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Mar 16. 2019

무섭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귀신이 사는 곳

무섭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귀신이 사는 곳

 

귀신은 왜 집에서 잘 나타날까? 누가 그렇게 물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사람이 거기 사니까. 그러니, 그가 아, 했다. 그럼 공동묘지는? 거기는 죽은 자들의 집(陰宅)이다. 그리로 사람이 가니까 귀신이 나타난다. 귀신들은 자기들끼리는 놀지 않는다. 그런가? 결국 사람이 있어야 귀신도 있다는 거네. 그렇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귀신들이 놀지 않는다. 자기들은 무섭지 않으니까. 


옛날에는 보통 폐가(廢家)에서 귀신이 잘 나타났다. 폐가는 죽은 집이다. 죽은 집이니까 죽은 자들의 영혼이 산다고 여겼다. 집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방 늙는다. 같은 나이라도 폐가 쪽이 훨씬 빨리 늙는다. 사람의 기(氣)가 빠져나가면 집안의 물건들도 금방 힘을 잃는다는 속설이 있다. 30년쯤 전, 충북 옥천의 한 고택(엄밀히 말하면 오래된 고택은 아니고 규모가 제법 큰 전통 한옥이었다)을 들른 적이 있었다. 직장이 그 근처라 오다가다 그 집의 내력을 알게 되어 호기심에 한 번 들어가 본 것이다. 정지용 생가(그때는 그냥 생가터였다)를 찾아 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집안에 사람이 살기는 살았는데, 행랑채만 쓰는 것 같았고 사랑채부터는 온통 폐가였다. 기와가 내려앉고 문짝들이 다 떨어져 나간 것이,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귀신이 사는 집’이었다. 영화라도 찍을 요량으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마당 뒤쪽으로는 소나 말을 키우는 목장 같은 것이 있어서 더 을씨년스러웠다. 관리인 비슷한 이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그저 “모르겠시유, 주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야 뭐...”, 그러고 말았다. 더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말라는 투였다. 

최근에 그곳이 복원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고 서울 가는 도중에 한 번 들렀다. 깨끗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내(家內)에 있던 나무들이 다 없어져서 그런지 옛날의 고택 분위기는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건 아닌데 싶었다. 집을 복원한다는 것은 사람이 들어가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마치 벌거숭이 임금님 꼴이었다. 벌거벗은 가옥들만 원래 있던 자리에 뎅그러니 복원시켰을 뿐이었다. 비슷한 사정에 놓여 있었던, 경남 창녕에 있는 성(成)씨 고택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거기도 거의 폐가 수준에 이르렀던 것을 후손 중의 한 사람이 대대적으로 중창, 복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쪽은 정원을 그대로 복원하고 집주인 가족들도 짬짬이 내려와 기거도 하는 모양이었다. 군청과도 협조가 잘 되고 있어 앞으로 주민 공유 공간으로도 제공될 예정이라고 했다. 집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그에 비해 옥천의 고택은 마치 <장난감 도시>에 들어온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나무와 흙과 기와와 종이들만 집 모양 안에 그득 들어있을 뿐이었다. 사람은 아예 없었다. 관리사무소에만 두어 명의 나이 지긋한 공무원들이 오락가락 할 뿐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옛날의 귀신 나오는 집이 더 나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인데, 누구든 사람이 들어와서 살게 하면서, 기와나 좀 수리하고 문짝이나 새것으로 바꾸어 달면 될 것을 생뚱맞게 모두 헐고 새로 지어서 완전히 졸작(拙作)을 만들어버렸다. 


짐작 하셨겠지만, 옥천의 고택은 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시대 벼슬 높은 사대부 기와집의 대표적 형태를 간직했던 육여사 생가의 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00년대 김씨·송씨·정씨 성을 가진 정승이 거주해 '삼정승의 집'이라 불릴 정도로 조선 상류계급의 건축구조를 엿볼 수 있는 가옥이었다. 이후 여러 차례 개·보수 작업을 거쳤고 육여사가 실제 생활했던 생가는 1894년에 신축됐다. 1918년 육여사 부친 육종관씨가 구한말 세도가의 자손에게서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라는 설명이 게시되어 있다.

창녕의 성씨 고택은 국내의 유수한 실업가인 한 후손이 사비를 털어 옛날의 200간 전성기를 반절 정도라도 재현하겠다고 의욕적으로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소유권 관계도 한데로 모으고, 어느 곳의 좋은 고가(古家)가 헐릴 운명에 놓였다는 소식이 있으면 불원천리, 그 집을 사서 옮겨오기도 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쪽 분들은 그런 이야기가 나도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 집이(고택 중의 한 가옥이) 김정일의 첫째 부인이며 그의 장남 김정남의 생모인 성혜림의 생가라는 것이다. 듣기로는 성혜림은 경처(京妻) 소생이라 실제로 그 집에서 나고 자라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두 집은 비슷한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 한 때 영화를 누린 세월이 있었고, 공히 폐가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가 다시 환골탈태, 화려했던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옥천 고택은 망실 위기를 보다 못해 여론을 모아서 나랏돈으로 새로 단장되었고, 창녕 고택은 현달한 자손의 공덕으로 사비로 재건되었다. 내 느낌으로는 역시 사비를 들여서 지은 것이 모양이 더 나는 것 같았다. 나랏돈을 쓰는 이들이 제 돈 쓰듯 나랏돈을 썼다면 절대 그렇게 허투루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복원을 하려면 제대로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서론이 길어졌다. 각설하고, ‘귀신 나오는 집’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귀신 나오는 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무서운 이야기의 소재가 되어왔다. 영화 <천녀유혼>의 난약사, <귀신이 산다>의 재개발 지역의 2층집, <장화, 홍련>이 살던 집, <오싹한 연애>의 강여리(손예진)의 집 같은 것이 근자에 나타난 ‘귀신 나오는 집’의 대표적인 예가 되지 않나 싶다. 

여러 귀신 나오는 집 중 앞의 두 경우는 귀신이 사는 집에 인간이 침입한 것 때문에 벌어지는 예측불허의 사건이 주 내용이다. 주제는 하나같이 권선징악(勸善懲惡)이다. 그래서 ‘귀신은 무섭지만 착하게 살면 귀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라는 민간 신앙의 공식을 만들어낸다. <장화, 홍련>과 <오싹한 연애>는 좀 다르다. 영화 <장화, 홍련>은 고전 <장화홍련전>에서 모티브를 따와 영화화한 것이다. <장화홍련전>은 서로를 끔찍이 아끼는 두 자매가 계모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어 원혼이 된다는 전형적인 계모형 가정 비극이다. 원전에서는 계모와 장화, 홍련 자매가 선악의 이분법적 대립구조를 만든다. 원전의 모티프는 그대로 살렸지만, <장화, 홍련>에서의 캐릭터들은 새롭게 재창조된다. 그래서 원전의 플롯을 따르지 않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전개한다. 원전이 비극적인 가족사 안에서 권선징악의 내러티브가 전경화 되어 있었다면, 영화 <장화, 홍련>은 선악이 모호한 가족관계 속에서 인간성 탐구와 함께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공포와 미스터리가 강조되는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오싹한 연애>는 예고편만 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식스 센스> 식의 ‘귀신을 보는 아이’ 모티프를 활용한 코믹 호러라는 것만 안다. 해피 엔딩일 것이라는 예감만 든다. 굳이 나누자면, 앞의 두 경우는 ‘<집> 귀신 이야기’이고 뒤의 두 경우는 ‘집에서 보는 <원한> 귀신 이야기’이다.

어쨌든 ‘귀신 나오는 집’ 이야기는 귀신이 우리 마음속에 그 거처를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마음속의 불안과 염려가 그런 형태로 밖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모티프로 소설을 구상한다는 미셸 투르니에의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귀신 나오는 집(콩트 구상). 옛날에 한 상인이 살았다. 그는 이스파한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고 싶었다. 그는 그 도시 안에서 팔려고 내놓은 집들을 여러 군데 찾아가 본다. 그 중 한 집이 위치나 규모나 내부 구조로 보아 다른 모든 집들보다 월등하게 나아 보인다. 그런데 그 집이 어디로 보나 그보다 훨씬 못한 다른 집들보다 값이 엄청나게 싸다는 사실을 알고 상인은 너무나 놀라게 된다. 의외의 사실에 놀라워하는 그를 보자 안내해 갔던 중개인이 그 집은 귀신 나오는 집으로 앞서 살던 집 주인 셋이 다 포기하고 떠나버렸다고 설명해준다.

속 시원히 사정을 알고 싶어 이 상인은 그 전 주인들을 찾아가 그들의 증언을 들어본다. 1. 이 저주의 발단인 첫 번째 주인의 이야기. 2. 두 번째 주인의 이야기. 3. 세 번째 주인의 이야기.

그런데도 상인은 집을 사기로 결정하여 그 집에 자리 잡는다. 그는 그 집의 수수께끼를 밝혀내고 저주에 종지부를 찍는 데 성공한다. 모든 것에는 그 집 네 주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삶이 긴밀하게 뒤섞여 있는데, 결국은 마치 정신분석 치료와 같이 마감된다. 요컨대 문제의 귀신 나오는 집을 역대 주인들의 병들고 객관화된 무의식으로 간주하여 다루는 것이 핵심이다. 처음 세 주인들은 노이로제를 치료하기 위하여 기껏 이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반면에 네 번째 주인은 캄캄한 방의 열쇠를 찾아낸 것이다. [미셸 투르니에(김화영), 『외면일기』 중에서]


무의식의 드러난 모습, 객관화된 자기표현으로 ‘귀신 이야기’를 해석하겠다는 소설가의 의욕이 돋보인다. 소설가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탐낼 소재다. 투르니에가 과연 그 ‘귀신 나오는 집’ 이야기를 제대로 작품화해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소재로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 싶다. 적어도 내 안에서 귀신이나 도깨비 두어 명(마리?)은 실하게 키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늘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무엇들에게 뒤집어 씌워 이야기한다. 평생 도깨비 한 번 못 본 사람들이 대놓고 ‘도깨비 같은 놈’, ‘도깨비 같은 년’들에 대해서는 양보 없이 떠들어댄다. 귀신이든, 도깨비든, 모두 인간들 자신의 이야기다. 귀신 들면 귀신인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아마 평소에 귀신 이야기를 그렇게 즐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족 하나, <천녀유혼(倩女幽魂)>의 ‘천녀’를 ‘天女’로 아는 이가 많다. ‘倩女’가 맞다. 천녀(倩女)는 보조개가 예쁜 미녀를 뜻하는 말이다. <천녀유혼(倩女幽魂)>의 주인공 이름이 섭소천(聶小倩)이니까 ‘천녀’라는 말이 그녀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섭소천(聶小倩) 이야기는 중국 청나라 때 포송령에 의해 쓰여진 『요재지이(聊齋志異)』에 수록된 이야기 중 하나다. 영화 <천녀유혼>(1987)은 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제작된 것이지만, 원작과는 그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에서 ‘천녀’를 사로잡고 있으면서, 사람의 혼을 빨아들이게 사주하는 양성 공유의 대요괴가 바로 아카시아 나무라는 사실이다. 영화 상으로 표현되는 그(그녀)의 파괴적인 촉수(觸手)가 바로 아카시아 나무의 뿌리다. 그(그녀)는 나무귀신(요괴)인 것이다.  ‘요재’는 포송령의 서재 이름이자 그의 호이고 ‘지이(志異)’나 ‘지괴(志怪)’라는 말은 동식물이 사람처럼 인격(신격)을 가지고 등장하는 이야기, 혹은 명혼설화(산 자와 죽은 자의 밀애)와 같은 일종의 판타지 서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요재지이(聊齋志異)』는 요재 포송령이 ‘서재(요재)에서 쓴 판타지 이야기’라는 뜻이다. 

사족 둘, 귀신에도 선악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중국 특유의 도교적 영향인 것 같다. 우리나라의 속신은 대체로 ‘(선한 사람도) 귀신이 되면 모두 악해 진다’로 흐른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어르고 달래야 할 존재다. 공자님도 그렇게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후손들을 굽어살피는 우리의 조상신들은 ‘귀신’이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 글쓰기 인문학 10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