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Feb 17.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1강. 설명의 방법(1)

1) 뼈 하나는 주는 심정으로 - 설명도 결국은 ‘나’의 글쓰기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는 말도 있지만(서정주, ‘자화상’) 글쓰기의 팔 할은 설명이다. 해석하고 해설하고 전달하고 소통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으니 당연한 일이다. 설명에도 세 가지 차원이 있다. 가급적이면 주관을 개입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거나 해설하는 글쓰기, 드러내 놓고 내 입장을 관철시켜 남들과는 다른 견해를 내세우는 글쓰기, 그 둘을 적절하게 섞어서 균형감을 추구하는 글쓰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런 분류는 형식적인 것일 뿐이다. 모든 글쓰기는 궁극적으로 ‘나’의 의도와 기획의 소산이다. 어떤 형식이든 모두 ‘나’가 시켜서 밖으로 나온 것일 뿐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유용한 것은 위의 세 가지 차원 중 마지막의 것, 즉 ‘균형감을 추구하는 글쓰기’뿐이다. 나머지 것들은 대개의 경우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아서 굳이 고려할 필요가 없다. 

글쓰기의 팔 할이 설명이라면, 설명의 팔 할은 결국 ‘나’다. ‘나’의 내용이 설명의 글쓰기를 좌우한다. 설명이 ‘나’를 배제한 글쓰기이고 필자의 식견이 객관적으로 작동할 때 글의 수준이 올라간다는 세간의 오해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글쓰기는 요리처럼 외부에서 식자재를 공급받아 가공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비누처럼 자기 몸을 깎아내서 때를 벗기는 내향적인 작업이다. 지식이나 정보와 같은 외부적인 요소가 아니라 윤리, 신념, 의지, 연민 등과 같은 내부적인 요소가 글쓰기의 성패를 좌우하는 필수 모티프가 된다는 것이다. 설명도 글쓰기인 한 마찬가지다. 글 쓰는 이의 지식 내용은 오직 글의 제재를 결정하는 데에만 기여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글쓰기의 한 자유 모티프일 뿐이다. 다만 묘사나 서사보다는 설명의 글쓰기에서 필자의 식견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소 높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묘사와 서사는 거의 지식 내용과는 별개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글을 많이 써 본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지식보다는 ‘뼈 하나는 주는 심정’의 진솔함이 설명의 글쓰기에서도 가장 중하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상대의 목을 가져오려면(독자의 불신의 장벽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려면) 내 뼈 하나는 언제든 줄 수 있는 각오(솔직하게 나를 밝히는 글쓰기 태도)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예문을 통해서 설명의 글쓰기에서 ‘나’가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살펴보자. ‘나’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쓰는 글쓰기와 ‘나’를 가급적 드러내지 않고 쓰는 글쓰기로 나누어서 살펴보겠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이양호, 글 숲 산책, 2008)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림 형제가 모은 전래동화(Märchen, 작은 이야기)를 동화(童話)로 옮기는 과정에서 ‘필요 없는 덧붙임’이 이루어져서 원본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 과정을 질책하고, 그러한 반성 위에서 보다 원전에 가까운 번역을 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책이었습니다.

‘새하얀 눈 아이(Sneewittchen)’를 ‘백설공주’로, ‘그 못돼 먹은 여자’를 ‘왕비’로 옮기고 ‘눈처럼 새하얀’, ‘피처럼 붉은’이라는 표현을 ‘눈처럼 하얀 살결’과 ‘피처럼 붉은 입술’로 바꾼 것, 그리고 몇몇 잔혹한 묘사 장면들을 고의로 삭제한 것들이 원전의 문학성을 크게 해치고 있다고 이 책은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성인용이 아동용으로 개작되면서 이루어진 ‘적응과 순화’의 과정에서 원작의 의의가 많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디 ‘적응과 순화’는 이야기가 국경을 넘어 이동할 때 많이 이루어집니다. 쉽게 이해되는 어법이나 구성(인물, 사건, 배경), 그리고 독자가 몸담고 사는 곳의 문화나 금기를 반영하는 것이 바로 ‘적응과 순화’입니다. 쉽게 가는 것이 ‘적응’이고 자연스럽게 가는 것이 ‘순화’입니다. ‘새하얀 눈 아이’가 ‘백설공주’로 바뀌는 과정은 그 ‘적응과 순화’의 과정이므로 보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당연한 결과라고 봐도 될 듯합니다.

형 야코프(Jacob Grimm,)와 동생 빌헬름(Wilhelm Grimm)이 모은 그림동화(1812)가 잔혹 동화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순화시켜 보여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어른들의 아동관(兒童觀)에 다라서 결정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아이를 보는 눈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천사 아니면 악마입니다. 보통, 자기 아이는 천사일 공산이 크고 남의 아이는 악마가 될 공산이 큽니다. 또 순진무구한 동심을 이야기할 때는 전자 편에 서고, 욕심꾸러기 말썽쟁이를 말할 때는 후자 편에 서게 됩니다. 우리도 아이 시절을 다 겪었습니다만, 사실은 그 양 극단을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이들의 인생인데, 유독 부모가 되면 아이들에게 어느 한쪽만을 보고 싶어 합니다. 내 아이가 잘못되면 반드시 다른 아이들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합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상황에 따라, 혹은 상대에 따라, 착한 인간도 되고 악한 인간도 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아이들에게만, 특히 내 아이에게만 늘 선한 인간으로 남아 있으라는 것은 그들에게 인간이기를 그치라는 것과 같습니다.

제 경우를 보자면, 어린 시절은 악동 그 자체였습니다. 거의 사탄의 시동(侍童)에 가까웠습니다. 환경이 그렇게 몰고 갔습니다. 사춘기가 오면서 종교에 입문했습니다. 그 덕분에 사탄의 보병(步兵)으로 차출되는 것을 가까스로 면케 되었습니다. 물론 완전히 사탄의 유혹에서 두 발을 다 빼내진 못했습니다. 시간을 두고 서서히, 오락가락하면서, 어른이 되어 가면서, 차차 슈퍼에고의 명령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순자의 성악설이나 브루노 베텔하임 식의 정신분석적 관점이 동심을 이해하는 데에는 훨씬 더 타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훈육(위협과 공포)도 없고, 사랑(보살핌과 보상)도 없다면 인간은 야수로, ‘자연(自然)스럽게’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대놓고 본능이 안내하는 대로 사는 존재가 될 겁니다. 그렇게 사회화에 대한 요구가 기승을 부리는데도 방종과 일탈(사회화의 관점에서 본다면)이 끊이지 않고 넘쳐흐르는 것을 보면 인간의 악마성은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다만 ‘대놓고’ 짐승처럼 살 수 없을 뿐이지 속으로는 모두 짐승인 것입니다.

위협이든 보상이든, 훈육이든 사랑이든, 어른들은 반드시 무언가 아이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베푸는 것’이 있어야 아이들은 어른의 지휘를 받습니다. 베풀지 않아도 저절로 아이들이 선한 인간이 되고,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도덕심을 길러낼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그런 생각을 지휘하는 게 바로 사탄입니다). 인성은 본디 선한 것이고 그것은 ‘타고나는 것’이어서 일체의 가공은 결국은 역기능을 할 뿐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보병입니다. 그들부터 퇴치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가진 것 없는 아이들은 할 수 없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신데렐라로 키우려면 ‘마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나 이웃이 없으면 밤에만 나타나 도움을 주는 늙은 마법사라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신데렐라는 아직 어리니까요.  <양선규, '아침광장', 경북일보, 2019. 2. 13>  

  

위의 예문은 “아이들은 어른들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방편으로 동화의 개작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물론, 그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은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라는 책이다. 책을 읽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고, 내 경험에 비추어 보니 그 책의 주장과는 다른 내 교육관이 확인된다는 식이다. “경청할 만한 지식 정보를 나열하되 그것의 가치를 보증하는 것은 결국 ‘나’의 내용이다”라고 쓴다.    

마지막이 정책적 명제(~이 반드시 필요하다)로 장식되면서 필자의 주장이 강하게 노출되고 있지만 이 글은 전체적으로 설명의 글쓰기를 지향한다. 동화의 원천 그림 동화로부터 시작된 적응과 순화의 문제, 심리학적 아동관의 문제, 방임형 교육관이 지니는 문제점 등을 순차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제목이 되고 있는 ‘신데렐라는 어려서’와 마지막 결구 ‘마법이 필요하다’도 주제를 부각하는 수미일관의 호응을 보이고 있다.

글쓰기의 팔 할이 ‘설명’이고 설명의 팔 할이 ‘나’라는 것이 위의 예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것을 바탕으로 유용한 지식들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내 뼈’ 하나를 주고 적의 ‘목’을 가져올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글 쓰는 자들의 운명이다.  

   

작가의 이전글 글쓰기 인문학 10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