가 없어 보이는 전장고사(典章故事, 규범이 되는 책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일이나 말)일지라도 새로운 관점을 세우면 얼마든지 새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다. 모든 해석은 ‘경전(經傳) 읽기’를 지향한다. 알다시피 위대한 경전은 마르지 않는 해석의 우물이다. 경전은 내 마음을 비추고 있는(담아내고 있는) 우물이기 때문에 어떤 두레박을 써서 그 안의 물을 길어 올리느냐가 중요하다. 밑 빠진 두레박으로는 한 모금의 물도 길어 올릴 수가 없다. 튼튼하고 용량이 큰 두레박을 만들어 두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확장’을 도모하는 멋진 글쓰기에도 튼튼하고 속 깊은 두레박은 불가결의 필수 전제 조건이다.   

아무리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쓰는 족족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만 써낼 수는 없는 일이다. 글쓰기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글이 잘 되는 날도 있고 잘 안 되는 날도 있다. 물론 글이 잘 되는 날에만 글을 쓸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을 때가 있다. 급하게 원고 청탁을 받을 수도 있고, 용무 상 의무적인 글쓰기가 내 의지와 관련 없이 부과될 수도 있다. 최선의 방책은 평소에 글쓰기 수련을 부단히 해서 컨디션에 따른 부침(浮沈)의 폭을 최대한 줄여나가는 것이다. 용상봉무(龍翔鳳舞,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춘다)의 글쓰기를 상정하는 것도 우선은 그런 글쓰기의 필요성에 부응하자는 취지다. 평소 시간이 있을 때 글쓰기 능력을 최대한 신장해 놓으라는 것이다. ‘나’의 확장은 그런 부단한 글쓰기 수련에 의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나’를 확장하는 글쓰기는 글쓰기의 재미라는 측면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나’가 확장된다는 것은 그때마다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 즐거움이 결코 소소하지가 않다. 굳이 시나 소설이 아니더라도, 일기나 편지라 할지라도, 스스로에게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글쓰기는 그 자체로 예술이 되고 도(道)가 되는 것이다.     

‘나’를 확장하는 용상봉무의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예시문들을 그 구체적인 면모를 살펴보자. 나를 확장하는 글쓰기, 발견하는 글쓰기, 글쓰기 연금술 등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글들이다.  

‘나를 확장하는 글쓰기’는 경전 읽기의 방법처럼, 매번 글쓰기를 통해 삶의 자양분을 축적해 나가는 글쓰기를 뜻한다. ‘발견하는 글쓰기’, ‘글쓰기 연금술’을 두루 포괄하는 개념일 수도 있다. ‘발견하는 글쓰기’는 주로 고전을 읽고 도전적인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내는 글쓰기다. 기존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백지상태에서 텍스트의 현재적 의미를 발굴해 내는 것이다. ‘연금술적 글쓰기’ 또는 ‘글쓰기 연금술’은 다양한 글쓰기를 포괄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창작의 영감을 자극하는 작품을 만나면 같은 주제의 다른 글을 써보는 것(시를 보고 같은 주제의 산문을, 영화를 보고 같은 주제의 수필을 써 보는 식)을 위시해서, 무에서 유를 찬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텍스트1)에서 유(텍스트2)를 창조하는 모든 글쓰기를 지칭하는 것이다. 책이든 영화든, 텍스트 자체의 설명 코드에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맥락 속에 텍스트를 집어넣어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제 예시문들과 만날 시간이다. 각 예시문마다 그 대한 소감을 간략하게 밝히고 말미에 다시 일괄적으로 예시문들을 비교해 보려고 한다. 본 장에서는 ‘나를 확장하는 글쓰기’ 하나의 관점만 가지고 글쓰기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관계로 예시문의 글쓰기들을 그렇게 한꺼번에 비교해 보는 것도 여러 가지로 유익한 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전으로 읽으려면>     

자주 듣는 것 중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보다 못하다(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論語,雍也))>라는 말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검도회보지에 검도 수련과 관련된 글을 쓸 때 많이 인용했다. 특히 배우기에 힘든 것이 도구를 사용하는 기예(技藝)다. 처음에는 쉬워 보이지만 가면 갈수록 어려워진다. 어느 정도 기술이 몸에 붙을 때면 이제는 몸이 마음을 따라 주지 않는다. 노화가 오면 여기저기서 탈이 난다. 그러니 그때그때 검도를 즐겨라, 맞아주는 놈이 있으면 때리고 때리는 놈이 있으면 맞아줘라, 대충 그런 취지였다. 얼마 전에 젊은 페친 한 분이 내가 슨 글에다 재미있는 댓글을 달아주고 간 적이 있다. 아마 동양학 전공자인 모양이었다. 내 나름의 독법으로 논어의 한 구절을 해석한 글이었는데(제목은 ‘까막눈이어서’였다) 논어 읽기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경전 해석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취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워낙에 까막눈이라서 그런 식의 이런저런 주석들을 다 망라해서 종합하는 ‘경전 해석’을 소화해 내기가 어려웠다고 변명을 했다. 오늘 이야기도 ‘경전 해석’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굳이 제목을 단다면 ‘까막눈의 논어 읽기’ 정도가 되지 싶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보다 못하다(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이 구절은 세 경지를 비교한다. 행위 자체뿐만 아니라 그 행위의 주체, 곧 사람됨의 경지를 논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는 것(知), 좋아하는 것(好), 즐기는 것(樂)의 의미와 가치도 비교하고 그 어느 것에 몰두하는 사람의 사람됨도 같이 비교하는 것이다. 논어 저자의 관점에서는 아는 것 < 좋아하는 것 < 즐기는 것 순으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중한 것으로 매겨지는 것 같다. 그 서열 순으로 각각의 것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종합은 마지막에 한다.

아는 것(知之者) : ‘아는 만큼 보고, 보는 만큼 즐길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유홍준)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널리 퍼진 말이다. 얼마 전에 저자가 그 말의 출전을 밝히며 다시 그 표현을 다듬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좀 다르다. ‘좋아하다’ 대신에 ‘보다’가 들어왔다. 그건 비슷한 뜻으로 이해된다. ‘보는 것’은 ‘좋아하는 것’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아는 것’이 필요조건인 것, ‘즐기는 것’이 충분조건인 것도 양자 공통이다. 다만 ‘아는 것’을 대하는 태도는 또 좀 다르다. 하나는 불퉁스럽다면, 다른 하나는 꽤나 친절하다. 친절한 쪽(후자)에서는 오히려 ‘아는 것’을 가장 높이 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이를테면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다음 것들도 가질 수 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워낙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들을 대상으로 지식 상품을 팔아야 하는 입장이니 지극히 당연한 논법이라 할 것이다. 전자(논어)가 이미 ‘아는 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논어는 경전이다)라는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어쨌든 ‘아는 것’은 문 안에 드는 것이다. 입문(入門)이다. 문 안에 들지 않고서는 문화(文化)를 누릴 수 없다. 그래서 아는 것은 결국 법고(法古, 옛것을 본받음)고 계고(稽古, 옛것을 익힘)다. 알려면(배우려면) 옛것을 살피고 익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나중에 창신(創新)도 가능하다. 『논어』는 문 안에 든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가서 문화를 만끽하라고, 새로이 문화를 창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에 비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일단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모양새다. 호객행위다. 어디서든 지(知)는 입(入)이다.

좋아하는 것(好之者) : 지(知)가 문 안에 드는 것이라면, 호(好)는 그 집 단골이나 식구(食口)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많이 쓰는 말 중에 동호인(同好人)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좋아하는 것이 같으면 한데 묶일 수가 있다. 그 안에서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마당에 짐을 풀고, 같은 목표를 향해서, 서로 경쟁도 하고, 서로 돕고 나누기도 하고, 그렇게 동반(同伴)한다. 그렇게 문화를 부양한다. 호(好)의 경지에서는 동반이 가장 중요한 가치다. 그것을 아는 자는 오래 좋아할 수 있고 자기만 아는 자는 오래 좋아할 수 없다. 사람도 좋아하고 일도 좋아하고 도구도 좋아하고 공간도 좋아해야 진정한 호(好)의 경지에 들 수 있다. 호(好)는 거(居)다.

즐기는 것(樂之者) : 호(好)가 그 집 식구(食口)나 단골이 되는 것이라면 낙(樂)은 그 집주인이 되는 것이다. 식구 됨에 만족하지 않고, 대청을 밟고 올라서 그 집 안방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창신(創新)이다. 어디서든 주인 되기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물려받은 집이라도 그 집의 진짜 주인이 되려면 식구들의 승복을 받아내야 한다. 오랜 세월, 마당도 쓸고, 대청마루도 훔치면서 안방을 넘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바로 안방 문을 열다가는 주화입마, 문지방에 걸려 코를 깨고, 코피를 흘리며, 물러나와야 하는 수가 생긴다. 무엇을 타고 논다는 것은 반드시 시간을 요한다. 식구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무겁게 그들과 함께 하는 몸은 가볍게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악조건들을 타고 놀 수 있어야 한다. 낙(樂)은 승(乘)이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논어』의 가르침을 그저 <지(知), 호(好), 락(樂)>의 서열 매기기로 이해하는 것은 제대로 된 경전 읽기가 아닐 것이다. 이 말이 그저 아는 자와 좋아하는 자와 즐기는 자의 경지를 단선적으로 비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소략한 해석이다. 안다는 것은 문화 전승자로서의 소임을 깨닫는다는 것이고,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동반해서 부양한다는 뜻이고, 즐긴다는 것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 그것을 새로운 경지로 창달한다는 뜻이다. ‘입(入), 거(居), 승(乘)’ 없이는 인류 문화도 없다. 문제는 ‘입(入), 거(居), 승(乘)’이다. 그렇게 읽어야 『논어』가 경전이다.

견문이 턱없이 얕은 탓이기도 하지만 『논어』의 ‘지, 호, 락’(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을 위와 같이 해석한 책은 아직 보지 못했다. 전공자들과 비교하자면 나는 문자 그대로 ‘까막눈’이다. 그러나 부자(富者)의 ‘쌀밥과 고깃국’만이 한 끼의 식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빈자(貧者)의 수제비 한 그릇도 당당한 한 끼의 식사다. 때로는 고깃국에 질린 부자들도 일부러 수제비를 찾을 수도 있지 않는가? 맛있는 수제비를 끓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 굳이 내 손에 없는 ‘쌀밥과 고깃국’ 타령만 하고 앉았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만 게으름 피우지 않고 다 해도 인생의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내가 가진 날개로만 하늘을 날고 춤을 춰도 충분히 아름답다.     

위의 글 <경전으로 읽으려면>은 유명한 구절로 널리 인용되는 ‘지,호,락(知好樂)’을 어떻게 해석해야 가장 경전 읽기 식 독서가 되는가를 논한다. 단순하게 아는 것,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의 서열 관계로만 파악해서는 제대로 된 경전 읽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는 자의 실천, 좋아하는 자의 실천, 즐기는 자의 실천 덕목이 각기 다름을 알아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그런 주장의 배면에는 모든 문화적 실천에 있어서 그 주인 행세를 하려는 자들은 반드시 전 단계의 실천을 의무적으로 거쳐야 한다는 강조가 깔려 있다. 실천의 의무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문화적 향유의 권한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도 배어 있다. 이는 필자 자신의 문화적 실천에 대한 다짐이자 자부로 읽힌다. ‘지,호,락’에서 ‘입,거,승(入居乘)’을 유추한다는 것은 실제로 ‘지호락’의 진정한 경지를 자신의 문화적 실천 안에서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쓸 수 없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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